부엌신 - 또 다른 인생 이야기
양귀자 지음 / 살림 / 200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여름에 서재(라고 하기엔 작다^^;) 정리를 하며 안 읽은 책들을 기증하고 나눠줬다. 그중에 살아남은 책이 '부엌신'이다. 이 책을 어떤 경로로 갖게 됐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도 모르겠고.. 암튼 아주 오랫동안 자고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음식점을 하게 된 정말 우연한 사연, '빈집과 고양이'를 읽었는데, 어, 이 책 재밌네 싶었다. 하여 출퇴근길 밀고밀리는 만원 전철 안에서 한동안 좋은 동무가 되었다. 내가 제일 처음 밑줄을 그은 말은 "그 옛날 내 어머니가 차려주던 식탁의 풍미를 재현하는 일이라면 용기를 내서 진정으로 해보고 싶다." 였다. 용기를 내서 진정으로 해보고 싶은 일! 어떤 일을 하며 그런 마음을 내어보고 싶기 때문이다. 간절히.

크고 위대한 무엇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아주 특별한 무엇, 그런 것을 나는 원했다.

컨설턴트보다 내가 더 나를 잘 알고 있다는 사실, 나는 그래서 스스로를 믿기로 했다.

음식점 오픈 준비에 1대, 2대, 3대 주방장에 안착하기까지, 개업날 펑펑 울어버린 일, 불명예스러운 일로 1기를 마감하고, 리모델링을 하며 한여름을 보낸 일 등을 쭉~ 따라가며 크고 작은 에피스도들이 참 흥미로웠다. 아주 특별한 무엇이 있는 까페를 좋아하고 나중에 그런 공간을 만들어보고픈 마음이 있어서 더 그랬는지도^^

<어머니가 차려주는 식탁>의 메뉴판을 보고 손님들이 제공한 아이디어가 또한 예술이다. 주로 남자손님들의 요청이지만, 아련하고 상큼한 '형수정식', 할머니의 정성이 어머니보다 나으므로 제일 윗 메뉴에 '할머니 정식'을, 깊은 맛은 없으나 상은 화려한 쪽으로 해서 그 이름을 '마누라 정식'  

6호실 작은방에 앉아 열심히 계산기를 두들기고 있노라면 돈이야 남건 말건, 뭔가 대단히 생산적인 일을 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서 어느 날은 홀로 이마를 짚으며 씩 웃기도 했다. 돈계산은 너무나 머리가 아파, 하고 생각했는데 그걸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

여름내 건물 리모델링을 하고 2차 개업 전 그릇을 찾아 헤맨 이야기가 마음에 남는다. 처음 개업을 할 때도 영업용 그릇이 아닌, '마음을 담아 내놓았다는 느낌이 절로 나는' 그릇을 찾아 온 시장을 다 돌아다녔다고 한다. 그렇게 발품을 팔다 우연히, 정말 우연히 연한 갈색 생활도기 세트를 발견해 잘 쓰게 됐다는데... 4년여 사이 그 생활도기가 전국의 한식집에 상당수 보급되어, 2차 개업을 앞두고 새로운 그릇을 찾아 나서게 된다. 이천에서 도예가를 수소문해 묻고 또 물어가며 청자 그릇 세트를 만들어냈는데... 개업 날 하루에만 주방에서 내려보낸 흠집 난 그릇이 수북했다고. 결국 열흘만에 청자를 포기하고 다시 제작한 세번째 그릇, 백자에 철 안료를 조화시켜 비로소 원하는 그릇을 얻을 수 있었다고.

이쯤 되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가게 간판이며, 메뉴판, 세트 도구들도 모두 자신의 마음에 꼭 맞는 것을 찾아내는 노력과 정성, 열정이 대단하다. 원래 이런 거야, 니 맘에 꼭 맞는 거 그런 건 세상에 없어, 적당히 타협하는 거야 라고,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 전에 나 스스로 말하지는 않았나 그런 반성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나만의 개성을 가진, 나만의 무언가를 하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나는 <어머니가 차려주는 식탁>에서 2001년쯤 밥을 먹었었다. 대학 졸업하고 처음 입사한 직장에서 '신입사원 환영회'를 그곳에서 했다. 가게 분위기며 그릇들, 수건, 또 나오는 음식에 감탄감탄하며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세상에 이렇게 멋진 음식점이 있다며, 첫월급 타서 동생 데려가 점심밥을 사주기도 했던 곳. 아주 행복했던 한 시절이 묻어 있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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