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암안과 김선태 목사, 막사이사이상 수상 
           평생 맹인들 섬긴 이유로...상금 전액은 아이센터 건립에 쾌척 
   
   실로암안과병원 김선태 병원장(66세)이 2007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했다. 막사이사이 재단이사회는 어제(31일) “시각장애인을 위해 그간 김 목사가 펼쳐온 사회봉사 활동 공로”를 선정 사유라고 밝혔다. 

   당시 10살이던 한국전쟁 당시 장난으로 불발탄을 만졌다가 실명을 당한 김 목사는 이후 정상인들이 공부하는 숭실중, 고, 대학을 졸업한 뒤 한국맹인연합교회 담임목사를 거쳐, 장신대 신대원과 미국 맥코믹 신대원에서 목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 과정에서도 1989년 한빛맹학교 이사 등 줄곧 맹인들을 위한 봉사의 삶을 살아왔다.
 
   특히 1986년부터 안과 전문 병원인 실로암안과병원 병원장을 맡아 실명 예방과 개안수술에 선구적 역할을 감당해 왔다. 지금까지 실로암안과병원을 통해 새롭게 빛을 찾은 사람들은 2만7천6백여 명에 이른다. 1년에 약 40주간은 병원이 없는 농어촌 오지에 가서 사랑의 무료안과 진료를 실시해 오고 있다. 
 
   김 목사는 수상 소감을 묻는 질문에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도와주신 분들과 실명 예방과 개안수술을 위해 도와주신 교회들에게 주신 상”이라며 “제가 대표로 받은 것이지 결코 제 개인의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 
 
   김 목사는 수상 상금 전액인 5만 달러를 실로암 아이센터 건축을 위해 내놓기로 했다. 김 목사는 “한경직 목사님께서 템플턴상을 수상하시면서 100만 달러를 군선교를 위해 바치셨다”며 “한 목사님의 발자취가 너무 아름다워서 저도 한 목사님처럼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나의 삶을 바치고 싶다”며 이 같은 뜻을 피력했다.
  
   실로암 아이센터는 지하 4층, 지상 9층 등 총 2,400평의 안과전문병원으로서 병원 공사비에만 총 120억 원의 예산이 소요될 전망이다. 김 목사는 “실로암 아이센터가 건립되면 환자의 육신의 치료뿐만 아니라 영적인 치료, 마음의 치료까지 받을 수 있는 전인치료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밝히고 “국내뿐만 아니라 아시아 후진국에 있는 맹인들을 위한 개안수술과 실명예방에 선구자적 역할을 감당하고 싶다”고 말했다.
 
   막사이사이상은 록펠러 재단으로부터 기부받은 50만 달러로 막사이사이 재단을 설립, 해마다 공무원, 국제협조, 지역사회, 언론문화 등 5개 부문에 걸쳐 수상자를 선정해 왔다. 올해의 수상자로는 김 목사 외에도 필리핀의 독재자였던 마르코스 전 대통령에 대항했던 조비토 살롱가 변호사(87세) 등 7명이다. 
 
   지금까지 한국인 막사이사이상 수상자로는 장준하(1962), 김활란(1963), 김용기(1966), 이태영(1975), 장기려(1979), 엄대섭(1980), 제정구․정일우(1986), 김임순(1989), 오웅진 신부(1996), 법륜 스님(2002), 시민운동가 윤혜란(2005), 박원순 변호사(2006) 등이다. (2007. 8. 1. 뉴스파워 김성원 기자)
 
  
                     거지에서 병원장까지…‘남자 헬렌 켈러
                막사이사이상 받는 김선태 목사의 인생 드라마   


 


    “헬렌 켈러처럼 살고 싶었죠. 앞 못 보는 이들이 어둠을 헤쳐가게 도와주는 징검다리가 되고 싶었어요.”

   ‘아시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막사이사이상 공공봉사 부문 올해 수상자로 7월 31일 선정된 김선태(66․실로암안과병원장) 목사의 소망이다. 8월 1일 수상 소식을 접한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상금이 5만 달러(약 4500만 원)라고 합니다. 모두 시각장애인 의료시설인 실로암 아이센터 건립에 쓸 생각입니다.”

   김 목사는 시각장애인을 위해 평생을 바쳐왔고, 그 자신이 시각장애인이기도 하다. 이런 그에겐 각별한 별칭이 따라다닌다. ‘남자 헬렌 켈러’라는 별명이다. 절망에 절망을 헤쳐온 그의 삶 자체가 하나의 ‘숨 쉬는 드라마’처럼 느껴지면서 헬렌 켈러를 연상시키는 측면이 많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때였다. 미처 피난을 못간 김 목사는 동네 친구들과 함께 뚝섬에서 놀고 있었다. 그런데 거기서 폭탄이 터졌다. 함께 놀던 8명 중 7명이 즉사했다. 김 목사만 살아남았으나 눈에 파편을 맞아 시력을 잃고 말았다. 열 살 때였다. “당시의 절망감은 말로 다할 수 없어요. 생명이 끊어진 줄 알았죠.” 얼마 후 폭격에 맞아 부모님마저 세상을 떴다.

   “친척집을 돌다가 구박을 엄청 받았죠. 결국 친척집을 나와서 거지가 됐어요. 구걸을 하며 목숨을 이어갔죠.” 
   엄동설한에 밖에서 잠을 자다 한쪽 다리가 동상에 걸려 썩었다고 한다. 앞을 못 보니 상한 음식을 얻어 먹고 식중독에 걸려 죽을 뻔도 했다. 
   “한번은 옻나무를 가득 쌓은 남의 집 창고에서 잠을 자다가 온몸에 옻이 올랐어요. 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갔죠.” 

   그때 평생의 은인이 된 한 할머니가 그를 집으로 데려가 간호를 해줬다. 크리스천이었던 할머니의 도움으로 살아날 수 있었고 성직자의 삶을 꿈꾸게 된다. 
   “다 낫고 나서 할머니가 그러시대요. ‘나는 돈은 없지만 일평생 너를 위해 기도하겠다. 대신 너는 커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다오.’ 저는 그 꿈을 버릴 수가 없었어요.” 

   고아원에서 살면서도 그는 학교를 빼먹지 않았고 성적도 우수했다고 한다. “점자로 공부했죠. 반 친구들이 8시간 잘 때 저는 5시간만 잤어요. 밥 먹는 시간이 아까워 빵과 물로 배를 채우며 공부했죠.” 그렇게 고등학교를 마치고 난 당시 그는 박사 학위 3개를 따는 꿈을 꾸었고 그 꿈을 이뤄간다. 헬렌 켈러도 박사 학위가 3개였다. “헬렌 켈러처럼 가난하고 앞 못 보는 이들을 돕고 싶었어요. 그런데 박사 학위가 있어야 제게 현실적인 힘이 생길 것 같았죠.”

   그러나 5․16 군사혁명이 터지고 대학갈 길이 막히고 말았다. “군사 정부가 새로 손질한 문교 정책이 장벽이 되었죠. 대학에 가려면 국가고시를 봐야 했어요. 그런데 당시에는 앞 못 보는 사람도 국가고시를 볼 수 있는 길이 없었죠.” 

   그는 문교부를 찾아가 매달렸다. 그러나 번번이 거절당했다. “서른 두 번이나 찾아갔지만 문전박대를 당했죠. 결심을 했죠. 훗날에도 공부하고픈 시각장애인을 위해 내 목숨을 바치자고 말이죠.” 그는 무작정 문교부 장학과로 쳐들어갔다. 그리고 작대기를 들고 휘둘렀다. 

   “마침 신문기자들이 와있더군요. 앞을 못 보는 제가 그들의 눈길을 끌었죠. 결국 기자들이 장관실로 데려가더군요.” 
   문교부 장관은 그에게 국가고시를 볼 수 있는 특전을 주었고, 그는 시험을 거쳐 숭실대에 입학했다. 

   이후 장신대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을 전공했고, 미국 매코믹대에서 목회학 박사 학위를 땄다. 훗날 명예 철학 박사학위와 명예 신학 박사 학위도 받았다. 헬렌 켈러 이후 처음으로 세 개의 박사학위를 가진 시각장애인이 된 것이다. 

   공부를 마친 그는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삶을 살았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교회를 세우고, 점자 성경과 점자 찬송가를 소개했다. 또 앞을 못 보는 젊은이 1000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했다. 1986년에는 재계의 지원을 받아 서울 등촌동에 실로암안과병원을 설립했으며 지금까지 이 병원에서 개안수술을 받은 이가 2만7000명이 넘는다. 또 실명 위기에 처한 35만 명에게 무료 안과 진료를 실시했다. 최근에는 46인승 리무진 버스에 안과 시설을 갖추고 돈이 없어 진료를 못 받는 시각장애인들을 찾아다니고 있다. 

   김 목사에게 가슴에 담아둔 성경 구절을 물었다. 그는 ‘고린도 전서 15장10절’을 꺼냈다.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막사이사이상
1957년 비행기 사고로 죽은 필리핀 전 대통령 R.막사이사이를 추모하기 위해 만들었다. ‘아시아의 노벨상’으로도 불린다. 공공사업, 국제협조 증진, 지역사회 지도, 정부 공무원, 언론문화 등 5개 부문에 걸쳐 매년 수여한다. 한국인으로는 1962년 언론인 장준하, 63년 김활란 전 이대총장을 비롯해 오웅진 신부(96년), 법륜스님(2002년), 시민운동가 윤혜란(2005년), 아름다운재단 이사장 박원순(2006년) 등이 받았다.

2007. 8. 2. 중앙일보 / 백성호 기자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2812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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