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우리땅걷기 신정일 /http://cafe.daum.net/sankang

 

공부를 연애하듯

잘 논다. 잘 논다는 것은 스스로가 즐거울 때가 아니면 가능하지 않다. 어떠한 장애도, 어떠한 경계도 없는 상태에서만 잘 놀 수 있다. 잘 논다는 것은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고 몸과 마음이 혼연일체가 되어 모든 것으로 벗어날 수 있다. 그것이 잘 노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잘 노는 것이 가능할까? 그게 문제다. 그렇게 잘 놀 수 있다면 그것이 가능하다면, 다른 모든 것을 노는 것처럼 할 수 있거나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되어 있지 않다. 잘 노는 것처럼은커녕 지겨움으로, 의무감으로, 하기 때문에 아무리 시계를 보아도 잘 가지 않는 시간, 죽음보다 더 싫을 만큼 만나기 싫은 사람, 하기 싫은 공부, 보기 싫은 시험, 쓰기 싫은 글 등 그러한 모든 것들을 의무감 또는 책임감과 먹고 살기 위하여, 할 수 밖에 없는, 그런 것들이 도처에 가득하다.

“시험을 보기 위한 공부라면 그건 틀림없이 지겨움과 힘겨움에 수반되는 고통을 이기는 싸움이 되게 마련이지요. 생계를 위해서 쓰는 글이나, 요구되는 ‘업적’을 채우기 위해 쓰는 글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모두다 ‘노동’의 일종이지요.
그러나 자신이 좋아서 하는 공부, 신나고 즐거워하는 연구는 심지어 하루의 대부분을 책과 씨름하는 경우에조차 이런 중력과 저항, 고통과 인내의 성분이 없습니다. 스스로 던져 놓은 문제를 들고 돌진하는 연구나 집필 또한 마찬가지지요. 자기가 좋아하는 것, 자기가 몰두해서 강의 하는 것은 지겨움과 고통을 전혀 수반하지 않습니다. 신나고 즐거운 ‘놀이’나 ‘게임’이 되지요. 중력을 받는 ‘지적 노동’이라면 당연히 전공, 실적, 이런 것과 관계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지만, 자유행동은 ‘전공’과는 상관없고, ’실적‘과도 무관하게 자기의 문제의식이 뻗치는 곳 어디로든 나아갈 수 있지요. 이런 점에서 중력을 받는 노동으로서의 공부와 자유행동으로서의 공부는 크게 다르지요. 한번 잘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은 공부를 노동으로 하고 있는지, 자유행동으로 하고 있는지. 이런 의미에서 “도구를 사용하는 게 노동”이 아니라, 반대로 도구가 노동을 통해 정의된다고 해야 합니다.“

이진경의 <노마디즘> 유목의 철학 중에 실린 글 중에 공부에 관한 것이다.

공부도 청소년기에 처음 시작하는 연애처럼 할 수 없을까? 만났다가 금방 헤어졌는데 또 보고 싶은 그런 열망, 한 줄 한 줄의 글이 전율처럼 다가오는 그런 책들을 읽는 기분, 그렇게 잘 놀았다고 생각하면서도 가슴 깊이 성취감이 쌓이는 그런 일들로 세상을 온통 채울 수는 없을까?

정해년 구월 초사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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