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바람의 화원 1
이정명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베토벤과 모차르트, 고흐와 고갱, 피카소와 마티스. 이들의 공통점이라면 한 시대를 풍미한 천재들이라는 것이다. 앞에선 말한 베토벤과 모차르트는 제자와 스승의 관계이다. 또, 고흐와 고갱은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고 한다. 이렇게 두 천재들은 서로에게 경쟁자이면서도 든든한 후원자였다. 이 책에 등장하는 두 천재 김홍도와 신윤복. 이 둘 역시도 스승과 제자 사이이면서, 경쟁자 혹은 서로의 그림을 아끼는 후원자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신윤복의 생애는 베일에 싸여 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최고의 화원인 그는 왜 역사에서 완벽하게 사라졌을까? 작가 이정명은 이러한 의문점을 역사와 예술에 자신의 상상력을 더해 멋지게 풀어냈다.
한 시대에 각기 다른 성격을 지닌 두 화원이 있었다. 도화서의 법도를 무시한 채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는 자가 있는가 하면, 도화서의 법도를 따르면서도 다른 이들과 타협 속에 그림을 그린 자가 있었다. 앞에서 말한 화원은 신윤복이고, 뒤에서 말한 화원은 김홍도이다. 그들의 그림을 보면 같은 화제임에도 각기 다른 매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림 한 점만 보더라도 그들은 가히 천재라 불릴만하다. 그들은 왜 같은 화제의 다른 그림들을 그렸을까? 이것 역시도 작가가 제시한 또 하나의 의문점이다.
그 시대의 왕인 정조는 10년 전 도화서에서 벌어진 의문의 참변을 밝히라는 명을 김홍도에게 내린다. 의문의 참변이라 함은 김홍도의 스승인 강수항의 죽음과 김홍도의 친구인 서징이 살해당한 것을 말한다. 이런 의문의 참변만을 본다면 두 천재화원이 탐정으로 둔갑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름다운 예술소설이자 생생한 풍속소설이라 말했던 바와는 너무나 다른 흐름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앞으로 풀어나갈 이야기의 작은 실마리일 뿐. 진정 이 책의 매력이란 김홍도와 신윤복의 천재성을 말해주는 그림들일 것이다.
화원 신윤복은 도화서의 법도에 어긋난 그림으로 인해 도화서를 나가게 된다. 그는 그림 가운데에 여인들을 배치하고, 여러 색들을 썼으며, 왕이 보는 앞에서 왕의 초상화를 찢는 무례한 행위를 범하게 된다. 그로 인해 도화서에서 내쳐지게 되지만, 그는 애초에 도화서의 법도에 얽매이는 그림은 원치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난 신윤복의 그림이 더 매혹적이었다.
앞에서 말한 작가의 의문점들은 여러 사건을 통해 풀어진다. 또한, 여러 그림들에 의해 풀어지기도 한다. 그들은 그림을 단지 눈으로 보고 즐기는 것이 아닌, 그 속에 스며든 작가의 내면을 보았다. 그 속에 숨어있는 진정한 의미를 통해 작가는 여러 의문점을 풀었고, 그것은 이 책에 재미를 더하는 요소가 되었다. 앞에서 말한 여러 가지 의문들을 너무 조급하게 풀려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붓의 흐름에 맡기듯 소설의 흐름에 맞춰 읽다보면 작가는 훌륭한 답을 줄 것이다.
지금부터 나는 하나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한 얼굴에 대한 아주 길고도 비밀스런 이야기를. 아마도 당신은 나의 이야기를 믿을 구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구든 이 이야기를 진실로 믿고 싶어질 것이다. 나의 이야기를 듣는다면, 설사 진실이 아닌 늙은 자의 노망이라 해도·······.-p.12
작가 이정명. 그는 대단하다. 이 책에 대해 얘기하는 데 꼭 필요한 사람들 손꼽으라면 신윤복과 김홍도.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 낸 이정명이다. 그는 전작인 뿌리 깊은 나무를 통해 팩션의 새 장을 열었다고 한다. 물론 나는 뿌리 깊은 나무를 읽어 보지 못 했음으로 팩션이 무엇인지는 잘 모른다. 팩션은 실존인물의 이야기에 작가의 상상력을 더한 것이라 하니, 이 책은 허구이다. 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정말 이 책을 진실로 믿게 된다. 그가 쓴 문장들은 하나하나 신비롭다. 그로 인해 점점 이 책에 빠져들고 이 책을 진실로 믿게 되었다. 마치 어릴 적 나에게 옛날이야기를 해주던 할머니처럼 그는 진정한 달변가이다.
이 책의 결말은 10년 전 벌어진 의문의 참변의 결말을 짓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난 후에는 이 책은 단순한 추리소설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 책은 역사소설이면서도 예술소설로서 그 역할을 다 하고 있다. 다른 추리소설보다 긴박감도 떨어지고, 엄청나게 두뇌싸움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중간 중간에 나온 김홍도와 신윤복의 그림의 효과는 엄청났다. 그들의 그림은 새로운 사건을 만들어 냈으며, 새로운 소설을 만들어 냈다. 단순한 사실이 아닌 엄청난 허구. 어쩌면 이것은 작가 혼자서만 만들어 낸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