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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여성과 남성 ㅣ 현대의 지성 39
조혜정 엮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3월
평점 :
한국의 상황을 정리해놓은 책은 없을까 목말라했었는데, 내가 몰랐을뿐 이미 80년대에 나와있었다는 것이 뒤늦게 읽었지만 반갑다.
서구에서 쓰여진 책들을 보며 뭔가 약간 핀트가 맞지 않는다 생각했던 점들이 나와있어 좋았다. 누군가 지금 쓴다 해도 이보다 더 잘 정리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조한혜정 선생님, 또 이 책에서 인용하고 있는 연구자들이 있어서 이후 세대 여성학자들이 양성될 수 있었구나 싶고 <또 하나의 문화> 를 일찍 알지 못한 것이 아쉽다. 전에 알았다 하더라도 나의 삶이 지금과 달랐을 지는 모르겠지만.
앞의 장들에는 공감이 많이 되었고 가정과 직장에서의 나 자신을 돌아보며 (80년대 혹은 90년대를 벗어나고 있지 못하더라) 더 노력하고 달라져야한다는 생각을 했다. 7장이 가장 좋았는데 그 이유는 페미니즘에 요구되는 역할에 대해 막연하게 느끼고 있었지만 여성이 남성과 평등한 지위를 갖는 것 이상으로 왜 나아가야 하는가,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해 이렇게 명료한 언어로 설명되어 있는 걸 읽은 게 처음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개정하며 손을 본, 그러니까 90년대에 쓰여진 부분인지도 모르겠지만 80년대에 쓰여졌든 90년대에 쓰여졌든 ’자신의 언어‘ 를 갖고 있고 자신이 말하는 바를 온전히 이해하고 확신을 갖고있는 사람의 목소리를 자국어로 읽었을 때 지금까지 어떤 책을 읽었을때 보다도 더 내가 ’확신한다‘ 고 느꼈다.
아무 것도 모를 때보다 뭔가 알아서 혼란스러운 때 읽은 것이 타이밍이 좋았던 것 같다. 앞으로도 계속 혼란스럽겠지만.
주변 집단이 핵심 집단보다 위기 체제를 바로잡아가는 데 더 큰 공헌을 할 잠재력을 갖는 것은 그들이 기존 체제를 비판적이고 총체적으로 볼 수 있는 위치에 서 있기 때문이다. 체제의 중심부에서 자신이 만들어낸 언어를 사용하여 살아온 사람들은 그 체제의 한계를 객관화시켜 보기 힘들다. 체제의 문제를 인정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들의 혁신적인 구상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기존 체제에 살아남기 위해서 핵심부와 주변부를 왕래하며 살아야 했던 주변인은 마치 현장에서 참여 관찰을 하는 문화인류학자처럼 두 개의 세계를 경험하고 비교해볼 기회를 가지며 이에 대해 성찰할 기회를 갖는다. 이로써 주변인은 기존 체제를 더욱 객관적이고 상대적으로 볼 눈을 갖게 되는 것이다. 주변인의 이러한 비판적이고 객관적일 수 있는 입장은 더 나아가 대안적 문화를 제시하는 창조적 에너지의 근원이 될 가능성이 높다. 창조란 기존의 상황을 넘어서는 작업으로 기존 체제에서 벗어나는 경험이 없이는 이루어지기 힘들기 때문이다. - P397
여성이 억압된 집단으로 존재한 경험이 긍정적인 힘이 되는 것은 여성이 자신의 억압 상태를 인지하고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경우에 한한다는 단서를 붙일 필요가 있다. 피억압자가 지배 조직에 의해 ‘발탁‘ 되었을 때 억압자 이상으로 지배 문화를 고수하고자 하는 가능성은 항상 있으며, 또 억압을 심하게 받고 있는 경우, 그는 더욱 화풀이로 자신의 밑에 있는 대상을 억압할 가능성이 있다. 이는 생존 전략이며 마치 노예가 노예를 부릴 때 더욱 잔인할 수 있는 것과 같은 논리이다. - P400
여성 해방 운동이 추구하는 것은 권력의 장악이 아니라 권력 그 자체를 해체하여 여성들의 체험에 맞는 형태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즉 과잉 확대되고 집중화된 권력 영역을 축소시키고 분산시켜 각자가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는 동시에 생명을 존중하는 공동체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 P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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