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어린이' 신화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 건지 아동이 억압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좀 새로운데, 여성의 조건과 비교해서 생각해보면 유사성이 있기는 한 것 같다. 아동기 자체의 조건들을 완전히 제거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그런다면 그들이 받는 억압 역시 제거될까? 그것이 반드시 인과관계에 있을까? 그렇다 하더라도 아동은 여전히 '도제' 일텐데.
억지웃음 짓기. 얼마전 유시민 씨의 <문과 남자의 과학공부> 오디오 매거진 (책 말고 오디오 매거진도 있었다니)에서 정희진 선생님이 계속 웃으며 이야기했다는 일화가 생각나면서... 그게 일종의 억지웃음이었을까?
<문과 남자의 과학공부> 사실 안 궁금한데, (사실 유시민을 싫어하진 않는다. 오히려 좋아했다.) 잘난척하는 문과 남자도 안 좋아하고 문과 남자가 과학에 대해 아는 척 하는 거 별로 안 듣고 싶은데 억지 웃음 이야기 때문에 궁금해졌다.
이런 게 노이즈 마케팅인가.. 쟝쟝님 나한테 왜 그래요.
여성 존중처럼 아동 ‘존중‘은 여전히 더 큰 사회의 일부였을 때인 16세기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다가, 명백하게 억압받는 집단을 형성하는 지금에는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아이들의 소외와 분리가 시작되었다. 아동중심적인 새로운 부르주아 가족은 끊임없는 감시를 수반했고, 초기의 모든 독립성은 없어졌다. - P118
아이들은 가까이서 감시되어야만 하며, 그들이 아프거나 건강할 때나 어디서건 혼자 남겨져서는 안된다. ... 이 지속적인 감시는 부드럽게 행해져야만 하며 아이들로 하여금 선생이 그들을 사랑한다고 생각하게 만들고 선생이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은 오직 그들 옆에 있는 것이 즐거워서라고 생각하게 만들도록 계산된 신뢰감으로 행해져야만 한다. 이것은 그들이 감시를 두려워하기보다는 좋아하는 것으로 만들 것이다. - P123
결론은 근대가족의 발달이란 크고 통합된 사회가 작고 자기 중심적인 단위로 붕괴됨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부부 단위 안에서 아이의 존재는 이제 중요해졌다. 왜냐하면 아이는 그 단위의 산물이고 그것이 유지되는 근거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새로운 가족 단위를 만들 준비가 될 때까지 심리적, 경제적, 그리고 감정적으로 가능한 한 오래 가족 단위에 묶어두기 위해서는 가정에 되도록 오래 머물게 하는 것이 바람직해졌다. 이 목적을 위해서 아동기의 시대가 창조되었다. - P127
아동기의 신화는 여성성의 신화와 더 잘 대응된다. 여성과 아이들은 모두 무성적이며, 따라서 남성보다 ‘더 순수하다‘고 여겨졌다. 그들의 열등한 지위는 정교화된 ‘숭배‘ 하에 나쁘게 은폐되어 있었다. - P129
여성들과 아이들에 대한 계급 억압은 ‘귀여운‘ 어법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공개적인 억압보다 투쟁하기가 더 어렵다. ... 남성들은 여성이나 아이가 ‘상냥하지‘ 않다는 이유로 비난받아야 한다고 느낀다. 여성, 아동, 흑인 또는 노동자가 투덜댄다는 것을 아는 것은 그들을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에, 피억압 집단도 그들의 억압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여야만 한다. 비록 속에서는 화가 솟구치더라도 미소를 띠며 억지웃음을 지어야 하는 것이다. 웃는다는 것은 아동과 여성에게는 발을 질질 끌며 걷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또한 희생자가 그의 억압을 묵인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 P131
아동의 의존성이 증가하고 과장되는 것과 더불어, 여성의 모성애로의 속박 역시 그 한계로까지 확장되었다. 여성과 아이들은 이제 형편없는 한 배에 탔다. 그들의 억압은 서로를 강화시키기 시작했다. 자녀 출산의 영광, ‘자연적‘ 여성의 창조성의 숭고함의 신화에다 이제는 아동기 자체의 영광과 자녀 양육의 ‘창조성‘에 관한 새로운 신화까지 첨가되었다. - P133
아동기 행복의 신화가 그렇게 널리 퍼지는 것은 그것이 아이들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때문이 아니라 어른들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때문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소외된 사람들의 문화에 있어서, 모든 사람들이 근심 걱정과 고된 일로부터 자유로운, 적어도 인생의 좋은 한때를 갖는다는 믿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을 노년기에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므로 이미 그것을 가졌어야만 한다.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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