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마음속에서 그리는, 우리에게 꼭 들어맞는 친구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본성이 요구한다고 느끼는 신적인 속성을 다 갖추고 있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우리는 일련의 집단과 교제하며 이 집단 전체에 친구라는 이름을 부여한 다음 친구라는 단일한 임무를 위해서 이 집단을 이리저리 조합하여 이용한다. 이 집단 밖에서 우리는 한 명씩 친구를 사귈 수도 있다. 우리는 그런 개별적인 친구들도 모두 사랑하지만 집단의 친구 쪽을 더 많이 사랑할 수밖에 없다.
어떤 종류의 친구라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자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그들의 영향을 받는다.
우리 중 누가 사랑하는 이들의 인정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말하고 행동하는가? 다른 사람의 동의는 일종의 두 번째 양심이 아닌가? … 우리는 동료의 도움을 받아 우리 자신을 지지한다. 우리는 비난을 통해 우리의 양심을 일깨워줄 수 있는 이들로 주위를 채운다. … 비난받는 일은 약점이 아니다. 우리 자신이 나머지 세계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생각하면서 무언가를 판단할 때 외부의 도움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거만한 것 이상이다.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의지하도록 태어났고 우리의 행복은 다른 사람의 손에 쥐어져 있다. 우리라는 인물의 형태는 주위 사람들에 의해 주조되며, 색을 부여된다. 우리의 감정이 부모의 영향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서머빌을 칭찬하기 위해 쓴 시지만 여기에서 휴얼은 그 시대에 만연한 고정 관념을 눈감아준다. "파랗다"는 것은 "파란 양말bluestocking"에서 따온 표현으로, 당시 지적인 여성, 정신의 삶을 누리기 위해 여성성과 가정을 희생했다고 여겨지는 여성을 경멸적으로 일컫는 말이었다. 비록 메리 서머빌이 그런 여자가 아니라고 하기는 했지만 그 뒤에는 재능 있는 여성 대부분이 그렇다는 암시가 숨겨져 있다.
얄궂게도 "파란 양말"이라는 용어는 여자가 아니라 남자가 벌인 괴짜 행각 때문에 처음 만들어졌다.
마거릿 풀러가 보스턴에서 "대화" 모임을 열기 한 세기 전, 아일랜드의 지식인인 엘리자베스 버시Elizabeth Vesey와 영국의 사회개혁가인 엘리자베스 몬터규Elizabeth Montague는 힘을 합쳐 선구적인 사교 모임을 열기로 했다. 여자들을 불러 모아 문학과 정치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이었다. 가끔 남자들이 이 모임에 참석하기도 했다. 언젠가 이 모임에 멋쟁이 식물학자인 벤저민 스틸링플릿Benjamin Stillingfleet이 지나치게 눈에 띄는 파란 털양말을 신고 나타났다. 모임의 여자들은 그의 옷차림에서 배움에 대한 진정한 열정이 아니라 허영에 빠져 지적인 척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발견했다. 모임에 참석한 여성들은 대화에 열중한 나머지 유행에는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아마도 언어가 권력 구조를 반영하기 때문일 텐데, "파란 양말"이라는 말은 그 모임에 참석하는 여성들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허영심이 하나도 없는 여자가 있을까요? 남자는 있습니까? 단지 이런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신사분들 사이에서는 이 허영심이라는 필수품이 흔히 야심으로 포장되기 마련이지요."
서머빌의 <물리적 과학의 관계에 대해서>가 발표되고 몇 달 후에 영국의 저명한 학자이자 한때 뉴턴이 연구원으로 몸 담았던 트리니티대학의 학장인 윌리엄 휴얼William Whewell은 이 논문을 칭찬하는 말로 가득한 비평을 썼다. 휴얼은 서머빌의 라플라스 번역본을 공부하는 수업을 트리니티대학의 고등수학 과정에서 이수해야 할 필수 과목으로 만드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이 비평에서 소머빌을 가리키기 위해 "과학자scientist"라는 말을 처음으로 고안해냈다. 그 당시 흔하게 사용된 "과학의 남자man of science"라는 표현은 당연히 여자에게 적용할 수는 없었고, 또한 휴얼이 여성의 정신에만 존재하는 "특유의 계몽적인 빛"이라 생각한 것에도 적용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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