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인들이 유라시아를 정복하고 통치했던 13-14세기, 중국과 동아시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元朝’ 혹은 ‘元代’라는 용어의 이면에는 당시 중국을 통치했던 몽골인의 국가가 漢ㆍ唐ㆍ宋의 뒤를 이어 元이라는 왕조를 세우고 경영했다는 역사적 인식이 깔려 있다. 다시말해 원조가 중국역사의 한 단대를 구성하며 그 시기에 다민족이 통일된 국가체제 안에 연합되었다고 파악하여, 결국 중국 변방의 다양한 민족이 현재의 중국다민족국가 형태로 통합되어 가는 일관된 역사적 흐름이라는 명제를 증명해내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몽골 초원에서 시작해서 유라시아 대부분의 영역을 장악했던 몽골제국의 역사를 중국이라는 일개 국가의 민족사의 한 부분으로 전락시키는 것이 된다.(이용규)
그러나 당시 몽골인들은 자기네 나라를 Yeke Mongɣol Ulus 즉 ‘대몽골 울루스’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쿠빌라이가 1260년 자신의 근거지를 내몽골의 開平府로 옮기고 1271년 大元이라는 국호를 반포한 뒤에는 정말로 ‘대몽골 울루스’가 ‘元朝’로 바뀌어버렸다고 생각했을까.
근자에 들어와 이러한 입장에 대해서 강력한 비판들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1980년대 이후 몽골제국사 연구의 새로운 경향으로서 여러 ‘칸국(khanate)’들에 대한 개별적인 연구를 지양하고 ‘제국(empire)’을 그 전체의 관점에서 종합적으로 이해하려는 움직 임이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총체적 접근(a holistic approach)’의 중요성을 강조한 토마스 올슨(Thomas T. Allsen)의 선구적인 연구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올슨은《Culture and Conquest in Mongol Eurasia》에서 유목민에 의해 건설된 제국이 동서간의 교류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에 대해 보다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몽골제국의 경우를 통해 입증하고 있다. 그는 기존의 '전파론'이라든지 '변용론'을 비판하며 몽골제국의 '매개자' 개념을 제시한다. 즉 몽골제국은 유라시아 규모의 대제국을 건설함으로써 문명간 접촉과 교류의 기회를 열어주었고 다양한 인물과 물자와 지식이 확산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었으며, 그러한 공간 속에서 몽골지배층은 '매개자'의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몽골인들이 매개했던 문화적 요소들은 그들 특유의 관념과 관습에 의해 선별적으로 여과된 것이었기에 몽골제국기의 문화교류는 다른 시대의 교류와는 구별되는 독특한 '몽골적' 형태와 내용을 띄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일본에서도 스기야마 마사아끼(杉山正明)가 몽골국가를 ‘元朝’라고 불러왔던 왕조사적 관점을 비판하며 의미있는 학문적 성과들을 내어 놓았다. 그는 페르시아 역사서가 가지는 몽골 중심적 시각을 강조하면서 한문 사료가 가진 제한된 시각을 보정하는 데 각별한 노력을 기울여 몽골제국 전체를 아우르는 몽골 정권의 통합적 기제를 효과적으로 설명해내고 있다. 특히 그는 쿠빌라이가 권력을 장악한 뒤 국호를 ‘Dai-ön yeke mongɣol ulus’ 즉 ‘大元大몽골울루스’라고 선포했다고 보고, 그 ‘원조’라는 말 대신 ‘大元울루스’라는 새로운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중국의 몽골인 국가를 인식하는 두 가지 상이한 관점, 즉 중국의 왕조사적 입장에서 접근하는 전통적 관점과 몽골제국의 일부인 울루스로 파악하는 수정론적 관점, 이 양자 모두 진실의 일면을 반영하고 있다. 물론 어찌보면 이러한 주장이 兩是論적인 입장인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동안 지나치게 한족중심적인 관점으로 기울었던 경향에 대한 비판이 지나쳐 몽골중심적인 관점으로 흐르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도 있다. 13-14세기의 동아시아 세계에서는 위에서 지적한 두 가지 관점이 공존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역사적 진실에 더 가깝다고 할 것이다.
문제는 하나의 입장이 수많은 한문자료를 통해서 충분히 또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는 것에 비해, 또 다른 입장은 자료가 많지 않기 때문에 잘 드러나지 않고 포착되기 어렵다는 데에 있다.
여기에 주목되는 것이 가잔 칸(Ghazan Khan, 1295-1304)과 울제이투 칸(Öljeitü Khan,1304-16)의 치세에 이란('훌레구 울루스'의 일칸국)에서 재상을 역임했던 라시드 앗 딘이 남긴 불후의 거작《集史(Jāmi‘ al-Tavārīkh)》이다.
《집사》제1부가 칭기스 칸의 조상부터 시작해서 집필 당시의 군주인 가잔에 이르기까지의 몽골제국의 역사를 서술한 것이라면, 제2부는 신임 칸 울제이투의 칙명을 받아 편찬에 착수한 것으로서, 아랍ㆍ이란ㆍ투르크ㆍ유태인ㆍ프랑크ㆍ인도ㆍ중국 등 세계의 주요한 민족들의 역사를 집성한 것이다. 제3부는 세계 각지의 도시와 도로와 산천 등을 기록한 세계지리지이지만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다.《집사》를 가리켜 많은 학자들이 ‘최초의 세계사’라고 부르는 것도 제2부가 있기 때문이다.
사학사적인 측면에서 집사는 지구상 주요한 민족들의 역사를 포괄적으로 다룬 최초의 역사서라는 사실에 그 의의가 있으며, 사료적 가치는 제1부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거기엔 《몽골비사》나《원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정보들이 대량 포함되어 있을 뿐 아니라 동일한 사건의 서술에서도 상이한 내용이 보여 다른 사료들과의 비교를 통해 몽골 제국사를 보다 정확하게 재구성하는 데 필수적이다. 라시드 앗 딘은 문헌사료와 탐문자료 두 가지를 적절히 배합 활용하여 집사를 편찬했던 것이다.
이제 《집사》없이 몽골제국사는 말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중앙 유라시아에서 전개한 투르크 몽골계 유목민들의 역사도 재구성이 어려워진다. 그리고 이슬람사, 이란사도 중요한 사료의 원천을 잃어버리게 된다. 또한 《집사》는 몽골이 '세계'라는 것을 명확하게 의식하고 있던 틀림없는 증거도 된다.(스기야마 마사아끼)
요컨대《집사》에 대한 연구와 번역을 위한 노력은 보다 적극적으로 이슬람권 자료를 활용하고 그것을 한문 자료들과 결합시켜 몽골제국의 역사상을 재구성하려는 시도의 출발점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 김호동 역주본은 그간의 서구어로 된 번역본의 한계를 극복하고 더 정미한 번역을 완성했다는 점에서 한국 학계의 큰 개가로 꼽히고 있다.
김호동, 라시드 앗 딘(Rashīd al-Dīn, 1247-1318)의 『中國史』속에 나타난 ‘中國’ 認識, 동양사학연구 115, 2011.
김호동, 몽골제국사 연구와《집사》, 경북사학 25, 2002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