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성격이 사뭇 다른 울 엄마는, 하던 일을 그만두신 후 집에만 있는 무료한 시간을 참지 못해(나 같으면 무지 좋아 날뛸 텐데.. 얼씨구절씨구 지화자 좋네~ 하면서..) 교회나 사회복지시설 같은 곳에서 봉사활동 비스므리한 걸 하신다. 무료급식소에 가서 식사준비도 거들고, 어린이 보호소 후원활동도 하시고, 바자회 같은 것도 여시고 등등.. 근데 개중에는 내가 무지무지 싫어하는, 잰체하는 드센 아줌마들이 드글드글 모여 있는 'Y모' 단체에서의 일도 있다.
그 실체를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아줌마들의 극우보수집단인 듯한 그 단체에서 엄마는 '국제친선부'라는 부서에 소속되어 있다. 이름은 대따 멋져 보이지만 실상 하는 일을 보면 이 대사관 저 대사관 돌아다니면서 대사 부인 아줌마들이랑 밥 먹고 차 마시고 하하호호 수다 떨다가 사진 한 장 찍고 오는 게 대부분인 듯하다. 그런데 그 중에서 그나마 쬐금 괜찮아 보이는 일 하나는, 해마다 여름에 해외 입양아들을 초청해서 벌이는 행사다.
어렸을 때 해외로 입양되어 간 사람들 중에서 희망자들을 한국으로 초청해 보름 정도 기간 동안 여기저기 구경도 시켜주고 여행도 데려가고 한국 가정에서 민박도 하고 또 원한다면 친부모도 찾을 수 있게 해주고.. 뭐 그런 일들을 한다.
엄마가 주체가 되어 하는 그 일 덕분에 한동안 여름이 다가올 때마다 온 식구들이 긴장상태에 돌입하곤 했다. 일단 며칠이나마 안 되는 영어로 의사소통을 해야 한다는 점, 집의 일부분을 낯선 이들에게 내줘야 한다는 점, 별로 내키지 않는 관광가이드 흉내까지 내야 한다는 점 등이 솔직히 부담스러웠으니까.. 당시 우리집에 왔던 사람들은 대부분 유럽 쪽으로 입양을 갔던 사람들이었다. 나이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중반 정도의 여자들.. 나나 내 동생이랑 굉장히 닮은 얼굴의 그네들은 영어도 아닌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네덜란드어나 노르웨이어 등등)를 쓰고, 10대의 나이임에도 담배를 뻑뻑 피우고, 아주 야한 속옷을 입고 다니면서 생경함을 더해주었다.
그래도 낯을 익히느라 뻘쭘했던 하루이틀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서로 어색하게나마 농담도 주고받고, 야경을 보여준다는 핑계로 한밤중에 나들이도 나가고(우리 자매끼리라면 엄마가 절대 허락 안 해줄 일이었다), 평소 볼 수 없었던 양고기니 염소치즈니 하는 음식들도 식탁에 올라오고(물론 한국문화를 알려주자는 취지에서 한식을 주로 먹게 해줘야 하지만, 익숙지 않은 음식만 내내 먹으라고 강요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하면서 우리 모두가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시간 속에 들어선 듯 즐거워했었다.
그러다가 헤어질 때쯤에는 어설프게나마 든 정 때문에 아쉬움 속에 포옹하면서 한두 방울 눈물도 흘리고, 자주 보내오는 영어와 알 수 없는 외국어가 섞인 엽서를 해독하며 낑낑거리기도 하고, 차츰 소식이 뜸해지면 먼먼 그 땅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가끔 궁금해하기도 하고.. 특히 우리 가족에게 보내는 그 엽서는, 아는 이 하나 없는 이름뿐인 조국 한국 땅과 그네들을 연결시켜주는 유일한 것이었기에 참 절절한 느낌으로 읽혔던 기억이 있다. 동양인의 얼굴에 발음도 하기 힘든 낯선 이름을 가졌던 그녀들은 이 여름에는 무얼 하며 지내는지..
오늘도 엄마는 기억도 못할 어린 날에 떠났던 한국 땅을 다시 밟은 그들에게 '한국요리' 강습을 해주러 가셨다. 메뉴는 불고기와 잡채와 전유어 등등. 너무나 익숙한 요리지만 엄마는 그새 또 까먹은 영어 단어를 다시 외우느라 어제 새벽녘에야 잠이 드셨다. 지금쯤 잘하고 있는지, 버벅대느라 음식 태우는 건 아닌지 걱정된다. 부디 맛난 저녁 차려주고 오시기를.. 집에서 굶고 있을 큰 딸 걱정은 아예 하지 마시고.. 할 리도 없지만..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