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나에게 말했다. “너는 잊고 싶은 것을 정말 잘 잊어먹는 놀라운 재주가 있다”고. 실재로 나는 나에게 실연을 안겨준 19명의 여자들 중에 불과 7,8명 밖에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나마 이름과 학교, 얼굴을 제대로 연결할 수 있는 사람은 4명 정도이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19라는 숫자뿐이다. 이 숫자는 처절하지 않다. 적당히 낭만적이고 적당히 아름다운 추억의 파노라마만이 그 속에 뭉뚱그려져 있을 뿐이다.

나는 또한 대학시절 머리 싸매고 읽었던 자본론의 어느 공식 하나도, 정경비서설의 어느 문구하나도, 포이에르바하의 테제 중 단 하나도, 공선언의 그 놀라운 명문 중의 하나도 전혀 기억치 못한다. 더 솔직히 말해, 나는 맑스가 무엇을 증명했고 레닌이 그것을 어떻게 현실화시켰는지 이제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내가 그것들을 꽤나 열심히 고민했고 적어도 몇 년간은 그 세계에서 살았다는 추억의 덩어리 뿐이다.

나는 지나치게 현실과 환경의 지배를 받는 인간이다. 이건 현실주의자, 실용주의자라는 규정과는 차원이 틀린 이야기다. ‘주의’라는 것은 선택의 영역이지만 애초에 나는 현실의 다른 선택 대상인 과거나 미래에 대한 기억과 관념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카르페디엠”은 나에게 어쩔 수 없음이다.

어쨌든 나는 당장에 무의미한 것들은 거의 잊어먹는다. 그렇다고 기억할 것들을 기록하는 것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는 해마다 다이어리를 새로 사면서 지난 다이어리 주소록에 기록된 사람들의 절반은 늘 옮겨 적지 않았다. 무의미한 것들의 수명을 기록으로 연장시키는 것은 현실을 낭비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나는 살면서 크게 2번 정도 기억을 포맷했다. 아니 하고자 해서 한 것이 아니니 포맷되어졌다고 표현하는 것이 적당하겠다. 내 생활의 환경이 바뀌면서 그냥 그렇게 된 것이다. 첫번째 시절의 것들 중에 아직 기억되고 있는 것은 3명의 가족과 1명의 친구 밖에 아무것도 없다.

모든 망각은 자연스럽고 또 그래서 편안하다. 세상에는 억지로 망각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억지는 기억을 강화할 뿐이다. 나는 지금까지 늘 자연스럽게 변해오고 자연스럽게 적응해 왔다. 내 인생에는 단 한 번의 억지스러움도 없었다.

올드보이는 이런 내게 말한다. “기억해 내라. 네가 준 상처와 네 과거의 잘못을…” 도대체 왜? 기억해 내야 하는 것인가? 답은 뻔하다. 복수하기 위해서다. 유지태는 복수를 위해 스스로를 기억 속에 가두어 버렸고 최민식은 복수를 위해 기억을 파헤쳐 열 몇 권의 노트 기록을 남기고 5일간의 생지랄 끝에 결국 기억에 도달한다. (영화 똑바로 봐라. 알아내는 게 아니다. 미용실에 들어오는 여자 아이를 보고 기억해 내는 것이다.)

모든 복수는 기억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기억은 섬뜩하다. 이런 대사가 나온다. “고통은 상상력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는… 그러나 그 말은 틀렸다. 고통은 기억에서 온다. 생이빨이 뽑히는 고통은 상상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난 날, 젖니를 뽑던 유년의 고통이 증폭되어 오는 것이다.

그래서 기억의 끝은 참혹하다. 기억에 매달려 기억 속에서 살았던 유지태는 기억으로부터 해방되자마자 자살한다. 끝내 기억에 다다른 최민식은 다시 망각으로 돌아가기 위해 최면을 택한다. 기억은 엉킨 실타래와 같아서 절대 원하는 것만 끄집어 낼 수 없다. 하물며 사진과 같은 기록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기억과 기록의 끝에 있는 것! 그것은 죽거나 혹은 망각하기 위해 발악하거나 둘 중의 하나다. (그래서 사진 같은 건 절대 금물이다. 가족사진이라니… 죽고 싶어 환장한 짓이다.)

어쨌든 당연히도 최민식의 최면은 실패한다. 아까도 말했지만 망각은 절대 억지로 되지 않는다. 망각은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최고의 선물이다. 오로지 선택받은 유전자만이 망각의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며 망각의 편안함을 누릴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축복받은 존재다. 내가 유지태였다면 기억해 달라는 말을 남기고 합천댐에 빠져죽은 누이는 그냥 사춘기 시절의 아름답고 슬픈 레파토리일 뿐이다. 살아가며 여자 꼬실 때 분위기 조성용으로 몇 번 써먹다가 아마 곧 잊어먹었으리라… 내가 최민식이었다면 나는 주1회 VTR 상영과 김치찌개 배식을 위해 단식 투쟁을 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굶어 죽으면 죽는거고… 유지태가 5일 안에 답을 알아내면 자신이 죽어주겠다는 말을 했을 때, 나는 아마 "뭐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잘못했겠지 뭐..."라고 말하며 그 자리에서 곱게 자살해 줬을 것이다.

이것이 축복받은 자의 삶의 방식이며 이것이 기억에 매달린 자들에게 진정으로 승리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인간들이여! 망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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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찌리릿 > 꿈의 고등학교?

내가 자주 가는 헌책 동호회에서 퍼왔다. 한참을 킥킥대다.

 

꿈의 고등학교-_-a 교직원 명단

명예교장: 고 이오덕

교장: 리영희

부교장: 조정래

교무주임: 강준만

서무주임: 한완상

관리주임: 강정구

국어: 황석영

영어1: 백낙청, Walden Belo

영어2: Bruce Cummings, Selig Harrison

일어: 카라타니 코오진, 오오에 켄자부로오

독어: Juergen Habermas

불어: Jacques Derrida

문학: 김정란

정치: 최장집

경제: 김수행

서양철학: 송두율

동양철학: 신영복

미술: 진중권

국사: 박노자

학보 편집: 오연호

교지 편집: 김규항

문예 특활: 고종석

회화 특활: 김태권

음악 특활: 신중현

영화 특활: 박찬욱

연극 특활: 김민기

봉사 특활: 박원순

여기에 나를 비롯한 이런저런사람들의 추가의견이 실렸다. 대강 보자면...

1.(익명처리) 이런, 가장 중요한 양호 교사가 없군요..  

2.(역시 익명처리) 사서담당: 도정일, 스페인어: Garcia Marquez, 아랍어: 정수일, 종교(선택과목): 고 안병무, 이제민, 법정, 정수일, 만화 특활: 박재동  

3.(나) 물리 정재승, 화학 고종숙, 생물 최재천, 지구과학 조경철(이양반은 좀-_-;;)... 어떨까요?  

 당연히 저 명단에도 뭔가 아닌데 싶은 구석이 많다. 박재동 선생은 당연히 미술선생으로 복직시켜야 하고, 진중권씨는 미술보다는 선택과목 논리 선생이 맞지 않을까? 가끔 독어과목 하버마스도 거들어주고. 데리다만 불어선생 시키면 얘들이 못알아먹을꺼 뻔하니 김정란씨가 힘들어도 두과목 뛰면서 좀 거들어주고. 욕심 좀 더 부리면 이세욱씨가 수고 좀 해줬으면 한다. 동/서양 철학으로 구분되지 않고 윤리로 가르치는 판에 욕심을 좀 더 부려서 강유원 선생을 추가하는것도 나쁘지 않겠다. 영어에는 욕심 쫌 더 부려 자뻑족 안정효 선생과 겸손하고 부지런한 이윤기 선생도 추가시켰음 좋겠고. 국어 과목도 고종석 선생(난 다음 세상에 국어선생과 제자의 관계로 그를 만나고싶다. 왜냐고? 자유의 무늬를 읽어보면 안다)이 좀 거들어 주면서 장정일씨를 기용한다면 학생들의 폭발적인 지지를 누릴 게 틀림없다(유감스럽게도, 장정일씨 본인은 대구에 학교를 짓지 않는 한 절대로 교직원이 되지 않을 것이다. 단, 여학교를 설립해 매점아저씨로 기용한다면 그의 영입 성공률은 적지 않을 것이다). 정치/경제는 홍기빈씨가 은사님과 함께 한다면 훌륭하리라.

꿈이다. 꿈일 뿐이다. 우라질, 돈 먹는 하마인 사립고등학교를 시험쳐 들어간 내가 마주한 한심한 선생들을 생각하면 저소리만 나온다. 유도 특기자로 대학에 들어가 물리선생으로 전향한 인간(제물포와 물개가 당연히 그인간의 별명이었다. 제물포는 다들 아실거고, 물개란 물리 개XX), 이사장 빽으로 들어온 사회 부적응자(애들패다 관두고 끝내 어느 여학교로 전근간 이 인간은 제자 여고생과 동거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건너건너 전해주어 나와 내 친구들을 경악시켰다), 독일어 리트 가사를 못외운다는 이유로, 오르프의 카르미나 부라나를 시청각실에서 보고 듣다 잔다는 이유로 인간쓰레기라 우리를 불렀던 음악선생-지금은 카르미나 부라나를 좋아하긴 하지만-, 박정희 전기를 수업시간에 읽어주던 교련 선생, 그를 비롯한 "인간병기 3인방", 미적분 개념도 제대로 모르면서 무조건 외우라고 나를 윽박지른 수학선생, 모르면 외워라, 그럼 해결된다를 외치던 문학선생, 자신의 수업시간에 소설책-다른책도 아니고 조정래씨의 태백산맥 1권-을 교과서 밑에 넣고 읽었다고 그자리에서 태백산맥을 네동강내고 미친듯이 그 친구의 머리를 갈겨댔던, 자그만치 국어 선생, 패닉 2집의 '벌레'때문에 패닉 2집을 듣는 녀석은 워크맨까지 뺃어버린다 강변하던 교장인가 교감 선생... 평준화되어 뺑뺑이 돌려 간 학교도 아니고 시험쳐서 들어간 학교에서 이런 인간들을 선생이라 모셨으니 젠장. 저건 그야말로 꿈일 뿐이다.

 

정릉에서 manner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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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nerist 2004-01-06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큭. 여기서까지 이 글을 마주할 줄이야. 이런저런 서재 돌아다니면서 제 서재에 있던 글 발견하는것도 재미있네요. ㅋㅋ...맨 마지막 문단의 주인공이 키득거리며 끄적여봅니다.^_^o-

starla 2004-01-06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흐흐;;; 너무 재미있어서 퍼왔는데, 뭐라고 댓글을 달 말이 없더라구요;;;
너무 완벽한 교직원 목록이라 +_+ (어떤 분이 코멘트로 다신 다이내믹한 학교생활을 위한 교련선생 조갑제씨도 -_-;;;) 그리고 참, 여학교 장정일 매점 아저씨는 좀 두려워요 ㅠ.ㅠ

99 2004-01-06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도부 조유식 학생이 빠졌네요.(아! 이 학생은 참, 교직원이 아니시구나...)
교련선생님은 게바라씨도 잘 하실 듯...
양호선생님은 베쑨 선생 초빙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종교선생님이 교목을 겸임하시나요? 아니시면 문익환 선생님 추천....
국민윤리는 제가 가르쳐보겠습니다.
 
 전출처 : 루크스타 > 이도공간

사십이 넘도록 젊음을 유지한 것은 너무 빠른 죽음에 대한 현세에서의 보상이었던가 싶다.
지난 사랑에서 완전하게 벗어나지 못한 채 시작한 새로운 사랑은 공포가 된다.
이도공간... 하나처럼 보이지만 정신 세계에서만큼은 과거와 현실이 혼재하는 공간...
장국영에게도 잊어버리지 못할 과거의 추억이 있었을까?
이 영화를 통해 잊었던 과거가 되살아난 걸까?
그는 왜 죽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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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la 2003-12-31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이 11시니까, 회사에서 버스 3정거장 떨어진 종각에서는 벌써 잔뜩 모여든 사람들이 어깨를 스치며 새해의 카운트다운을 기다리고 있겠지. 그러고보니 올해 장국영이 죽었다. 매염방까지. 그 뿐인가, 미국의 이라크전으로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죽었다. 너무 절박하여 여차하면 자살폭탄을 터뜨리고 말 많은 사람들이 공포에 사로잡힌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이란의 소도시는 지진으로 초토화되었다. 어떻게 생각해도 즐겁다고는 할 수 없는 한 해였다.
 
 전출처 : Smila > Storybook Girl

Edmund Dulac(1882-1953), Storybook Girl

앗, 넌 책을 보고 있던 게 아니구나... 넌 책에서 뛰쳐 나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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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la 2003-12-31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셀린 인형처럼 뽀얀 우유색 피부에 팔을 척 꼬고, 어깃장부리듯 다리를 쭉 펴고 앉은 저 소녀!
 

해를 넘기지 말아야지, 라고 마음먹었던 번역은 여전히 답보상태. 올해 해치워서 선물로 줄 수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후회스럽다. 1월엔 꼭 하도록 할께요. zooey님.

도서정가제, CSI 과학수사대, 앙코르 와트, <거의 모든 것의 역사>, 기타 등등 2003년의 것들 모두 안녕~ 새 학년엔... 이 아니라 내년엔 더 멋있어질거야. 아, 새해에는 꼭 <따끈따끈 베이커리 8>과 <절대미각 식탐정 2>를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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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ooey 2004-01-01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을께요. 고맙습니다. ^^ (언제가 되든 기다리고 있을께요. )
우리 모두 즐거운 새해가 되어야 할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