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를 다녀와서

  

언젠가 꼭 찾아뵙겠다고 마음으로만 약속했던 내 자신과의 약속이 항상 부채로 남아있었다. 왜, 10년이 지난 오늘까지 나는 광주를 단 한번도 찾아가질 않았을까. 아니, 찾아갈 수가 없었을까. 먹고 살기가 바빠 시간이 없다는 핑계라면 그것은 정말 우스운 변명일 것이다. 그렇다면 1980년 5월의 광주는 나와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아니, 그렇지도 않다. 5월의 광주는 내 가슴에 붉은 핏자욱처럼 언제나 지워지지 않고 선명하다.

살아간다는 것은 타성에 길들여지는 과정이다. 어떤 혁명적인 사건이나 운명의 잔인한 고통을 겪어도 시간이 지나면 망각하고 그때의 감정을 다시 일으키지 못하는 약점을 인간은 가지고 있다. 순수한 정열과 진지한 고통을 간직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인간의 삶이 가치있고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과거의 사건들을 인간의 삶에 투영시켜 ‘역사’로 만들어 가는 과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뜻에서 이번 광주행은 피상적이고 관념적이었던 역사에 피와 열기가 흐르게 하는 행위였다.

「언협」에서 주관한 이번 행사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다. 주로 언론관계 사람들이었는데, 나는 좀 어울리지 않는 자리였지만 뜻있는 목적 하나만 가지고 참여를 했다. 24일 일요일 아침에 서울을 출발한 버스는 모두 두 대였는데 서울을 벗어나자마자 한 대가 고장나는 바람에 서울로 올라올 때까지 고생을 했다.

광주에 도착한 우리는 약식 집회를 갖고 열사들에 대한 추모의식을 치른 뒤 참배를 했다. 줄지어 늘어선 무덤 앞에는 가족들이 마련한 사진과 약력이 놓여있고 이름없이 죽어간 열사들의 무덤에는 ‘무명열사지묘’라고 씌여있었다. 그나마 가족이 있는 분들은 죽어서나마 가족들의 보살핌을 받지만 연고도 없고 이름도 없이 죽어간 그 많은 열사들은 누가 기억을 해줄까. 무덤 앞에 놓인 열사들의 이름과 약력을 보면서 나는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 내 나이와 같은 열사들의 무덤이 몇 개 보였기 때문이며 그들의 삶이 나의 삶에 비해 어떤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벌써 12년전의 일이었다. 나는 그때 스무 살의 청년으로 서울에서 새로운 배움에 깊은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내 생활은 가난과 피곤으로 이어졌지만 배움이라는 단 하나의 희망이 나를 지탱하고 있었으며 세상은 여전히 안개 속에 있었다.

바로 그때, 광주의 5월은 시작되었다. 군부의 쿠데타와 민중의 항거가 계속되던 바로 그 시기, 역사가 꿈틀거리고 인간의 삶이 격동하는 바로 그 시기에 나는 서울에서 새벽까지 불을 밝히며 교과서를 들여다 보고 있었고, 광주에서는 나와 같은 동갑내기들이 손에 총을 잡았다. 한반도의 땅 위에서 이렇게 서로 다른 길을 가야만 했던 사건이 벌어지고 있음을 나는 절실하게 깨닫지 못했다.

그들이 총을 잡을 수 밖에 없었던 그 처절한 상황을 나는 몇 년이 지난 다음에야 사진과 비디오를 통해 볼 수 있었고 시민군의 증언과 기록들로 확인할 수 있었다. 한 하늘 밑에서 이렇게 피의 살육이 벌어지는 동안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내가 철이 없었다면 광주에 있었던 나의 동갑내기들은 무슨 이유로 총을 들었고 장열하게 전사를 했을까. 그들도 철이 없었을까.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동족을 학살하는 군부의 악랄함과 잔인함에 젊은 피가 끓어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들었다. 바로 역사의 현장에 있었기에 그들은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고 젊은 생명을 아까와하지 않고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고자 자신의 피를 뿌렸다.

 

민청진: 1961.6.5일 생 - 1980.5.24일 전사

아아, 어쩌면 이럴 수가 있을까. 나와 생일이 하루 차이인 바로 이 벗은 도청앞 전투에서 계엄군의 총에 맞아 장열하게 전사했다. 스무 살의 피끓는 나이. 부모님같은 노인들이 계엄군의 곤봉에 머리가 깨지고 동생같은 여학생이 계엄군의 칼날에 온 몸이 찢기는 처참한 광경을 보면서 피가 끓어오르지 않는다면 그는 이미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분연히 총을 들지 않는다면, 총이 없다면 맨 주먹으로라도 내 가족을 학살하는 악마와 같은 군대에 맞서 싸우지 않는다면 그는 이미 죽어버린 생명이다. 여기 동갑내기 민청진은 내가 서울에서 군부와 언론의 왜곡된 사실에 귀를 기울이는 동안 외롭게 죽어갔던 것이다. 다른 많은 열사들의 무덤을 보면서 가슴이 뜨거워 왔지만 정작 동갑내기들의 죽음 앞에서는 눈물이 솟구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내 친구들, 얼굴도 모르고 말 한마디 나눈 적이 없지만 그들은 나의 벗들이었다. 몇 해전에 죽마고우 친구를 사고로 잃었을 때, 그 슬픔과 절망은 내 인생을 결정하고 말았다. 그런 마음으로 여기 망월동에 누워있는 벗들을 보면서 이렇게 살아있는 내가 부끄럽고 부끄러웠다.

 

김병연: 1961.3.7일 생 - 1980.5.22일 전사

김종연: 1961.10.11일 생 - 1980.5.22일 전사

김형영: 1961.7.17일 생 - 1980.11.7일 사망

백대환: 1961.5.23일 생 - 1980.5.22일 전사

 

지금 살아있다면 가정을 꾸리고 어쩌면 예쁜 딸과 아들을 앞세워 일요일이면 공원에 나가서 가족사진이라도 찍었을 그들이 지금은 차가운 무덤에 누워있다. 한창 피어오르는 젊은 나이, 스무 살의 초 여름에.

 

역사의 현장에 서 있다는 것은 외로운 일이다. 시간이 지났지만 바로 그 주인공들 앞에서 나는 외롭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것은 두렵지 않을 것이다. 역사가 그들을 의롭게 하고 이땅의 하늘과 땅이 그들을 기억할 것이다. 두려운 것은 내가 그들을 잊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서,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그들만이 내게 일러줄 수 있기 때문이다. 나와 같은 해에 태어나서 역사의 현장에서 부릅뜬 눈으로 죽어간 그들을 기억하며 나는 흐르는 눈물을 감추지 않았다. 그리고 다짐했다.

이 땅에 다시 광주의 오월이 일어난다면 나는 바로 그 현장에 있으리라고, 내 묘비에 짧은 시간이 새겨진다 해도 두려움없이 깃발을 들고 그 자리에 서있겠노라고 초라하지만 당당한 무덤앞에서 나의 동갑내기 벗들에게 다짐했다. 오월의 싱그러운 바람과 꽃 향기, 그리고 제단 위에 받친 향내가 망월동 전사들의 무덤 위에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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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비엩남에 공식 사과해야 한다.  
        - 한국과 비엩남과의 수교를 보면서


  오늘(1992년 12월 22일) 한국과 비엩남 사이에 국교가 정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동안 미국의 경제재제 조치로 많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비엩남으로서는 어떻게하든 현재의 경제상태에서 벗어나 힘겨운 민중의 생활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이데올로기보다는 현실적인 안목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현재 전세계적으로 냉전이 사라지고 경제문제가 더 크게 각 국가의 경쟁이유가 되고 있는만큼 국가의 부를 축적하지 않고는 세계사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절박한 심정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과 비엩남과의 국교수립은 참으로 환영할만한 일이다. 지난 시기 60년대 말과 70년대 초까지 이어지는 두 나라 사이의 적대적인 감정을 모두 없애고 미래의 보다 발전적인 관계를 이어가는데 있어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는 이번 수교에 반대를 하는 사람은 없을듯하다. 
  그러나 한국과 비엩남과의 수교를 하는데 있어 한국은 비엩남 정부에 정식으로 사과를 해야할 일이 남아있다. 사실, 수교를 하기 전에 이러한 일들은 모두 합의가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느쪽에서도 이 문제를 정식으로 거론한 적은 없는듯 하다. 한국쪽으로 볼 때는 매우 거북하고 씁쓸한 기억이고 비엩남으로서는 그들의 너그러움과 함께 현실적인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정치적 발언을 자제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하더라도 한국쪽에서는 먼저 비엩남 정부에게 공식적인 사과를 했어야 했다.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당한 식민지 시대의 고통과 아픔을 결코 잊지 않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1965년 일본과 굴욕적인 수교를 할 때에도 보상문제가 거론되었으며 최근에 일본왕의 ‘유감’발언이 있을 정도로 우리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감정을 삭히고 있지 않다. 그리고 이러한 우리의 감정은 조금도 나쁘지 않다고 여겨진다. 우리가 제국주의이며 침략자인 일본을 향해 목소리를 높여 비난과 보상과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그들이 역사에서 씻을 수 없는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임을 잘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역사에 씻을 수 없는 범죄를 비엩남에서 저지르고 말았다. 
  어떤 사람은 나의 이런 말에 반발을 할지도 모른다. 그 전쟁은 미국을 도와서 싸운 것이고 공산주의에 맞서 싸운 ‘성전’이었다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틀렸다.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매카시의 화신이거나 정신병자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 비엩남이 통일되기 전에 북비엩남에서 군대를 지휘하던 한 장군은 한국의 비엩남 참전을 가리켜 아주 잘못된 일이라고 지적했다. 그가 말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북비엩남이 남비엩남과 전쟁을 한 것은 외세가 우리의 땅을 침략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적은 프랑스와 일본, 미국과 같은 외국 침략세력이었습니다. 자신의 민족과 국가를 지키기 위해 전쟁을 했을 뿐입니다. 그것은, 한국이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독립투쟁을 한 것과 똑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비엩남에 가서 한 일은 무엇인가. 미국은 비엩남을 침략한 침략자 제국주의자였고 우리는 그 제국주의자들을 도운 그야말로 ‘괴뢰’였던 것이다. 당시의 박정희 군부독재는 미국의 입장을 충실히 대변하고 있었으며 또한 비엩남에 진출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매우 큰 이익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의 젊은이들을 그 열대의 낯선 땅에 보내 외화를 벌었으며 그 돈으로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했다. 
  당시에 진보적인 잡지였던 월간 사상계의 사장이었던 장준하씨는 박정희 군사독재의 월남파병 승인을 반대하며 조목조목 따져 사설로 실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옳은 소리도 냉전 이데올로기에 묻혀버리고 이 땅의 젊은이들은 폭염이 쏟아지는 낯선 땅에서 무려 4천 6백명 이상이나 죽어갔던 것이다. 그 피의 대가로 한국은 경제건설을 할 수 있었다.  
  우리가 이제 어느정도 먹고 살만해졌다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우리 사회가 조금은 민주화가 되었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이제 잊혀지기를 강요 당했던 역사, 바로 비엩남의 침략사에 대한 재점검이 있어야 할 것이며 우리가 비엩남 민중과 정부에 정식으로 사과해야 함을 당연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만이 우리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길이며 우리의 지난 부끄러움을 거울삼아 다시는 그런 역사적 범죄를 일으키지 않는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아직도 이 땅에는 비엩남에서 받은 상처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어떤 의미였는지 모른다. 아니, 잘못 이해하고 있으며 냉전이데올로기에 의해 쇄뇌당해 있다. 마치 자신에게 반대하는 것은 모두 ‘빨갱이’라고 몰아부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처럼, 비엩남에서의 그들의 행위를 ‘반공’의 일선에서 ‘자유 민주주의’를 지켰다는 자부심으로 남아있다면 그런 사람은 몸보다 더 큰 정신적 상처를 입은 것이다. 
  비엩남 민족해방전쟁은 우리의 남북전쟁과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만일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면 그것은 가장 불행한 결과를 만들어내고 말 것이다. 그 어느 누구도 한 나라의 민중들이 선택하는 이데올로기를 강요할 수 없다. 비엩남 민중들에게는 ‘호치민’이라는 참으로 존경할만한 인물이 있었으며 조국과 민족을 자신의 몸보다 더 사랑하는 수 많은 젊은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이른바 ‘베트콩’으로, 또는 ‘민족해방전선’의 투사로 전선에서, 생활 속에서 목숨을 바치며 투쟁했고 비엩남을 마침내 통일시켰다. 
  미국의 막강한 화력과 물질의 도움으로 정권을 버텨온 남베트남의 군부독재는 그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부패와 타락의 속성으로 몰락해버리고 말았지만 가진 것은 없어도 순수한 열정과 불타는 조국애로 몸을 던진 북베트남은 승리한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북베트남의 젊은이들은 무려 90만명이 죽었으며 150만명이 부상을 당했다. 그에 비해 남베트남 젊은이들은 20만명이 죽었고, 90만명이 부상을 당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이름없는 민중들이 그 사이에서 죽어갔다. 이것이 바로 비엩남 민족해방 전쟁이다. 
  미국을 대표로 하는 수많은 외국의 연합군들이 비엩남에서 싸웠으며 명분없는 전쟁으로 괴로워했다. 미국에서도 ‘가장 극악한 범죄전쟁’이라고 규정한 이 비엩남 민족해방전쟁에서 우리나라는 얼마나 극악한 역할을 맡았던가. 비엩남에서 ‘따이한’은 잔인함의 대명사였다고 한다. 
  미국을 제외한 연합군의 수가 6만명일 때, 우리 한국군의 수는 무려 5만명이었다. 이렇게 많은 수가 참전하여 비엩남 민중의 염원을 방해하고 그들의 역사를 갈갈이 찢어놓고 있었음을 상기한다면 어찌 죄스러움에 고개를 들 수 있겠는가. 
  자신의 국가와 민족을 지키기 위해 빈손만으로 해방의 깃발을 드높인 사람이 있다면, 그가 어느나라 사람이건 상관없이 존경의 대상이다. 우리의 독립투사들을 우리가 지금도 존경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러한 이유인 것이다. 시오니즘적 민족주의는 옳지않지만, 전세계의 평화와 자유를 위해 어느 나라이건 다른 나라를 침략할 수 없고 또, 침략 당해서도 안된다. 만일 그러한 것이 어떤 이유에서건 용납된다면 그것은 또다른 제국주의의 시작이며 나치즘의 발현인 것이다. 
  우리가 아직도 ‘공산주의’의 망령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편협된 사고와 경직된 감정을 가지고 있다면 지금 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중국의 모택동 주석을 존경하고, 러시아의 레닌을 이해하며, 독일의 마르크스를 새롭게 해석해야 한다. 그리고 제3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변화들을 주의깊게 살펴야 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미국이 지원한 모든 제3세계국가들의 모습이 군사독재와 매판자본이었음을 상기하는 것이 어찌 우연의 일치이겠는가. 우리는 쿠바를 시작으로 니카라과, 살바도르, 칠레, 온두라스 등 중남미와 아프리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태에 주목을 해야 할 것이다. 
  옳은 것은 무엇인가. 옳은 것에는 분명 기준이 있다. 그 기준이 자신의 의식과 다르다고 해서 비난하거나 무시하거나 적대적으로 생각하는 시대는 이제 지났다. 개인의 이기주의는 그 자신의 피해로 막을 수 있지만 집단이나 국가의 이기주의는 결국 많은 사람을 다치게 하고 역사를 피흘리게 한다. 우리는 이제 그만 피흘려야 한다. 
  중국과 수교를 하고, 러시아와 수교를 하고, 비엩남과 수교를 했다. 모두 이른바 ‘공산주의’의 망령이 떠돌던 나라이다. 우리는 그 나라의 이데올로기를 가치판단의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그것은 그 나라와 민중이 선택한 기준이다. 그리고 그 나라를 이끌어온 모택동, 레닌, 호치민은 그 나라의 민중들에게 아직도 변함없이 사랑받고 존경받는 인물들이다. 
  그들은 그 나라를 위기에서 구했으며 민족의 역사가 자존심을 지킬 수 있도록 했다. 그들은 그 나라 민중들의 삶을 풍요롭게 했으며 정의와 자유와 평화가 무엇인지 깨닫게 했다. 우리는 이제 인정해야 한다. 그들이 우리의 적이 아니라, 우리가 그들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그리고 비엩남에 대한 공식적인 사과와 함께 우리의 자존심도 되찾아야 한다. 오천년 역사에 있어 고구려 때의 그 웅장함과 광활함이 있었던 시대는 있었을지언정 고통받는 나라를 침략하여 차마 못할짓을 한적은 없었던 우리 백의민족의 자존심을.


글쓴이 : 조금 시간이 지난 글이지만 요즘 베트남(정확한 명칭은 비엩남입니다.)에 관한 글이 올라오고 있어서 다시 올립니다. 그리고 저도 개인적으로 비엩남이라는 나라를 좋아하고 비엩남 민중들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자신의 조국을 지킨 민중이라면 당연히 받아야할 존경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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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을 다녀와서


 

 늘 마음 속에 외경과 신비로움과 역사의 고통으로 각인되어 있는 지리산의 웅장한 자태를 그리다가 마침내 그 품으로 뛰어들어가기로 결정을 했다. 혼자서는 섯불리 뛰어들기가 두려울만큼 자연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위대한 무게를 지닌 산임을 잘 알고 있는터라 함께 가기로 한 바른글 친구들과의 동행은 다행스럽고 즐거운 길이었다.
 8월 1일 밤 12시 광주행 우등 고속버스표를 예매해 놓았다는 전갈과 함께 터미널에 10시에 모여 서로의 짐을 확인하고 알맞게 다시 분배하기로 했다. 함께 가기로 한 일행은 모두 12명. 11시가 되기 전에 10명의 회원이 나왔고 한 명이 약속을 일방적으로 취소하고 나오지 않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반드시 나오겠다고 한 사람이 갑작스럽게, 그것도 일방적으로 약속을 깨뜨리는 바람에 모두들 황당해 했다. 그리고 마지막 한 사람, 12시 5분 전까지 나타나지 않아서 모두의 마음을 졸이게 해놓고 아슬아슬하게 나타났다. 이렇게 처음부터 조짐이 않좋았던 출발은 결정적으로 버스표에서 드러났다.
 시간이 되어 버스에 오르자 그 자리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앉아있었고 버스표를 대조해보는 순간, 우리는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예매표는 8월 2일 밤 12시였던 것이다. 하루나 일찍 나와서 서둘렀던 모든 사람들은 기운이 쪽 빠져서 넋을 잃고 말았다. 표를 예매했던 친구는 미리 표를 확인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11시 55분 차가 아직 출발하지 않고 있었고, 사람이 다 차지 않아서 우리 일행이 모두 들어갈 수 있었다. 우둥에서 일반으로 격이 낮아지긴 했지만 한밤에 다시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광주로 내려갈 수 있었던 것만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새벽 4시 30분에 광주에 도착한 일행은 지리산으로 가기 위해 다시 구례로 가야했다. 그런데, 버스표 예매로 한번 실수를 한 친구가 남원으로 가야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구례로 가야 한다는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고 1시간 30분이나 걸려서 남원에 도착한 우리는 다시 한번 황당한 일을 당하고 말았다. 남원에서는 성삼재로 가는 버스가 없었던 것이다. 그 많은 일행이 돈과 시간과 노력을 들여 이동을 하는 데, 번번이 실수를 하자 그 친구의 발언권은 자제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더 이상의 실수는 없을테지만, 일단 구례로 다시 내려가기로 했다.
 구례에서 연료와 라면 등을 구입한 다음, 성삼재로 올라가는 버스를 탔다. 본래 지리산의 종주는 화엄사에서 노고단으로 올라가는 길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예전에 왔을 때는 화엄사에서 노고단까지 매우 힘들게 올라갔었다. 그런데 이제는 버스로 노고단 바로 밑에 까지 올라갈 수 있으니 편해지기는 했지만 마음은 오히려 불편하다. 지리산의 중턱을 깎아 도로를 만들어놓았으니 산은 산대로 망쳐놓고 사람들의 통행이 많아지니 온갖 쓰레기와 인간의 손때로 산이 빠르게 죽어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성삼재에서 노고단까지는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처음 산행을 시작하는 일행들은 매우 힘들어했고, 처음부터 산행을 포기하려는 사람도 생기기 시작했다. 노고단 산장에서 점심을 해먹고 산행을 시작했다. 흐리고 구름이 뒤덮인 산은 주위의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않고 있다. 비가 오락가락하고 축축한 날씨였으나 산행하기에는 비교적 좋은 기후였다. 첫째날은 돼지평전, 임걸령, 노루목을 지나 뱀사골 산장까지 왔다. 산행의 초기단계는 매우 힘이 들기 마련이다. 산을 잘 오르는 사람도 적응이 안되었고 산을 잘 못타는 사람은 몹시 힘들어했다. 뱀사골 산장에서 저녁을 해먹기도 어려웠다. 산장 쪽에만 물이 나오는데, 물을 한번 길러가는 길이 너무 힘들었다. 사람은 매우 많아서 골짜기에 텐트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온갖 쓰레기와 오물들이 인간의 더러움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니 비가 계속내리고 있었다. 비가 내리는 데다 사람들도 어제의 산행에 지쳐서 그만 포기하자고 말하는 사람도 생겼다. 우여곡절 끝에 느즈막히 다시 출발을 했다. 출발한지 오래지 않아 중간에서 합류한 한 동료를 만나게 되어 반가웠다. 산을 잘 타는 이 친구 덕에 사람들은 힘을 얻어 둘째날은 상당히 많이 걸을 수 있었다.
 토끼봉, 총각샘, 연하천 산장, 삼각고지, 구벽소령, 신벽소령을 지나 선비샘에서 머물렀다. 선비샘의 야영장은 비교적 좋은 편이었다. 어제의 경험으로 텐트도 일찍 쳤고 밥도 빨리해서 먹었다. 비는 계속 오락가락한다.
 아침 일찍 서둘렀으나 짐을 챙기는 시간이 많이 걸려서 결국 9시 30분이 되어서야 출발을 할 수 있었다. 세석평전을 거쳐 촛대봉, 연하봉을 지나 장터목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3시 30분. 나는 일찍 텐트를 치고 자리를 잡았다. 일행들은 본래 천왕봉에 오르는 것을 포기하고 세석평전에서 하산하기로 했었으나 모두들 장터목까지 왔다. 그리고 즉시 천왕봉에 올라 5시 30분이 되어 다시 장터목으로 돌아왔다. 힘겨운 산행을 한 것이다. 내일까지는 모두 집에 돌아가야 한다고 이렇게 무리한 결정을 내렸다. 그래도 결국 천왕봉까지 오른 것은 잘한 일이다. 일행이 하산을 하고 나서 나는 호젓한 시간을 보냈다. 가지고 간 전상국의 [유정의 사랑]을 읽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빠르게 텐트를 걷고 빵 한조각과 따뜻한 물로 아침을 대신 한다음 천왕봉을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장터목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제석봉이 나온다. 제석봉에서는 천왕봉이 바로 보이고 지리산의 줄기가 한눈에 들어온다. 고사목들의 기묘한 모습들도 인상적이다. 어제 저녁에 날씨가 걷히고 달과 별이 나타날 때는 사람들이 모두 탄성을 질렀다.
 아침에도 비교적 날씨는 맑았다. 해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산 아래의 구름바다가 눈에 들어오고 지리산 줄기가 마치 섬처럼 선명하게 드러났다. 천왕봉까지는 한 시간이 채 못걸렸다. 천왕봉. 넉넉한 대지의 어머니. 온갖 역사의 고통을 끌어안고 피를 흘리며 앉아있는 대지의 신. 모든 외경과 존경과 아름다운 찬사를 한몸에 받아도 부끄럽지 않은 지리산. 천왕봉.
 발 아래 구름은 바다처럼 끝없이 펼쳐지고 광활한 하늘만이 거칠것 없이 드러나는 세계. 세상의 온갖 고뇌와 먼지같은 일상과 허장성세와 인간사이의 갈등과 반목과 이기심과 탐욕과 더러움과 협잡과 권력과 폭력과 추잡함이 한순간에 가시는 곳이다. 구름을 몰고 가는 바람이 있고, 산등성이를 타고 넘는 한덩어리 구름이 있고 오로지 자연의 신비함만이 존재하는 곳.
 그러나 인간의 발길이 닿는 곳은 여전히 더러웠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정상을 향해 기어오르고 바위에 붙어 사진을 찍고 더러운 음식 찌꺼기를 버리고 자연 앞에 겸손하지 않고 이기적이다.
 천왕봉에서 진주 쪽으로 내려오는 길을 택해 걸어내려오기 시작했다. 적막함. 이렇게 혼자 세상에 서 있다고 느껴질 때 나는 까닭모를 서러움이 복받쳤다. 며칠째 무리한 발바닥에서는 물집이 생기고 땅을 디딜때마다 아파왔다. 천천히 산을 내려오면서 아마도 한동안은 산에 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같다.
 중산리까지 내려오니 12시. 부산가는 버스를 탔다. 오후 4시에 사상터미널에 도착. 연안부두까지 1시간. 제주도가는 배는 오후 7시 30분에 있었다. 표를 끊어놓고 근처의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기다렸다. 이렇게 큰 배는 처음 타본다. 배멀미가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약도 먹었고 발바닥이 너무 아파서 양말을 벗어보니 물집이 양쪽 발에 커다랗게 잡혀있다. 물집을 짜내고 조용하게 책을 읽었다. 전상국의 [유정의 사랑]을 모두 읽고 잤다.
 아침에 일어나니 제주도가 보인다. 제주도. 이곳도 처음오는 곳이다. 박영옥 선생님이 계신 곳이어서 일부러 찾기로 작정을 했다. 배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시내까지 나왔다. 짐작으로 시청 근처에서 내린 것이 잘된 일이었다. 선생님네 가게가 근처에 있었기 때문이다. 점심을 함께 먹고 관회와 함께 근처 함덕해수욕장으로 갔다. 하지만 이미 해가 저물고 바람이 심하게 불고 저녁이 되자 비가 많이 내려서 바다는 멀리서 구경만 하고 말았다.
 텐트에서 하루 자면서 제주도에 오래 머물 일이 없을 것만 같았다. 날씨가 좋지 않아서 한라산에도 못올라가고 저녁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해서 어디 움직일만한 곳도 없었다. 아침이 되자 비는 더욱 거세졌다. 바로 서울로 올라가기로 마음을 먹고 항공편을 알아보았더니 비행기는 운행이 된다고 했다. 내리는 비 속에서 탠트를 걷고 택시를 타고 선생님댁으로 돌아왔다. 선생님에게 3만원을 빌어서 공항으로 나갔다. 8시 50분발 서울행 비행기를 탈려고 생각했으나 어처구니 없게도 요금이 부족했다. 비행기 요금이 무려 4만 7천원이었던 것이다. 만원이 부족해서 부산까지 가는 비행기를 타고 부산에 도착했다. 김해 비행장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버스가 교통사고가 나서 다시 갈아타고 나오면서 마음이 초조했다. 주머니에는 몇 천원밖에 없었고 은행에서 돈을 찾아야만 했다. 돈 만원때문에 엄청난 시간의 낭비와 고생을 하는 것이다. 부산진역 앞 국민은행에서 30만원을 찾았다.
 부산역에 도착하여 서울가는 기차편을 알아보았으나 모두 매진. 대구까지 입석을 사서 연장을 하는 방법이 있다고 한다. 일단 표를 구입한 다음, 표를 환불하는 곳으로 가서 기다렸다. 표를 바꾸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서성이다가 새마을 표를 바꾸는 아가씨를 만났다. 예상이 적중했다. 조금 비싼 새마을이긴 하지만 시간이 아주 적당했다. 무조건 구입을 하고 조금 기다리지 않아서 새마을을 탔다. 그런데, 함께 탄 옆자리에 나에게 표를 판 아가씨가 앉았다. 알고보니 여행사 통역안내원이었다. 일본인 여행객의 안내와 통역을 맡고 있는 그 아가씨와 함께 오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비행기로 서울에 오지 못한 것을 보상이라도 하듯 결과는 좋은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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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내리는 날의 외출

 

  비가 내리고 있었다. 봄이 무르익고 잎새는 더욱 푸르러가는 5월의 한 날에 비가 내리고 있다. 언제였을까. 기쁜 마음으로 외출을 준비하던 기억이. 허름하게 걸치고 나서면서 살아있음이 작은 행복으로 다가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는 그러한 외출이 나에게도 있을줄을 예상이나 했었던가.
  내게는 언제나 그리움과 아름다움으로 다가오는 누님과 함께 흩뿌리는 봄비를 우산으로 가리며 산본으로 가는 전철에 몸을 실었다. 벌써 언제였던가. 이곳 시흥으로 이사오기 훨씬 전부터 도시빈민으로 태어나 자란 내 어린시절의 기억이 빗물처럼 흘러갔다. 작고 낡은 집, 판자와 루핑으로 얽은 허름한 집에서 홍수를 만나고 강제철거에 시흥의 산동네 비탈진 언덕으로 허위허위 올랐던 이십년 전, 그때 나는 열 네살이었다.
  국민학교를 마치고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 없었던 가난으로 가족들과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던 그때, 10원짜리 물지게와 30원짜리 우동 한그릇으로 하루를 견뎌야 했던 산비탈 해방촌 마을에서 나는 꼬마 노동자로 자랐다. 몇 백원의 일당에 목이 메이던 나날 속에서도 절망을 몰랐던 것은 여전히 철이 없었거나 창창히 살아가야할 미래가 있었기 때문인지 몰랐다. 단칸방에서 네 식구가 새우잠을 자고 아침마다 연탄가스에 취해 머리를 두드려 대며 산비탈을 구르듯 내려와 공장으로 갔다.
  나의 꿈은 소박했다. 많은 돈도, 큰 명예의 욕심도 없었다. 그저 작은 집에서, 방바닥이 평평하고 비가 새지않고 쫓겨나지 않을 걱정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꿈을 이루기는 참으로 어렵고 힘겨웠다. 비가 오면 방에 물이 들어차는 낮은 동네거나 산사태로 사람이 떼죽음을 하는 비탈진 산동네를 전전하며 전혀 낯선 텔레비젼의 아파트가 어느 외국의 풍경같이 낯설기만 했다.
  소년노동자에서 청년노동자로 자라도 형편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누구의 탓이었을까. 나는 뼈가 휘도록 열심히 살았고 다른 누구에게 조금도 해를 끼치지 않았다. 먹고 살기 위해서 밤마다 하얀 벼개잇을 핏물로 물들인 적도 있었고 집을 떠나 지방을 몇 해씩 전전하기도 했다. 그래도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배우지 못하고 가진 것없어서 서럽고 답답한 마음으로 이 더러운 세상을 원망하기도 했다.
  가난에 찌든 내 모습이 싫었고 불평등한 세상이 싫었다. 산비탈 판자집을 전전하며 살아온지 이제 이십년, 나는 오늘 신도시 아파트의 작은 평수 아파트 열쇠를 받아왔다. 잔금을 치루고 13층까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그 작은 공간이 나의 집이라는 것이 선뜻 믿기지가 않았다. 내 손으로 아파트를 지은 것이 대체 몇 동이었던가. 여의도에서 잠실에 이르기까지 건설업 노동으로 잔뼈가 굵은 내 손으로 지은 집이 그렇게 많았음에도 정작 내 집은 없었다. 60평, 45평, 많은 호화아파트도 지어보았고 강남의 호화주택도 들어가 보았다. 그때에도 나의 꿈은 언제나 먼곳에 있었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내 집이 있다면.
  내 집을 향한 끝없는 갈망과 절실함은 다만 주거공간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집이 없다는 것은 살아있음의 모든 근거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단단한 땅 위에 다리를 딛고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래로 쌓은 탑 위에 서 있듯이 불안하고 위태로운 상태였다. 언제나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세월을 보내야 했다. 밤이면 흘러나오는 아파트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불빛을 보면서 알 수 없는 쓸쓸함과 슬픔이 가슴 속에서 스며나오는 것을 느낀 적이 한두번이었을까.
  지금 비가 내리고 있다. 이제 며칠있으면 이사를 한다. 신도시 아파트 주민이 되어 지난날, 내가 살았던 산꼭대기 판자집을 생각하면서 나는 무엇을 느낄까. 그때도 여전히 쓸쓸함과 서러움을 느끼게 될까.


  이 글을 읽는 분들 가운데 상당히 많은 분들은 이러한 고통을 모르고 자랐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도 집이 없어서 산비탈의 판자집에서, 아니면 비닐하우스에서 강제철거를 당하고 오늘처럼 비가 오늘날 하늘을 쳐다보며 눈물지을 가난한 도시빈민들을 생각하며 이 글을 쓴다. 비가 새는 판자집에서 서러움의 눈물을 흘려보지 않은 사람은 감히 말하지 말라. 인간의 삶이 얼마나 절실하고 각박한 것인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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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층? 꿈깨라!

 

먼저, 한겨레 신문 기사 한 꼭지.

서울시민 85% “나는 중산층”/시정개발연구원 ‘계층조사’  
서울시민의 85%가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느끼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또 평균적인 서울시민의 모습은 ‘26평형 아파트에 사는 4인 가족의 38살 남자’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결과는 서울시정개발연구원(시정연)이 개원 10돌을 맞아 ‘서울시 사회계층과 정책수요’ 연구를 위해 만 20살 이상 65살 이하의 서울시민 1500명을 대상으로 벌인 조사에서 나타났다. 
시정연이 시민들에게 상-중상-중중-중하-하층 등 5개 계층 중 자신이 어디에 속하고 있다고 느끼는지 물어본 결과, 최상위인 ‘상층’에 속한다고 밝힌 사람은 0.3%에 그쳤으며, 최하위인 ‘하층’에 속한다고 대답한 사람은 8.3%였다. 중중층(46%)과 중하층(39%)을 합쳐 모두 85%가 일상적으로 중산층이라고 할 수 있는 계층의식을 지닌 것으로 나타났다.
시민들은 또 △학력 △가문 △정치의식 등에서 중류층-하류층 사이보다 상류층-중류층 사이에 격차가 더 크다고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2002-10-30)

 

결론부터 말하자면,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당신의 껍데기뿐인 허위의식을 깨뜨리라는 것이다.
중상 중산층, 중중 중산층, 중하 중산층의 분류가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학벌, 직업, 소득수준 등을 고려해서 판단을 했겠지만, 과연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이런 가치판단들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정말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알면서도 속고 싶은 유혹을 받는 것일까?

이것을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자. 중산층은 주관적인 관념으로도, 자신의 학벌, 직업, 소득수준으로도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중산층은 사회의 구조와 시스템이 만드는 것이다. 
이제, 당신이 가지고 있는 허위의식과 살얼음판 위에 있는 중산층이라는 껍데기를 벗겨보자.
월급 3백만원을 받는 직장인 홍길동씨가 있다고 하자. 이 사람은 우리 사회의 기준으로만 본다면 중산층에 속할 것이다. 세금을 공제하고 실제 수령액이 3백만원이 될 수도 있고, 세금을 공제하기 전에 총수령액이 3백만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홍길동 씨는 30평 아파트에 살고 있고, 소나타를 타고 출퇴근을 한다. 부모님을 모시고 있고, 아내와 두 아이가 있다. 
이 정도면 우리 사회에서 중산층이라고 자타가 공인할 것으로 본다. 하지만,  중산층의 개념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면서 중산층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부터 잘못이다.

홍길동 씨는 매달 3백만원의 월급을 받지만, 세금으로 나가는 돈, 각종 공과금 - 아파트 관리비, 통신비 등 - 과 휘발유값, 차량유지비 등 기본으로 나가는 비용만해도 엄청나다. 
여기에 아이들 교육비 - 사교육비를 감당하기는 엄두조차 못낸다. - 가 들어가야 하고, 대출금 이자 등도 있다. 이 정도만 해도 벌써 지출되는 돈이 2백만원이 넘어간다.
문제는, 3백만원을 꾸준히 받고, 홍길동 씨네 집안에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조건에서만 홍길동 씨가 그나마 근근히 중산층(?)의 생계를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홍길동 씨의 부모님 가운데 한 분이라도 편찮으셔서 병원에 입원하거나 수술을 받게 되면 홍길동 씨의 가계는 곧바로 적자로 바뀌게 된다.
즉, 가족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아프게 되면 중산층 생활이라는 것은 뿌리부터 흔들리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약 90% 이상의 국민들 - 약 4천만 명 - 은 가족들 가운데 한 사람이 심각한 질병에 걸려서 병원에 입원하거나 수술을 받게 되면 곧바로 경제적인 부담을 느끼게 된다. 그 정도는 물론 차이가 있겠지만, 예를 들어 1천만원의 수술비가 필요하다고 했을 때, 이 정도의 돈을 부담없이 지불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부담을 느낀다면 그들은 모두 중산층이 아니다. 따라서 홍길동 씨도 당연히 자신이 중산층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앞에서 중산층은 사회 구조와 시스템이라고 했다. 
유럽처럼 소득의 50%를 세금으로 내고 의료와 교육을 완전 무료로 제공받을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홍길동 씨가 3백만원을 받아 세금으로 150만원을 낸다고 하자. 그리고 가족 가운데 누가 아프건 모두 무료로 의료 혜택으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다면, 과연 앞에서 3백만원을 버는 것과 150만원을 버는 것 가운데 누가 더 잘 산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 당연히 뒤의 150만원을 버는 것이 훨씬 더 잘 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시스템이 만드는 중산층인 것이다.

의료비와 교육비가 전혀 들지 않는다고 했을 때, 다른 부분에서 조금씩 절약하고 검소하게 생활한다면 월급 150만원을 받아도 궁핍하게 살지는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노후가 불안하지 않고, 자식들의 교육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므로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도 되고, 사회적으로도 불안할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우리나라와 같은 구조 속에서는 한달에 5백만원을 벌어도 늘 삶의 토대가 불안하기만 할 것이다. 언제 어떻게 자신의 생활이 붕괴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불안을 없앨 수 있는 것이 바로 사회적인 시스템이다. 적어도 의료와 교육만큼은 국가가 책임을 지겠다는 정책. 그래서 국민들에게 세금을 더 걷겠다고 하는 합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물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세금 정책과 세금을 걷어들이는 경로가 투명해야 한다. 
자영업자들이나 전문직 종사자들은 세금을 내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고 있고, 월급장이들은 자신들이 세금을 많이 낸다고 억울해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버는 소득의 50%를 세금으로 내는 것이 분명하게 확인된다면, 돈을 내는 사람들 누구도 억울해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돈으로 의료와 교육 단 두 가지 정책만을 국가가 책임지고 이끌어 간다면 많은 국민들은 자발적으로 동의할 것이다.
민주노동당에서도 부유세를 주장했지만, 세금의 형평성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부유세는 당연히 필요하다. 100만원을 버는 사람의 50%는 50만원이지만, 100억을 버는 사람의 50%는 50억이다. 이럴 경우는 100억을 버는 사람에게 80%의 세금을 내도록 하는 것이 바로 형평성이다.
그러면 누가 애써서 돈을 벌겠냐고? 나라면 당연히 돈을 벌 수 있을만큼 벌고 세금으로 내겠다. 돈 많이 버는 사람이 존경받는 사회가 바로 그런 사회가 아닌가?
이상론에 치우치고 있다고? 월드컵 4강도 이루어지기 전에는 이상이었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이 이제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지 않은가?
다른 건 뒤로 미루더라도 의료와 교육만큼은 국가가 무료로 실시할 수 있도록 이제부터 정책을 개발하자. 국민이 하면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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