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내리는 날의 외출
비가 내리고 있었다. 봄이 무르익고 잎새는 더욱 푸르러가는 5월의 한 날에 비가 내리고 있다. 언제였을까. 기쁜 마음으로 외출을 준비하던 기억이. 허름하게 걸치고 나서면서 살아있음이 작은 행복으로 다가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는 그러한 외출이 나에게도 있을줄을 예상이나 했었던가.
내게는 언제나 그리움과 아름다움으로 다가오는 누님과 함께 흩뿌리는 봄비를 우산으로 가리며 산본으로 가는 전철에 몸을 실었다. 벌써 언제였던가. 이곳 시흥으로 이사오기 훨씬 전부터 도시빈민으로 태어나 자란 내 어린시절의 기억이 빗물처럼 흘러갔다. 작고 낡은 집, 판자와 루핑으로 얽은 허름한 집에서 홍수를 만나고 강제철거에 시흥의 산동네 비탈진 언덕으로 허위허위 올랐던 이십년 전, 그때 나는 열 네살이었다.
국민학교를 마치고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 없었던 가난으로 가족들과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던 그때, 10원짜리 물지게와 30원짜리 우동 한그릇으로 하루를 견뎌야 했던 산비탈 해방촌 마을에서 나는 꼬마 노동자로 자랐다. 몇 백원의 일당에 목이 메이던 나날 속에서도 절망을 몰랐던 것은 여전히 철이 없었거나 창창히 살아가야할 미래가 있었기 때문인지 몰랐다. 단칸방에서 네 식구가 새우잠을 자고 아침마다 연탄가스에 취해 머리를 두드려 대며 산비탈을 구르듯 내려와 공장으로 갔다.
나의 꿈은 소박했다. 많은 돈도, 큰 명예의 욕심도 없었다. 그저 작은 집에서, 방바닥이 평평하고 비가 새지않고 쫓겨나지 않을 걱정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꿈을 이루기는 참으로 어렵고 힘겨웠다. 비가 오면 방에 물이 들어차는 낮은 동네거나 산사태로 사람이 떼죽음을 하는 비탈진 산동네를 전전하며 전혀 낯선 텔레비젼의 아파트가 어느 외국의 풍경같이 낯설기만 했다.
소년노동자에서 청년노동자로 자라도 형편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누구의 탓이었을까. 나는 뼈가 휘도록 열심히 살았고 다른 누구에게 조금도 해를 끼치지 않았다. 먹고 살기 위해서 밤마다 하얀 벼개잇을 핏물로 물들인 적도 있었고 집을 떠나 지방을 몇 해씩 전전하기도 했다. 그래도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배우지 못하고 가진 것없어서 서럽고 답답한 마음으로 이 더러운 세상을 원망하기도 했다.
가난에 찌든 내 모습이 싫었고 불평등한 세상이 싫었다. 산비탈 판자집을 전전하며 살아온지 이제 이십년, 나는 오늘 신도시 아파트의 작은 평수 아파트 열쇠를 받아왔다. 잔금을 치루고 13층까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그 작은 공간이 나의 집이라는 것이 선뜻 믿기지가 않았다. 내 손으로 아파트를 지은 것이 대체 몇 동이었던가. 여의도에서 잠실에 이르기까지 건설업 노동으로 잔뼈가 굵은 내 손으로 지은 집이 그렇게 많았음에도 정작 내 집은 없었다. 60평, 45평, 많은 호화아파트도 지어보았고 강남의 호화주택도 들어가 보았다. 그때에도 나의 꿈은 언제나 먼곳에 있었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내 집이 있다면.
내 집을 향한 끝없는 갈망과 절실함은 다만 주거공간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집이 없다는 것은 살아있음의 모든 근거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단단한 땅 위에 다리를 딛고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래로 쌓은 탑 위에 서 있듯이 불안하고 위태로운 상태였다. 언제나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세월을 보내야 했다. 밤이면 흘러나오는 아파트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불빛을 보면서 알 수 없는 쓸쓸함과 슬픔이 가슴 속에서 스며나오는 것을 느낀 적이 한두번이었을까.
지금 비가 내리고 있다. 이제 며칠있으면 이사를 한다. 신도시 아파트 주민이 되어 지난날, 내가 살았던 산꼭대기 판자집을 생각하면서 나는 무엇을 느낄까. 그때도 여전히 쓸쓸함과 서러움을 느끼게 될까.
이 글을 읽는 분들 가운데 상당히 많은 분들은 이러한 고통을 모르고 자랐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도 집이 없어서 산비탈의 판자집에서, 아니면 비닐하우스에서 강제철거를 당하고 오늘처럼 비가 오늘날 하늘을 쳐다보며 눈물지을 가난한 도시빈민들을 생각하며 이 글을 쓴다. 비가 새는 판자집에서 서러움의 눈물을 흘려보지 않은 사람은 감히 말하지 말라. 인간의 삶이 얼마나 절실하고 각박한 것인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