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를 다녀와서

  

언젠가 꼭 찾아뵙겠다고 마음으로만 약속했던 내 자신과의 약속이 항상 부채로 남아있었다. 왜, 10년이 지난 오늘까지 나는 광주를 단 한번도 찾아가질 않았을까. 아니, 찾아갈 수가 없었을까. 먹고 살기가 바빠 시간이 없다는 핑계라면 그것은 정말 우스운 변명일 것이다. 그렇다면 1980년 5월의 광주는 나와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아니, 그렇지도 않다. 5월의 광주는 내 가슴에 붉은 핏자욱처럼 언제나 지워지지 않고 선명하다.

살아간다는 것은 타성에 길들여지는 과정이다. 어떤 혁명적인 사건이나 운명의 잔인한 고통을 겪어도 시간이 지나면 망각하고 그때의 감정을 다시 일으키지 못하는 약점을 인간은 가지고 있다. 순수한 정열과 진지한 고통을 간직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인간의 삶이 가치있고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과거의 사건들을 인간의 삶에 투영시켜 ‘역사’로 만들어 가는 과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뜻에서 이번 광주행은 피상적이고 관념적이었던 역사에 피와 열기가 흐르게 하는 행위였다.

「언협」에서 주관한 이번 행사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다. 주로 언론관계 사람들이었는데, 나는 좀 어울리지 않는 자리였지만 뜻있는 목적 하나만 가지고 참여를 했다. 24일 일요일 아침에 서울을 출발한 버스는 모두 두 대였는데 서울을 벗어나자마자 한 대가 고장나는 바람에 서울로 올라올 때까지 고생을 했다.

광주에 도착한 우리는 약식 집회를 갖고 열사들에 대한 추모의식을 치른 뒤 참배를 했다. 줄지어 늘어선 무덤 앞에는 가족들이 마련한 사진과 약력이 놓여있고 이름없이 죽어간 열사들의 무덤에는 ‘무명열사지묘’라고 씌여있었다. 그나마 가족이 있는 분들은 죽어서나마 가족들의 보살핌을 받지만 연고도 없고 이름도 없이 죽어간 그 많은 열사들은 누가 기억을 해줄까. 무덤 앞에 놓인 열사들의 이름과 약력을 보면서 나는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 내 나이와 같은 열사들의 무덤이 몇 개 보였기 때문이며 그들의 삶이 나의 삶에 비해 어떤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벌써 12년전의 일이었다. 나는 그때 스무 살의 청년으로 서울에서 새로운 배움에 깊은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내 생활은 가난과 피곤으로 이어졌지만 배움이라는 단 하나의 희망이 나를 지탱하고 있었으며 세상은 여전히 안개 속에 있었다.

바로 그때, 광주의 5월은 시작되었다. 군부의 쿠데타와 민중의 항거가 계속되던 바로 그 시기, 역사가 꿈틀거리고 인간의 삶이 격동하는 바로 그 시기에 나는 서울에서 새벽까지 불을 밝히며 교과서를 들여다 보고 있었고, 광주에서는 나와 같은 동갑내기들이 손에 총을 잡았다. 한반도의 땅 위에서 이렇게 서로 다른 길을 가야만 했던 사건이 벌어지고 있음을 나는 절실하게 깨닫지 못했다.

그들이 총을 잡을 수 밖에 없었던 그 처절한 상황을 나는 몇 년이 지난 다음에야 사진과 비디오를 통해 볼 수 있었고 시민군의 증언과 기록들로 확인할 수 있었다. 한 하늘 밑에서 이렇게 피의 살육이 벌어지는 동안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내가 철이 없었다면 광주에 있었던 나의 동갑내기들은 무슨 이유로 총을 들었고 장열하게 전사를 했을까. 그들도 철이 없었을까.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동족을 학살하는 군부의 악랄함과 잔인함에 젊은 피가 끓어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들었다. 바로 역사의 현장에 있었기에 그들은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고 젊은 생명을 아까와하지 않고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고자 자신의 피를 뿌렸다.

 

민청진: 1961.6.5일 생 - 1980.5.24일 전사

아아, 어쩌면 이럴 수가 있을까. 나와 생일이 하루 차이인 바로 이 벗은 도청앞 전투에서 계엄군의 총에 맞아 장열하게 전사했다. 스무 살의 피끓는 나이. 부모님같은 노인들이 계엄군의 곤봉에 머리가 깨지고 동생같은 여학생이 계엄군의 칼날에 온 몸이 찢기는 처참한 광경을 보면서 피가 끓어오르지 않는다면 그는 이미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분연히 총을 들지 않는다면, 총이 없다면 맨 주먹으로라도 내 가족을 학살하는 악마와 같은 군대에 맞서 싸우지 않는다면 그는 이미 죽어버린 생명이다. 여기 동갑내기 민청진은 내가 서울에서 군부와 언론의 왜곡된 사실에 귀를 기울이는 동안 외롭게 죽어갔던 것이다. 다른 많은 열사들의 무덤을 보면서 가슴이 뜨거워 왔지만 정작 동갑내기들의 죽음 앞에서는 눈물이 솟구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내 친구들, 얼굴도 모르고 말 한마디 나눈 적이 없지만 그들은 나의 벗들이었다. 몇 해전에 죽마고우 친구를 사고로 잃었을 때, 그 슬픔과 절망은 내 인생을 결정하고 말았다. 그런 마음으로 여기 망월동에 누워있는 벗들을 보면서 이렇게 살아있는 내가 부끄럽고 부끄러웠다.

 

김병연: 1961.3.7일 생 - 1980.5.22일 전사

김종연: 1961.10.11일 생 - 1980.5.22일 전사

김형영: 1961.7.17일 생 - 1980.11.7일 사망

백대환: 1961.5.23일 생 - 1980.5.22일 전사

 

지금 살아있다면 가정을 꾸리고 어쩌면 예쁜 딸과 아들을 앞세워 일요일이면 공원에 나가서 가족사진이라도 찍었을 그들이 지금은 차가운 무덤에 누워있다. 한창 피어오르는 젊은 나이, 스무 살의 초 여름에.

 

역사의 현장에 서 있다는 것은 외로운 일이다. 시간이 지났지만 바로 그 주인공들 앞에서 나는 외롭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것은 두렵지 않을 것이다. 역사가 그들을 의롭게 하고 이땅의 하늘과 땅이 그들을 기억할 것이다. 두려운 것은 내가 그들을 잊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서,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그들만이 내게 일러줄 수 있기 때문이다. 나와 같은 해에 태어나서 역사의 현장에서 부릅뜬 눈으로 죽어간 그들을 기억하며 나는 흐르는 눈물을 감추지 않았다. 그리고 다짐했다.

이 땅에 다시 광주의 오월이 일어난다면 나는 바로 그 현장에 있으리라고, 내 묘비에 짧은 시간이 새겨진다 해도 두려움없이 깃발을 들고 그 자리에 서있겠노라고 초라하지만 당당한 무덤앞에서 나의 동갑내기 벗들에게 다짐했다. 오월의 싱그러운 바람과 꽃 향기, 그리고 제단 위에 받친 향내가 망월동 전사들의 무덤 위에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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