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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동 사람들
박건웅 지음 / 우리나비 / 2023년 9월
평점 :
황금동 사람들
박건웅 작품. 한국현대사의 질곡과 야만을 폭로하는 작품을 꾸준히 이어온 박건웅 작가가 한국전쟁 때 경기도 고양 일대에서 벌어진 대규모 학살 사건을 파고 들었다. 한국전쟁 당시 남한은 낙동강 이남 일부를 제외하고 전국에서 크고 작은 민간인 학살 사건이 끊이지 않았는데, '한국전쟁'에서 사망 또는 실종된 사람이 군인보다 민간인이 더 많다는 통계가 있다. 이 통계가 의미하는 건, 한국전쟁이 '이념전쟁'이고, 2차 세계전쟁이 끝나면서 곧바로 미국으로 대표하는 서방세계와 쏘련으로 대표하는 사회주의 블럭이 '냉전'을 펼치는 과정에서, 강대국의 대리전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했기 때문이다.
이념은 피보다 더 강해서, 부모와 자식, 형제와 자매, 친척 사이에서도 이념이 다르면 서로를 죽이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이념'은 종교 그것도 절대 신념의 극단적 종교와 같아서 이념을 확신하는 개인 또는 집단일수록 자신과 이념이 같지 않으면 극단적으로 배타적인 태도를 보인다.
중세 종교전쟁(십자군 전쟁)이 단지 '종교'적 이유만이 아니라 이슬람 영토를 침략해 재산을 약탈하고 노예를 확보하려는 일종의 '경제 전쟁'이었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현대에 발발하는 전쟁 역시 '이념'을 앞세우지만, 그 이면에는 상대 이념 진영을 무너뜨리고, 더 많은 경제적 이득을 가져가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마르크스는 '모든 전쟁은 극단적 경제 행위'라고 말했다. 국가 대 국가의 전쟁 - 대표적인 전쟁이 1차, 2차 세계전쟁이다 - 에서 승리한 국가(들)는 패한 국가를 약탈한다. 전쟁배상금은 기본이고, 국경을 확장하고(패한 국가는 국경이 줄어든다), 경제 행위를 축소하며, 각종 명목으로 패한 국가의 국민을 수탈한다.
문제는, 어떤 전쟁이든 가장 큰 피해를 당하는 사람은 평범한 개인들이다. 소수 권력 집단의 이익을 지키는 전쟁에서 다수의 평범한 개인들은 군인으로 징집되어 누군가를 죽이거나 죽임을 당한다. 이때 권력 집단은 전쟁의 명분을 만들고, '민족'과 '애국'을 들먹이며 폭력(전쟁)을 부추긴다.
지난 한국전쟁은 역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극렬한 이념에 의한 폭력이 날뛰던 전쟁이었다. 이승만은 '보도연맹'을 조직해 과거 좌익 전력이 있거나 진보 지식인, 청년 등을 가입하도록 만든 다음, 전쟁이 발발하자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을 조직적으로 학살했다. 또한 북한군이 점령했던 지역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부역자'라는 누명을 씌워 잔인하게 학살했다.
이 작품의 배경도 경기도 고양에서 발생한 '부역자' 학살 사건을 다루고 있다. 발생한 역사 사실만 보면 사건은 단순하다. 한국전쟁 때 북한군이 점령했던 지역에서 북한군이 연합군에 쫓겨 다시 북쪽으로 올라간 다음, 그곳에 살고 있던 국민을 '부역자'라는 이름으로 대한민국의 군인과 경찰이 학살한 사건이다. 이런 '부역자' 학살 사건은 전국에서 발생했으며, 구체적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반대의 사례로, 북한군이 남쪽에서 군인 또는 경찰(남한군, 대한민국 군인이나 경찰)의 가족을 포함해 역시 '부역자'로 점 찍어 학살한 사례가 적지 않다. 북한군에게 학살당한 사람들은 각 지역마다 전쟁 피해자 위령비 등이 세워지며 피해자의 기록과 북한군의 만행을 알리는 노력이 이어지는데, 자기 나라(남한, 대한민국)의 군인과 경찰에게 학살당한 국민에 대해서는 구체적 기록이나 위령비 등의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는 게 현실이다.
이 작품은 크게 1부와 2부로 나뉘는데, 작가는 현재와 과거, 상상과 현실을 각각 1부와 2부로 나눠 표현하면서, 그림의 형식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나눴다. 1부에서 인물들은 얼굴을 포함해 몸이 검은색으로 표현되어 있다. 2부에서는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그림 형식이다. 두 개의 공간과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서로 다른 모습은 이질적으로 보이지만, 서로 다르게 보이는 공간과 인물들이 뒤로 가면서 하나로 결합하는 과정은 극적 서사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1부에서 고양 황금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재개발을 기다리며 평범한 일상을 살아간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상하지 않지만, 이들은 1995년 이전을 기억하지 못한다. 게다가 자기 이름을 떠올리지 못하며, 날마다 문 앞에 누군가 밥을 가져다 놓는다. 이들은 낮에는 평범하게 직장에도 다니고, 학교도 다니지만 밤이 되면 아파트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동대표는 아파트 주민을 위해 성실한 대표로 인정받으며, 주민의 어려움을 잘 해결해 주는 인물로, 주민의 건강을 위해 날마다 약을 먹도록 권고하고, 밤 12시가 넘으면 주민들의 안전을 위해 아파트 정문을 닫는다.
아파트 주민들은 이웃끼리 인사를 나누고, 재개발 추진 모임을 갖지만, 자신들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 아파트는 40년이 넘었는데, 정작 자신들은 1995년 이전의 기억이 없다는 사실, 아파트에서 무언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발견하면서 자연스럽게 의문이 생기고, 주민들 일부가 의문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황금동 아파트'의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2부는 한국전쟁 직전부터 전쟁이 발발하고, 북한군이 점령하던 시기를 지나 다시 한국군이 마을로 진입하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현실적으로 다루고 있다. 주인공은 자신의 이름이 '박상필'이라는 걸 알게 되고, 자기 가족과 행복하게 살았던 한국전쟁 직후로 돌아간다. 실제 현실에서 벌어진 사건은 가능한 고증과 증언을 통해 리얼리티를 최대로 확보했으며, 한국전쟁 때 벌어졌던 수 많은 비극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박건웅 작가의 다른 작품 '노근리 이야기'에서도 한국전쟁 때 피난민들이 미군에게 학살당하는 내용과 알려지지 못한 진실을 찾아나서는 이야기를 담았는데, 한국전쟁은 우리 민족(남북한 모두)에게 깊은 두려움과 공포, 고통, 슬픔을 남겼다.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전쟁의 질곡은 끝나지 않았고, 폐허에서 선진국으로 발돋움할 정도로 경제가 성장하고, 우리가 먹고 사는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했으며, 한국이 세계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자부심도 갖지만, 역사에 묻힌 원한과 통한의 경험은 온전히 해소되지 못한 상태다.
박건웅 작가는 한국현대사에서 벌어진 비극을 기억하고 기록하려는 노력을 이어오고 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작업이고, 더 많은 사람이 시간과 정성을 들여 과거의 비극을 더욱 체계적으로 정리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지만, 예술가의 눈으로 해석하는 한국현대사의 비극은 다른 의미에서 값지고 의미가 크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