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모든 일을 컴퓨터로 하다 보니 시간이 지나면서 하드디스크가 늘어났다.

하드디스크는 5년도 훨씬 넘었을 IDE 방식도 있고, 3, 4년 된 SATA 방식의 하드디스크도 있다.

데이터가 많아지고, 하드디스크를 하나씩 늘려가다보니 본체의 디스크 랙에는 무려 6개나 되는 하드디스크가 자리를 잡았다.

데이터가 많으면 늘 불안하다.

잃어버릴 것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고, 그렇게 쌓아놓은 것이 모두 ‘욕심’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오랜 시간에 걸쳐 모아놓은 자료를 한꺼번에 없애는 것도 ‘아집’과 ‘집착’에서 놓여나지 못한 중생으로서는 엄두를 내지 못하는 짓이다.

늘 조심스럽고 불안한 마음을 안고 컴퓨터를 다루었는데, 마침내 사단이 났다. 며칠 전부터 화면에 [하드디스크에 문제가 있습니다]라는 메시지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메시지는 매우 심각한 상황임을 뜻하는 것이다. 이번 기회에 하드디스크 정리를 하자는 생각이 들었고, 그동안 하드디스크가 몇 개씩 되면서도, 데이터가 거의 목까지 차올라서 겸사해서 하드디스크를 새로 장만했다.

이번에는 좀 마음 먹고 깔끔하게 하드디스크며 데이터를 정리하겠노라고 ‘굳은 다짐’을 하면서 새로 도착한 1테라바이트 하드디스크를 컴퓨터에 장착했다.

이때부터는 제사장이 제를 올리는 듯한 경건한 마음이 되어서 조심스럽게 하드디스크를 다뤄야 한다.

컴퓨터를 만진 세월이 20년이 넘었지만, 데이터를 다루는 작업은 늘 조심스럽고 경건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지고 있다.먼저, 얼기설기 뒤엉킨 케이블을 모두 빼내고, 하드디스크에 번호를 적었다.

모두 6개, 새로 장착할 하드디스크까지 7개. 이 가운데 1테라 이하는 이번 기회에 모두 빼내서 따로 보관하기로 생각했다.

실수 없이 일을 하기 위해 하드디스크의 시리얼 번호를 모두 적고, 그 옆에 일련번호를 먹였다.

문제가 생긴 하드디스크는 구입한지 얼마 되지 않은 새 것이었다.

그 안에는 꽤 많은 데이터가 들어 있었는데, 데이터 때문이라도 빨리 손을 써야 했다.

새로 구입한 1테라 하드디스크를 장착하고, 케이블을 연결한 다음 컴퓨터를 켰다. 이때 운영체제를 설치하기 위한 준비를 모두 마치고, 부팅하면서 곧바로 운영체제를 설치했다.

1테라바이트를 반으로 나눠, 각각 XP와 7을 설치했다. 모든 것이 순조롭다,고 말하면 거짓말이다. 운영체제를 설치할 때마다 크고 작은 문제들이 발생하는데, 그나마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이어서 다행이다.

이번에도 역시 문제가 생겼다. 운영체제 설치를 마치고 첫 화면이 뜨면, 메인보드 CD를 넣고 각종 드라이버와 유틸리티를 먼저 설치한다.

그리고 비디오카드 CD를 넣고 설치한다. 대개 문제 없이 잘 설치되지만 이번에는 비디오 카드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화면 해상도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통해 모니터의 케이블을 컴퓨터 본체에 두 개 모두 연결한 것이 문제였음을 알아냈다. DVI 케이블과 VGA 케이블을 모두 연결했더니 모니터 설정에서 모니터를 두 개로 인식하고, 해상도 조절이 잘 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문제를 해결했고, 운영체제의 업데이트까지 모두 마쳤다.

이제 문제가 생긴 하드디스크를 본체에 장착한 다음, 데이터를 모두 새로 설치한 하드디스크로 옮겼다. 이 과정에서 혹시 빠뜨린 것은 없는지 꼼꼼하게 살펴야 했다. 문제가 생긴 하드디스크를 로우레벨 포맷을 할 계획이었기 때문에 한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찾을 수 없게 된다.

데이터를 옮기고 먼저 인터넷 검색에서 ‘하드디스크에 문제가 생겼다’는 메시지를 입력하니 몇 개의 해결 방법이 나타났다. 먼저, 베드 섹터를 찾아서 복구하는 방법. 문제가 생긴 하드디스크는 시게이트 제품이었는데, 시게이트 홈페이지에 들어가니 유틸리티가 있었다. Seagate DiscWizard와 SeaTools for Windows가 그것인데, 유용하긴 했지만 이 유틸리티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문제가 생긴 하드디스크에는 베드 섹터가 없었고, 디스크 앞부분에 Delay가 생기는 것이 문제였다. 인터넷을 검색해봐도 Delay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로우레벨 포맷’ 외에는 없는 듯 했다.다시 HDD Regenerator라는 프로그램을 구해 하드디스크 복구를 시도했지만 역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hddguru.com에서 로우레벨 포맷 유틸리티를 내려받아 하드디스크를 완벽하게 포맷했다. 모든 데이터가 사라지고, 하드디스크는 초기화 된 것이다. 이 과정까지 많은 시간이 지나갔다. 컴퓨터를 수십 번 부팅하고, 기다리는 시간도 하염없었다.

하지만, 로우레벨 포맷까지 했음에도, Delay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결국 하드디스크 A/S센터에 문의를 했고, 교체를 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한 가지 문제는 해결했지만,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새로 장착해 운영체제까지 설치한 하드디스크에 기존에 사용하던 하드디스크를 연결하자 하드디스크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눈앞이 아득해졌다.

빼놨던 기존의 운영체제 하드디스크를 다시 연결하고 데이터들이 들어 있는 하드디스크를 연결하자 탐색기에 하드디스크가 모두 나타났다. 아니, 한 개를 제외하고.

데이터가 가득 들어 있는 하드디스크 한 개는 기계적인 문제는 없었지만 이미 파티션이 날아간 상태였다.마음이 급해져서 하드디스크를 가지고 용산 서비스센터로 달려갔다.

하드디스크가 문제를 많이 일으키는지, 대기자가 꽤 많았다. 번호표를 뽑고 한참을 기다려서야 차례가 돌아왔다. 문제가 생긴 하드디스크를 점검한 다음, 로우레벨 포맷을 한 하드디스크는 새 제품으로 교환을 해주었지만, 데이터를 인식하지 못하는 하드디스크는 기계적으로는 정상이라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했다. 데이터를 살리려면 데이터 복구 센터에 맡기라고 하는데, 하마터면 거액을 들여 그렇게 할뻔했다.

다시 집으로 돌아와 교환한 새 하드디스크를 장착하고 컴퓨터를 켜서 확인했다. 데이터가 들어 있는 기존의 하드디스크도 장착했더니 잘 인식했다. 문제는 데이터를 인식하지 못하는 하드디스크 한 개.

서비스센터의 직원은 데이터를 복구하기 불가능할 거라고 말했지만, 그간의 경험으로 미루어 마음 속으로는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짐작했다. 인식하지 못하는 하드디스크를 장착하고 데이터 복구프로그램을 설치한 다음 ‘물리 드라이브’를 읽어들였다. 그리고 밤새 컴퓨터를 켜놓고, 데이터 복구프로그램이 하드디스크를 읽도록 내버려두고 잠을 자러 갔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모니터를 보니 화면에는 아직도 12시간이나 더 디스크를 읽어야 한다는 내용이 나타나 있었다. 320GB의 데이터를 복구하기 위해 온전히 하루를 꼬박 지내야 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취소’ 버튼을 눌렀다. 그동안 읽었던 데이터를 보고나서 복구를 할 것인지 결정하기로 한 것이다.

’취소’ 버튼을 누르자 데이터 복구프로그램이 읽었던 섹터에서 데이터 목록이 주르륵 나타났다. 아… 다행히 미리 백업을 해둔 것들이었다. 그리고 하드디스크 전체를 복구 할 수 있을 정도로 양호한 상태였다.

굳이 복구하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었다.문제가 생긴 하드디스크도 본체에서 빼내고, 기존에 운영체제를 설치했던 하드디스크도 빼내서, 본체에는 꼭 필요한 운영체제용 하드디스크 1개와 데이터가 들어 있는 하드디스크 2개, 그리고 새걸로 교환한 하드디스크 1개를 장착해 모두 4개의 하드디스크가 순서대로 장착되었고, 모두 1테라씩 4테라바이트의 용량이 되었다.

그동안 사용했던 120GB, 250GB, 320GB 등의 하드디스크는 은퇴를 했다. 이제 데이터를 다시 정리하고, 필요하면 1TB 이상의 하드디스크가 장착될 것이다. 아니면 요즘 눈길을 끌고 있는 NAS도 선택 대상이다.생각해보니 무수히 많이 백업해 두었던 CD와 DVD를 요즘은 거의 구입하지도, 사용하지도 않게 되었다.

모든 것이 인터넷으로 오고 가고, 인터넷으로 저장하고, 대용량 하드디스크와 NAS에 저장하면서 하드디스크에 문제가 생기면 순식간에 엄청난 데이터를 잃게 되고 말았다. 이건 필연이다.

대량, 집중화는 그만큼 위험도 크기 때문이다.데이터를 완벽하게 보관하는 방법을 모색하던지, 아니면 과다한 데이터를 포기하고 자료에 대한 다이어트를 통해 가벼운 마음을 갖던지 구 가지 가운데 하나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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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물은 조작된 이미지인가?

지난 주, 텔레비전을 보다가 우연히 연예계 소식을 전하는 방송을 보게 되었다.
조용필 씨의 부인 안진현 씨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는데, 조용필 씨의 모습이 카메라에 가깝게 보이면서 줄곧 조용필 씨의 슬픔과 회한에 대해 전하고 있었다.
그의 붉은 눈시울과 진정으로 슬퍼하는 애닲은 모습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조용필 씨를 좋아하는 팬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아내가 아직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는 사실은 분명 안타까운 소식이었다. 언론에서는 일제히 조용필 씨와 그의 아내에 대한 사랑과 인생에 대해 자세하게 보도하고 깊은 애도를 표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연예인, 스타이니만큼 그만한 관심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나 역시, 조용필 씨의 노래를 좋아하고, 음악에 인생을 걸고 살아 온 조용필 씨를 존경한다.
하지만, 조용필 씨 본인도 아닌, 조용필 씨 아내의 죽음에 대해 온 방송과 신문에서 그렇게 많은 시간과 지면을 할애하면서 보도한 것은, 인기 스타에 대한 예우를 넘은, ‘죽음’의 상업성은 아니었는지 진지하게 살펴볼 일이다.
지난 주에 두 사람의 사망 소식이 언론을 통해 전해졌다. 한 사람은 앞에서 언급한 조용필 씨의 아내에 관한 보도였고, 다른 한 사람은 바로 두산중공업에서 분신자살한 배달호 씨의 죽음에 관한 보도였다.
죽음 자체에 가벼움과 무거움이 따로 있을 수 없고, 죽은 이에 대한 예우도 차별이 있을 수 없겠지만, 현실적으로 어떤 죽음에 대해 더 많은 ‘사회적 의미’를 부여해야 할 것인지는 우리가 판단해야 한다.
언론에서는 조용필 씨 부인의 사망에 대해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인간적으로 접근했다. 조용필 씨 부부의 남다른 사랑, 갑작스러운 죽음, 사별에 대한 안타까움… 모든 것들이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하고 그래서 그 소식을 보면서 눈물까지 흘리게 된 것이다.
그런데, 두산중공업 노동자 배달호 씨의 죽음에 대해서는 언론이 어떻게 보도하고 있는가?
단지, 늘 발생하는 산재사고처럼, 단순한 스트레이트 기사로 취급하고 있다. 물론, 이번 배달호 씨 분신자살 사건이 앞으로 두산중공업의 노사관계와 금년의 노동운동의 방향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리라는, 너무나 당연한 기사가 나오기는 했다.
하지만, 배달호 씨가 왜 자살했는지, 50대의 가장인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할 정도로 절박한 처지에 몰린 이유는 무엇인지, 그를 바라보고 있는 가족들의 슬픔은 어느 정도인지, 그의 사람됨은 어떠했는지 등을 보도하는 언론은 하나도 없었다.
상대적으로 진보적이라는 [한겨레신문]조차도 제목으로 ‘배달호’라는 이름을 넣은 적이 없을 정도다. 노동자는 죽어서도 부속품으로 취급되고 있는 것이다.
‘배달호’라는 한 인간이 자신의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죽어갈 때는, 이 땅의 모든 모순이 한꺼번에 그의 목을 조였기 때문이다. 단지 노동조합의 조합원이고, 간부 역할을 했다는 것 때문에, 월급이 가압류 당하고, 감옥에 가야 하는 처참한 현실이 21세기 한국의 모습인 것이다.
그럼에도, 언론에서는 조용필 씨 아내의 죽음에 대해서는 감동적으로 묘사를 하고 있지만, 한 노동자의 죽음에 대해서는 ‘객관적인’ 기술만을 하고 있을 뿐이다.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전태일의 목소리는 이른바 ‘정보사회’라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절대적으로 강조되어야 한다.
수 백만 명의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조건과 저임금, 언제 해고당할 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 ‘빈민’(한겨레21 참고)으로 전락하고 있다.
빈부 격차는 더욱 심하게 벌어지고, 빈곤의 심화는 대를 이어 계속되고 있다.
50만 명에 이르는 외국인 노동자의 처지는 또 어떠한가? 우리나라의 천박한 문화는 바로 ‘천민자본주의’의 문화이기 때문이다.
왜곡된 자본주의가 ‘물질(돈) 만능주의’ 사회를 만들고, 물질 만능이 곧 인간의 소외를 만들고, 빈곤의 격차가 불신과 불안을 만들어내고 있다.
정당한 경제개혁이나 사회개혁조차도 ‘사회주의’로 몰고 가는 이런 천박한 구조 속에서 과연 ‘인간다움’이라는 희망이 있기나 할까?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우리의 삶 전반에 걸쳐 천박하고 역겨운 시스템이 작동하는 것은 대부분 가진 자들에게 책임이 있다.
극단적인 예로, 빈부의 격차가 더욱 심화되고, 빈민 인구가 다수를 차지하고 소수의 가진 자들이 더 많은 부와 권력을 차지한다고 하자.
결국 그렇게 해서 가진 자들이 더 행복할까? 빈민 인구는 저항을 시작할테고, 그렇게 되면 나라가 불안해지고, 폭동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이후의 시나리오는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남미의 현실이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결국 부의 편중은 모두에게 불행한 결과를 가져온다. 북유럽이 잘 사는 이유는 부의 분배에 합의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조작된 이미지만을 보고 살아가고 있다.
방송에서, 신문에서, 심지어는 인터넷에서도,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경우도 있지만, 우리에게 보여지는 많은 것들은 이미 조작되고 왜곡된 이미지들이다.
두 사람의 죽음에 관해서도 언론은 이미지를 조작했다. 연예인의 결혼, 이혼, 사망 등에 관해서는 매주 많은 시간을 투여해 방송을 하고 있다. 시시콜콜하고 잡담만을 해대는 연예계의 뒷이야기며, 아침 방송에서 수다떨기와 신변잡기만을 보여주는 내용들이며, 그 모든 것들이 대중의 관심을 한쪽으로 유도하려는 의도된 내용들인 것이다.
잘 생각해보라. 방송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이 고작 신변잡기와 잡담과 연예인 이야기밖에 없을까?
이런 시스템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 누가 가장 큰 이익을 보는 것일까? 이런 질문을 하면 답은 아주 쉽게 나온다.
가진 자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고, 확대하기 위해 많은 것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한다.
‘자본’은 그 자체로 이미 ‘권력’이다. ‘권력’은 ‘자본’을 획득하기 어렵지만, ‘자본’은 ‘권력’을 획득할 수 있다. 미국의 현재 상황이 바로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두 사람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우리 사회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자본’과 ‘권력’이 두 죽음을 어떻게 갈라놓고 있는지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그 죽음을 바라보면서 한쪽에서는 눈물을 흘리고, 한쪽에서는 무관심으로 지나가버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무의식 속에 조작된 이미지가 심겨져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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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빅투스(invictus)
Out of the night that covers me,
Black as the Pit from pole to pole,
I thank whatever gods may be
For my unconquerable soul.

In the fell clutch of circumstance
I have not winced nor cried aloud.
Under the bludgeonings of chance
My head is bloody, but unbowed.

Beyond this place of wrath and tears
Looms but the Horror of the shade,
And yet the menace of the years
Finds and shall find me unafraid.

It matters not how strait the gate,
How charged with punishments the scroll,
I am the master of my fate:
I am the captain of my soul.

 


나를 감싸고 있는 밤은
온통 칠흑같은 암흑
억누를수 없는 내 영혼에
신들이 무슨 일을 벌일지라도 감사한다

잔인한 환경의 마수에서
난 움츠리거나 소리놓아 울지 않았다.
내려치는 위험속에서
내 머리는 피투성이지만 굽히지 않았다.

분노와 눈물의 이땅을 넘어
어둠의 공포만이 어렴풋하다
그리고 오랜 재앙의 세월이 흘러도
나는 두려움에 떨지 않을 것이다

문이 얼마나 좁은지
아무리 많은 형벌이 날 기다릴지라도 중요치 않다
나는 내 운명의 주인
내 영혼의 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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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 인권연대 특강

 

방금 소개해준 분이 주최측과 나와의 약속이나 협약에 대해 오해를 했는지 강연이라고 했는데, 사실 강연이 아니고 오늘 인권연대 창립 10주년 기념행사에 나오신 많은 인권운동가들을 위해서 격려의 한 마디를 해 주면 좋겠다고 하기에 나도 짧게 격려의 말을 할 생각으로 나온 것이다.

지난 10년 가까이에 내 신병으로 말미암아 일체 집필이나 이런 장소에서의 발언을 중단하고 신병 치료와 요양에만 전념하면서 그 전과 같이 국가와 사회의 현실에 대한 관심도 그렇게 밀접하게, 치열하게, 정열적으로 갖질 않고 일부러 오로지 살아가는 병을 고치는 일에만 전념했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온몸을 던져서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위해서 인간의 인격적 기본 권리인 인권과 현대 사회, 조직사회에 있어서 민권과 공민권에 관련되는 그러한 권리의 범주에 있어서 그런 차원의 이야기들을 구체적으로 소상히 현실감을 가지고 알지는 못한다. 다만 한 국민으로서 시민으로서 가질 수 있는 일반적인 관심에서 보면 여기 오신 연령대 분들의 치열한 지난날의 싸움과 정열적인 의지를 저는 몸으로 뜨겁게 느끼고 있다. 참 용감했고 감사하다.

대체로 지금 여기에 오신 분들이 연령대가 평균적으로 30~40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인권의 사회사적 견지에서 말한다면 여러분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사회의 인권사적 측면에서 제4대에 속해 있는 분들이고, 제3대까지 투쟁해 온 분들이라고 나는 규정하고 있다. 무엇이냐 하면 우리처럼 이승만 시대를 살아온 우리들에게는 그 시기의 인권운동, 인권문제라는 것은 제1세대적인 적대관계였다. 그 이승만 12년 통치하에서 우리는 나름으로 인간다운 권리와 생존을 위한 노력을 했고, 그것이 1세대적인 투쟁이다. 다음은 28년간의 군인독재, 폭력의 시대에서 많은 목숨을 잃어버렸고 인권과 시민으로서의 공민권을 찾기 위해 싸워온 투쟁이 제2기가 될 것이다. 인권을 억압한 그 지배자의 폭력의 내용에도 차이가 있었고 그 폭력적인 권력의 지배를 받는 피지배자로서의 국민과 우리 시민들과 이 땅의 인간들의 생존양식이나 의식에 있어서도 일정한 발전이 있으면서 차이가 있었다. 다행히도 그러한 긴 역사의 인권투쟁을 보면 적지 않은 기간에 이루어진 우리들의 희생과 눈물과 슬픔과 그것을 견뎌온 노력으로 해서 이른바 제3세대라고 할 수 있는 일정한 열매를 거두었다.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시대를 합친 10년 동안이 충분하지는 않고 완전하다기에는 아직도 먼 상태에 있다 하더라도 그 전 30여년 동안의 상태에 비한다면 놀랄 만큼 향상되고 발전하고 훌륭한 열매로서 성숙한 인권의 시기였다. 그러던 것이 이제 지난 1년 반 동안 변화에 의해서 이명박 대통령 통치 시대, 그리고 지배집단의 성격적, 성향적, 정책적, 철학적 차원에서 말한다면 비인간적이고 오로지 물질주의적, 인권이 존재하지 않는, 인권의 존재를 허용하지 않는 그런 파시즘 시대의 초기에 들어서 있다. 제4기가 되겠다. 제1세대로 말하면 이승만 시대에는, 대부분이 모르겠지만, 이 땅에 사는 개개인 개체의 지식과 의식과 감각 속에 인권이라는 범주의 사상이 있지 않았다. 흔히 인권이라는 것을 양도할 수 없는 침해당할 수 없는 최고의 권리라고 공식적으로 교과서적으로 미화하고 그렇게 믿기를 원해서 운동하는 것이지만 소위 그 인권이라는 권리는 역사적인·사회적인 부분이 본래적인 천부의 양도할 수 없는 부분보다 훨씬 많다.

정권에 따라서 지배집단의 성격과 철학과 행동, 이해관계에 따라서 지배받는 개체들, 인간들의 권리의 내용도 차이가 생긴다. 이승만 때 우리는 권리라는 것을 한 가지밖에 규정 못했다. 국가와 국민 사이의 관계에서 파생되는 그런 의무의 정부였다. 병역, 납세의 의무 등 헌법적인 의무이지만 상하의 관계에서 명령과 요구에 복종하는 그것이 사회를 체계적으로 존재하고 운영케하는 그럼으로서 지배체제하에 있는 개개인이 따라야 할 의무로서의 자기 존재, 그것이 정부였다. 그렇지 않고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인권 범주에서의 권리의식은 거의 없었다. 일제하에서 긴 식민지 생활에서 길들여진 박탈된 인간성 탓이기도 하고 정치적 탄압의 결과이기도 하다. 권리적인 측면에서 우리는 인간이 아니었다.

이어서 28년간의 군인들의 폭력하에서 보다 더 노골적이고 보다 더 악질적인 일체의 인간적인 가치와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오로지 히틀러, 무솔리니, 스탈린 밑에서 그들의 지배집단의 요구와 계획과 그들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체제의 명령에 따르는 그런 집단주의적인 토탈리안리즘이 있었다. 인디비주얼 즉, 한 개인으로서의 가치를 일체 인정하지 않는 그런 사회였다. 역시 또 이승만 사회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폭력의 대상으로서의 개인밖에 아니었다. 이승만 때는 그래도 민간통치의 체제였기 때문에 때로 군인 폭력 통치에 비한다면 약간의 느슨한 데도 있었고 어느 정도는 스스로 인간이라는 것을 주장하고자 하는 약간의 여유가 없진 않았다. 그러나 박정희, 전두환에 들어와서는 그것조차 완전히 말살되어 버렸다.

여러분들은 그 시대를 제1, 2세대적 무인권 시대를 경험하지 않은 분들로서 간접적으로 들은 바 많을 것이고 읽기도 했을 것이고 하지만 직접적으로 몸으로 견뎌나가고 그것을 그 폭력을 그 무서운 반인간적인 폭력 밑에서 자기를 인간으로서 꾸준히 보전해 나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얼마나 어려운지 얼마나 고난에 찬 것인가 하는 것을 그 동안 많은 인권 자의식이 있었던 많은 민주화 운동 선배들이 죽어갔고 병신이 되고 한 사실을 생각하면 간접적으로 이해가 갈 것이다. 사실 그 때만 해도 박정희나 전두환 시대에는 나 개인의 경험으로 말한다면 하도 인간성을 박탈당하는 모욕과 치욕과 서러움과 자기환멸과 이런 것들 때문에 육체적 고통을 당하는 것보다 인간을 부정당하는, 너는 인간이 아니다 하는 식의, 인권을 박탈당하기 이전에 인간임을 부정당하는 그런 상태가 지속될 때 비로소 자살한 사람들의 심정을 나의 심정으로 이입해서 생각할 수가 있었다. 아, 이렇게 해서 자살하는구나 하고. 본래 자살하는 사람들이 나에게는 좀 더 의미있는 일을 하고..(죽었으면) 전두환이나 박정희를 권총으로 쏴서.. 일대일로… 그런 생각도 했지만 집단적인 힘으로 자신이 비인간화되면, 인간의 근원적 존재의 본질 자체가 부정을 당할 때는 아 이제 나는 죽어야겠구나 하는 자살의 동기와 자살의 목적과 이런 것들을 나의 것으로 느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나 하는. 여기서는 인권이라는 것은 2차적인 문제가 된다.

그 후 10년 동안 그런 결과로 이루어진 상당히 민주화된 대한민국에서 인권이 본래적인 의미에서의 가치와 중요성과 그 인권이 있어야 할 마땅한 모습과 어떻게 유지해 나갈 것인가 하는 집단적인 개개인의 의욕도 운동도 생겨났다. 비로소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사람들이 인간이 된 것은 지난 10년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승만, 박정희, 노태우 시대에는 이땅의 생을 받아서 생존했던 생명체·개체는 현대적인 인권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 인간이 아니었다. 동물이었다. 다행히도 그 속에서 투쟁한 많은 선구자, 선배들의 목숨의 대가로 지난 10년 동안 우리는 부족하나마 인간다운 개체로서 되살아났고 생존의 가치를 발견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더욱 충실하게 복된 인간으로 만들어 나가기 위해 개인과 우리 사회 전체의 집단적인 사회적인 향상을 위해 노력해 왔다. 그 가운데에 선 사람들이 여러분 중에 상당히 계실 것이다.

그러던 것이 1년 반만에 사회가 또 하나의 역사적 역전의 전환기를 맞이했다. 파시즘의 시대에 들어갔다. 그러길래 역사는 반드시 이루어진 열매 위에 또 하나의 큰 열매가 열리고 이렇게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우리가 정신만 늦추면 언제든지 역전하는 그런 가능성을 내포하면서 진행해 나가는 것이 우리 인류사의 역사이다. 이 이명박 현재 이 정권의 오로지 물질밖에 모르는, 모든 인간을 생존을 지향하고 목적하고 숭배하여야 할 가치는 돈밖에 모르는 그것을 신격화하는 그리고 인간이라는 것의 존재가치가 말살되어 가는, 이러한 체제를 정권을 우리 그 많은 40년의 고생끝에 받아들인 것도 우리 자신들의 책임이다. 우리 자신들이 한 일이다. 우리의 실수이고 개개인의 판단착오이고 역사의식의 잘못이다. 이런 것이 현실화 된 것이다. 누구를 탓할 수가 없다. 정말로 한심한 일이지만 앞으로 이러한 관점에서 이 체제, 이 정권, 이 국가적 이념 그 지배자들의 철학, 이해관계를 우리 개개인의 인권과 한때 10년이지만 짧은 10년이지만 이룩했던 공민으로서의 권리, 인권과 결부해서 되찾기 위한 필사적인 그리고 슬기로운, 불퇴전의 노력이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나는 지금의 일은 아니지만, 그 전의 일이지만,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그리고 사회는 인권이라는 인간 존재의 기본적, 인격적 가치라는 점에서 160년의 낙후된 원시사회로 늘 생각해 왔다. 남한, 우리 한국사회를 160년 전과 같은 민권, 공권, 마땅히 인간답게 누려야 하고 허용되어야 하는 상황이 갖춰져야 할 정부라고 볼 때 160년 전의 낙후된 원시사회라고 본다. 나는 우리 사회를 문화적 사회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난 지금도 대한민국 사회가 문화, 민주, 인권이니 하는 보다 적극적인 의미의 가치를 지닌 집단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심각한 것이 아니다. 아무 재미난 에피소드 때문에 그렇다. 몇 차례 형무소를 들어가면서 나는 젊었을 때부터 1950년대 말부터 영어보다 프랑스어가 나아서 불어소설 읽는 것으로 소일했다. 레미제라블 같은 것들. 그전에도 읽었고 다음에 들어갔을 때도 차입을 해서 읽었는데 두 번째인가 세번째 읽는데 이런 대목이 있었다. 장발장이 코제트라는 소녀와 함께 자베의 추격에 쫓기고 있었다. 장발장을 체포하려고 한 자베르는 그 오랜기간 동안에서 철저하게 체제적, 우익적인 인간이었다. 나름으로 우익적 인텔리전트가 있는 사람이다. 부패하지 않고 타협하지 않고 열심히 하려고 하는 엄격한 법률숭배자. 인간의 눈물이라는 것은 일체 용납할 수 없는, 자기도 자신과 절대 타협하지 않는 우익적인 인간이다. 사실 우익은 비인간적인 철학이고 사상이다. 이 자를 체포하기 위해 온갖 고생을 하고 숨어다니고 어느날 포위망이 좁혀오니까 수녀원에서 코제트의 손을 잡고 수녀원의 높은 담을 넘어서 도망하려고 했다. 도망치다가 파리의 어느 다리 한 중간쯤 오니까 벌써 자베르가 미리 알고서 부하들을 다리 저쪽 끝과 이쪽 끝 양쪽 끝에 배치해놓고 있었다. 장발장과 코제트는 다리에서 갈 곳이 없었다. 강으로 떨어지지 않는 한. 오도가도 못하게 된 상태에서 그대로 끌려가게 된 상태다. 진퇴양난인데. 결국은 눈 앞에서 닥친 것이다. 그리고 심문이 시작됐다. 너 장발장이지. 그러자 장발장은 묵비권 행사하고 아무 말도 안 했다. 부하들은 시간 끌 거 있냐며 체포합시다 라고 자베르에게 말했다. 끌고 가면 우리는 1계급 승진하고 공 세우고 얼마나 좋습니까. 끌고 가려고 하니까 한참 자베르가 생각하더니 가만있으라고 했다. 부하들이 “10여년 온갖 고생을 해서 추격하고 겨우 주머니 속의 쥐 마냥 덜미를 잡았는데 왜 손을 놓으라고 하느냐”고 했다. 자베르를 원망했다. 이제 놓치면 또 얼마나 쫓아다녀야 하나. 자베르는 현대적으로 보면 우익적 철학, 사상, 사회관을 가진 국가에 충실한 인물인데, 인간적 눈물이 없는 사람인데, 사실 좌익도 극단으로 가면 같아지는 것이지만… 그 엄격한 자베르가 쥐를 발톱에 물고 있는 형국인데 놔 주라고 했다. 자베르가 하는 말이.. 거기서 놀랐다. 한국이란 나라. 그 장면이 1830년대 프랑스 현실을 쓴 것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180년 전이 되는 것인데, 내가 그때 읽을 때는 한 160년 전이었다. 자베르가 부하들에게 손을 놓으라, 할 수 없다고 했다. 내가 실수했다며 체포영장을 떼어 오지 않았다고 했다. 체포영장을 받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만약에 체포영장 없이 장발장을 체포해 가면 반드시 파리의 신문들이 굉장히 장발장의 사건 컸으니까 국가범이었으니까 자베르 경시가 10년만에 체포했다고 대서특필할 것이다. 그러면 동시에 영장없이 끌고 왔다, 폭력으로 끌고 왔다고 하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다. 신문기자들이 결국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내가 합법적인 범죄인 체포의 법적 필요수단인 체포영장을 끊지 않고 폭력으로 끌고왔다고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내무장관이 의회에서 그 문제가 되어 불신임안을 당할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내무장관직을 관둬야 할 것이다. 내각이 붕괴할 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해. 그러면서 돌아가자고. 오늘은 돌아가고 내일 영장을 청구해서 받아서 다시 나오자고 했다. 물론 다시 나오면 장발장이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그런 대목이 12줄에 걸쳐 나왔다. 그때 내가 느낀 감동, 쇼크가 말할 수 없었다.

1830년에 불란서에서는 그 국가범, 국가사범과 같은 대사건의 범인 장발장을 10여년 추격끝에 잡았는데 그것을 연행 안 하고 영장 안 가져왔다고 가슴이 터질듯한 생각에도 방면하고 돌아가서 영장을 다시 가져오려고 했다. 그걸 했다면 신문기자가 쓰고 내무장관이 모가지 날아가고, 그럼 의회가 해산할 것이다. 그런, 민주사회에 있어서의 제반절차, 중요한 한 사람의 범인을 체포하는 일, 사실 영장 없이 잡아도 장발장 정도면 눈 감을 수 있을 텐데도 법 절차를 고려해 놓아준 그 대목을 읽으면서 이것이 프랑스 혁명을 거친 프랑스의 법률이고 경찰이고 사회이고 인간존중이고 이 모든 가치관이 거기에 포함되어서 표시되더라 이거다. 그래서 정말 나는 그때 계산하니까 광주형무소에 들어간 것이 영장 없이 끌려간 것이었다. 2년 동안을 형무소 살이를 했다.

2000년도에 가까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헌법에 민주공화국이고 모든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완벽하게 되어있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180년 전 프랑스, 우리가 보기엔 당나라 때의 옛날 얘기 같은데 벌써 프랑스에서는 그러고 있었다는 것. 그래서 인권에 관해서 공민권에 대해서 할 일이 얼마나 많은가 하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한국에 있는 나라는 인간이 얼마나 비인간의 동물의 법적 대우를 받고 있는가. 완전히 인간성을, 자존심을, 자주성을 민주적 독립성을 몽땅 부정 당하고 있는데… 1980년의 대한민국에서… 그러나 180년 전 프랑스에서는 그랬다는 것을 알고 그때 민권, 민주주의의 중요성, 법적질서, 준법정신 등 모든 분야의 인간생존, 인간이 인간다워야 할 민주사회의 공인으로서의 권리를 누리기 위해서 어떡해야 하는 것을 생각했다.

두 가지 인권이 있다. 하나는 공식적으로 주장하는 양도할 수 없는 침범당할 수 없는 권리, 천부의 권리로서 인간으로서 본래는 그렇다는 것. 하지만 역사적, 사회적 권리로서, 집단 체제에서 부여되는, 권리는 천부의 양도할 수 없는 불가침의 권리는 아니다. 그 양면에 있어서 인간 존재적 인격의 근원적 권리로서의 인간의 권리는 일차적으로 물론 당연히 주장해야 하고 보호해야 하고 획득해야 하고 우리가 모두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이 집단적으로 생존하는 과정에서 합의에 의해서, 계약에 의해서 법률에 의해서 주어지는 권리… 사회적, 정치적, 공민적 권리는 반드시 정부에 양도할 수 없는 불가침의 권리는 아니다. 제도에 의해, 역사발전의 단계에 의해서 우리가 쟁취하는 권리다. 그 성격은 차이가 있지만 우리가 그 둘을 다 그 성격을 인식하면서 확보할 때 비로소 우리는 다 갖추어진 인간으로서 민주 시민으로서 생존과 존재가치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여태까지 그렇게 노력해 온, 투쟁해 온 데에 대해서 깊이깊이 감사드리고 험악해진 이 새로운 우리의 현실적 상황 변화 속에서 불굴의 인권정신을 가지고 싸워 줄 것으로 믿는 여러분들의 성공이 있기를 간절히 빌면서 오늘 격려의 인사를 마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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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점심 먹으러 안 갈래?‘

태수가 어깨를 툭 치면서 인상을 쓰기 전까지 동혁은 작업하는 손길을 바쁘게 움직였다. 동혁은 연장을 내려놓고 장갑을 벗었다.

동료들은 벌써 식당을 향해 바쁘게 걷고 있었다. 동혁은 뒤를 돌아보았다.

‘떼제베(TGV)’의 늘씬하고 날렵한 몸매가 아름답게 드러났다. 앞으로 준공될 고속철도 위를 멋지게 달리는 녀석을 생각하면 동혁은 자신도 모르게 기분이 흐믓했다.

‘떼제베‘를 생산하는 거대한 현장 안은 사람의 마음을 미묘하게 만드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것은 최첨단의 과학기지처럼 웅장하고 때로 위대한 창조의 현장처럼 보일 때도 있었지만 마치 구석기 시대의 거대한 공룡 몸 속에 들어 있는 것처럼 현장의 골격들이 낯설어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귀 울리다 못해 가슴속까지 울려 퍼지는 기계의 굉음과 여기 저기 흩어져 저마다 맡은 일에 몰두하고 있는 동료들의 모습은 마치 공룡과 사투를 벌이는 인간들 같았다.

‘너 이번 주 크리스마스 연휴 때 계획있냐?‘

태수가 손가락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며 물었다.

‘계획은 무슨, 특근이나 있으면 몰라두…‘

동혁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짜식이…노총각이 데이트할 생각은 안하고 만날 일이나 하냐? 너 그렇게 벌어서 어디 쓰려고 그래? 사람들이 널보고 짠돌이라고 하더라.‘

‘쓰긴, 그냥 일이나 하는 거지…연말이라고 달라질 게 있나…‘

두 사람은 식당으로 이어진 긴 줄을 따라 들어갔다. 식당 안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사람들의 작은 말소리가 모여 웅성거리고 식판과 수저가 움직이는 소리, 잔반통에 부딪치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동혁과 태수가 식판을 들고 자리에 앉아 점심을 먹고 있을 때, 건너편 자리에 앉아 있던 여직원이 눈에 보였다. 여직원 서너 명이 모여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동혁은 한 여직원을 발견하더니 손을 흔들어 보였다.

여직원은 손을 흔드는 동혁을 보고는 흥!하는 콧김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동혁은 무안하지도 않은지 싱글싱글 웃었다.

‘마, 너 아직도 경옥 씨를 못잡았냐? 하긴, 너같이 무능력한 인간을 경옥씨가 좋아할 턱이 없지.‘

태수가 눈치를 채고 동혁에게 타박을 주었지만 동혁은 그러거나 말거나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경옥도 동혁이 훔쳐보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태연히 식사를 하고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식당 문을 나서던 동혁은 게시판에 붙어 있는 안내문에 눈길이 갔다. 여직원 모임에서 붙인 그 안내문에는 25일 성탄절에 고아원과 양로원을 방문할 계획과 성금을 모금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동혁은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경옥에게 다가갔다. 경옥은 약간 경계를 하는 표정이었지만 싫어하는 것같지는 않았다.

‘저…경옥 씨…‘

망설이는 동혁을 보자 경옥은 눈을 곱게 흘겼다.

‘이번 주 연휴 때 만날 수 있을까요?……‘

‘바빠서 안되겠는데요. 여직원 모임에서 할 일이 있거든요.‘

‘아, 네…그러시군요. 그렇다면 할 수 없죠…‘

동혁은 기운빠진 표정으로 어슬렁거리며 식당 앞을 떠났다. 경옥은 그런 동혁의 뒷모습을 보면서 왠지 마음이 서운했다. 동혁은 집요하지는 않지만 은근하게 경옥을 마음에 두고 있었고 그런 동혁이 싫지는 않았지만 선뜻 마음이 끌리는 것도 아니었다.

동혁과 한 두 번 데이트를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동혁이 보여준 모습에서 실망이 컸기 때문에 마음이 내키지 않았던 거였다. 동혁은 경옥과 함께 식사를 하거나 영화를 볼 때도 돈이 아까워서 어쩔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경옥은 그런 동혁이 좀스럽게 느껴졌었다.

며칠 후, 여직원 모임에서 고아원을 찾아가던 날에 눈이 내렸다. 풍성한 눈송이가 온통 하얗게 세상을 뒤덮고 있었고 반갑게 맞이하는 아이들의 맑은 눈망울을 보면서 경옥은 참 잘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은 신나서 경옥과 그 동료들을 둘러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한 아이의 ‘큰 형 왔다!‘하는 고함소리와 함께 경옥을 둘러쌌던 아이들이 우르르 밖으로 몰려 나갔다.

경옥은 창문으로 누가 왔는지 내다보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곳에는 봉고 차에서 막 내리는 동혁과 그의 동료들이 있었다. 봉고 차에는 아이들 옷이며 책, 필기구, 노트 등이 들어 있는 상자가 실려 있었다.

동혁은 기타를 어깨에 둘러메고 몰려드는 아이들과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동혁은 고아원 아이들과 가족처럼 가까워 보였다.

동혁은 경옥을 향해 환한 웃음을 보였다. 경옥은 그 웃음이 목화송이처럼 탐스럽고 마음속에서 훈훈하게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리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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