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24시간 어떻게 살 것인가
아널드 베넷 지음, 이은순 옮김 / 범우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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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나의 일상에 조금씩 활기가 돋고있다. 남들이 느낄 정도는 아니고, 내 스스로 돌아봤을 때 그런 기분이 든다는 뜻이다.  혼자서 무언가를 하고 있는 시간이 축적되어 감에 따라 그런 느낌은 짙어진다. 최근 나에게 그런 활력소가 되어 준 것은 다시 시작한 수능 공부다. 두 번이나 봤지만, 열심히 공부하지 않은 상태에서 본 터라 결과가 좋지 않았다. 제대로 도전해 보지 않았다는 생각에 한번 더 용기를 냈다. 하지만 혼자서 하는 공부라 큰 자극이 없어서인지 번번히 내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고 말았다. 지인의 충고에 따라 블로그에 하루 공부에 대한 후기를 남기면서부터 자신감이 생겼고, 많은 분들의 격려 가운데 힘을 얻고 있어 살아 있다는 기분이 드는 요즘이다.

 

  이런 기분을 느끼게 된 시간은 정말 얼마 되지 않지만, 그 전의 생활을 돌아봤을 때 괜찮은 하루를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책에 관심이 많아 온통 책에 짓눌린 나날을 보내다보니, 역효과를 일으키고 있는 일상의 연속이었다. 책을 좋아하지만, 리뷰를 쓰는 일이나 쌓여가는 책을 바라보는 일에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다. 물론 내 스스로 즐거워서 하는 일이었고, 앞으로도 멈출 생각은 없다. 하지만 온통 책에만 쏠려 있는 시간들 속에 나를 돌아볼 여유가 줄어 들고 있었다. 즐거운 자세로 임하고 있으면서도 무언가가 부족한 느낌. 그 느낌을 내버려둘 수 없어 시작한 공부였는데, 뜻 밖의 효과를 나타내고 있었다.

 

  이렇게 나의 작은 변화에 대해서 장황하게 늘어 놓는 것은 <하루 24시간 어떻게 살 것인가>란 책의 가치를 말하기 위함이다. 지인에게 이 책을 선물 받았을 때는 공부를 시작하기 전이었고, 책에 치이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던 시기였다. 그랬으니 더더욱 이 책이 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흔히 보아온 자계서나 처세서로 치부하고 들여다 보는 것 조차 귀찮았다. 심지어 이 책을 읽으면서도 나의 예상을 뛰어넘어 주지 못하는 책 내용에 실망하고 있었다. 책을 사준 지인에게 그런 푸념을 해대자 '무척 철학적인 책이니 꼼꼼히 읽어 보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샐쭉한 표정을 감추지 않으며 대충 눈으로 읽어 나가고 있었는데, 현재의 나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부분이 많아 결국은 메모지를 덕지덕지 붙이며 읽고 말았다.

 

  이 책의 무엇이 나의 현재를 드러내고 있었다는 것일까. 앞에서 장황하게 늘어 놓았던 내 일상의 작은 변화였다.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나의 독서생활의 염증을 새로운 목표로 전환을 시킨 일. 그 일이 주는 파급효과를 알아가고 있는 나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모두에게 주어진 24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식상했다. 그러나 내가 오랫동안 시도하지 못하고 미적거리던 부분을 유머스러우면서도 가볍게, 그러면서도 충분한 메세지를 전해 주고 있었다. 일상의 변화를 느끼지 못한 상태에서 읽었더라면 지나쳤을 책이다. 인간은 완전하지 못하기에 자신이 경험한 후에야 깨달음을 얻는 경우가 많다. 나같이 평범한 인간에게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런 이들을 위해 좀더 빠른 깨달음을 제시해 주는 책들이 널려 있음에도 깨닫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기분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책을 만났으니 기분이 묘해지는 것은 당연했다.

 

  모두에게 주어진 24시간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각자의 일상은 너무나도 각양각생이라 똑같이 주어진 조건은 별 의미가 없어 보였다. 이 책의 주요대상은 하루의 1/3 이상을 회사에서 보내고 지쳐서 집으로 돌아가는 직장인이었다. 퇴근 후의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의 화두가 주류다. 그렇지만 꼭 회사원들에게 국한된 제안은 아니고, 모든 사람들이 편하게 읽으며 자신의 상황에 대입시켜 볼 수 있는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5분의 효과, 무언가에 투자할 수 있는 시간 만들기, 여러가지의 방법 제시를 통해 일상에서 충분히 시간을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특별한 내용도 아니고, 어려운 것도 아니였기에 더 지나치기 쉬운 내용들이 내가 직접 겪고 있으니 더 감격적으로 다가왔다.

 

  요즘 내 머릿속에 자주 떠오르는 생각은 어떠한 결과는 하루아침에 뚝딱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기적은 하루하루 쌓아가는 노력의 축적에 따라 나타난다는 것. 생각에만 그치다 겨우 행동으로 시도해 본 나에게 가벼우면서도 깊이 있는 말들은 많은 공감을 할 수 있었다. 거기다 문학을 즐기라는 충고는 '독서'의 시간을 줄인 나에게 보상을 해 주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좀더 도약할 수 있는 자신을 만들기 위해 시간을 효율적으로 써보라는 제안. 절대 불가능 한 것들이 아니고, 충분히 할 수 있는 것들이다. 습관을 바꾸고 생각을 바꾼다는 사실이 쉽지는 않지만, 조그만 변화를 시도해 봄으로써 갖게 되는 뿌듯함은 분명 남다를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직 시작 단계에 불과하지만 그 느낌을 조금 알고 있기에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처지와 스타일에 맞게 충고에 따라 시간 조율을 한다면 '살아있다'라는 기분이 들 것이다. 능력이 부족해 이 책이 주는 메세지를 충분히 전하지 못했지만, 현재의 자신에게 염증을 느끼고 있다면 이 책을 통해 작은 시작을 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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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을 기다리며
츠지 히토나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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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츠지 히토나리의 작품을 많이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그를 연애소설 작가로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이 소설도 비슷한 분위기일거라 생각했다. 책이 좀 두꺼웠지만, 흡인력 있는 소설을 쓰는 작가이기에 금방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책을 읽어나가는 시간은 무척 더뎠고, 지금껏 만나온 그의 소설과 다른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이 소설로 인해 그에게 붙은 만능 엔터테이너라는 수식어를 부정할 수 없었을 뿐, 오랜만에 일본소설을 폄하하지 않으며 읽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일본 현대 소설은 가볍고, 남는게 없다는 인식이 깊이 뿌리 박혀 있기에 지극히 편안한 마음으로 책장을 열었다. 최근에 읽은 일본소설도 그런 인식을 깨트려주지 못해 책을 대하는 나의 시선은 좀 시들했다. 얼른 읽어버리자라는 마음만 팽배했던 내게 <태양을 기다리며>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소설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내용이 묵직하거나 잘 읽히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가볍다고 할 수도 없지만, 쉽게 넘겨버릴 수 없는 장면의 연속이었다. 소설이라기 보다 영화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은,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가 장면을 전환하는 것처럼 이어진 탓이었다. 전쟁 중인 중국의 난징, 원자폭탄이 떨어지기 전의 히로시마, 뇌사 상태인 사람에게 펼쳐지는 세계 등등 시대과 공간을 초월한 세계로 독자를 이끌었다.

 

  이야기의 조각을 잘 맞춰나가는 저자의 이끔을 따라가다 보면, 현재의 나를 잊게 된다. 한 권의 책속에 펼쳐지는 다양한 시대와 상황들은 나를 챙길 겨를도 없이 흘러갔고, 상황에 따라 이동하기 바빴다. 책의 시작은 영화 촬영 현장부터 시작된다. 천 명의 엑스트라와 감독, 스탭들이 촬영하기 적절한 태양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쟁을 다룬 영화였고, 이노우에 감독은 이 작품이 마지막 작품이 될 정도로 노쇠했다. 하지만 깐깐한 일처리 탓에 벌써 2주 째 맘에 드는 태양이 나타나지 않아 모두들 제작비만 까먹고 있는 상황이었다. 미술부 담당인 시로와 혼수상태에 빠진 형의 옛 애인이자 스크립터인 도모코가 그나마 이노우에 감독을 이해하고 있는 정도였다. 

 

  시로의 형 지로는 혼수상태에 빠져있다. 마약을 밀매하던 형은 공원에서 총을 맞았고 여지껏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로는 총을 맞기 전, 위험한 일에 몸담았던 듯 시로에게 계속 협박 전화가 걸려왔다. 자꾸 란도셀(에도시대 일본을 방문했던 네덜란드 군인의 군장 가방 란셀(Rancel)을 보고 제작하면서 유래된 일본의 어린이용 책가방)을 돌려 달라는 후지사와라는 남자의 전화는 끈질겼다. 형의 혼수상태만 해도 시로의 마음은 갈피를 잡을 수 없는데, 느닷없는 한 남자의 전화가 반가울 리 없었다. 형이 일방적으로 이별을 고한 도모코에 대한 묘한 마음도, 영화촬영의 진전 없는 압박감도 벅차오르는데 그에겐 다른 사람들의 과거가 끊이질 않는다.

 

  시로의 현실을 제외하고 이 책에서 거듭되어지는 이야기는 많다. 이노우에 감독이 잊지 못하는 '훼이팡'이라는 여성의 이야기, 자신을 협박한 후지사와의 이야기, 후지사와의 아버지인 '크레이크 부샤르의 수기', 혼수상태에 빠진 지로의 세계 등 이야기의 갈래와 연결은 계속 이어진다. 이노우에 감독은 1937년 난징에서 보았던 태양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 기억의 이면에는 '훼이팡'이라는 사랑하는 여성과 '난징 대학살'이 있었다. 후지사와는 미군 파일럿인 크레이크 부샤르와 간호사였던 레이코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였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폭으로 사망하기 전까지의 기록이 담긴 이야기가 '크레이크 부샤르의 수기'였고, 유일한 부모의 흔적인 셈이었다. 독특한 외모 때문에 더욱 더 외로운 삶을 살아온 그는 마약 밀매범이긴 하지만, '란도셀'의 행방을 찾기 위해 시로와 만나 자신의 삶과 아버지의 삶에 대해서 모두 들려준다. 혼수상태에 빠진 지로는 좀더 광범위한 세계에 머물러 있었다. 란도셀을 메고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책 속의 시대를 거리낌없이 이동하는 인물이다. 지로의 행동반경으로 인해 잠시 헷갈리기도 했지만, 이야기를 교묘하게 엮어주는 지로의 등장은 보통 사람이 닿을 수 없는 세계였다.

 

  이노우에 감독이 난징에서 보았던 전쟁의 참혹함과 훼이팡에 대한 기억, 크레이크 부샤르의 수기, 지로를 잊지 못하는 도모코의 내면에는 모두 '사랑'이 있었다. 현실의 안락함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전쟁 속의 두 남자는 너무 처절했다. 사랑의 광기로 점철되다 비극으로 끝나는 훼이팡의 이야기는 감독이 평생 지고 온 죄책감이었다. 원자폭탄을 떨어뜨리는 임무로 왔지만 부상을 당하고 원자폭탄에 의해 죽게 되는 크레이크 부샤르는 어떤가. 자신의 죽음을 알고 있고, 한 여성을 사랑하는 마음과 자신의 씨를 남기고 싶어하는 마음은 수기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후지사와는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아버지의 흔적을 발견하고, 아버지의 부탁을 위해 뉴욕으로 날아가지만 '수기'를 통해 아버지의 내면을 들여다본 탓인지 일련의 과정들이 마음 아팠다. 혼수상태에 빠진 지로의 기억 때문에 시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도모코도 사랑의 기억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시로는 후지사와가 찾는 '란도셀'을 추적하다 형이 훔쳐낸 것이 '루즈 마이 메모리'라는 기억을 없애주는 신종 마약이라는 사실을 알게된다. 시로가 그 마약을 훔쳐냈기에, 시로도 모르는 곳에 감춰뒀기에 후지사와는 난처한 입장에 빠졌고 그 수 많은 이야기가 어떤 결말을 만들어낼지 무척 궁금했다. 퍼즐을 맞춰나가듯 끝을 향해가는 그들의 이야기는 순탄(?)했다고 해야 하나. 모두들 제자리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훼이팡도, 크레이크 부샤르도, 혼수상태에 빠진 지로도 자신의 세계로 돌아간다. 이미 돌아가 있는 그들의 세계를 탐험한 듯한 꿰어맞춤을 읽었을지는 몰라도 여러 시대를 넘나드는 대장정은 그렇게 끝이 났다. 결코 지워버릴 수 없는 기억을 간직한 채(루즈 마이 메모리를 자신의 의지와 달리 복용하게 된 이노우에 감독의 기억은 어떨런지.).

 

  그제서야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온 것 같다. 이미 흘러버린 과거도, 흘러가고 있는 현재도 사람들의 기억속에 잠재해 있지만, 복잡한 길을 통해 제자리로 돌아온 느낌이다. 이노우에 감독이 그토록 찾아 헤메던 새로운 태양이 솟았으므로 그 빛을 향해 나아갔으면 한다. 기억을 가진 모든 이들에게 태양의 빛이 따스하게 비춰지길. 아픈 기억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현실이라도 꿋꿋하게 미래를 향해 나아가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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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owcat in Paris 파리의 스노우캣
권윤주 지음 / 안그라픽스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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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라는 단어를 보면 설레임이 드는 것보다 먼저 피하고 싶어진다. 너무나 유명한 도시이기에, 대리만족을 느끼려는 갈망보다 가보지 못한 질투심이 먼저 인다. 어리석은 마음이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유명한 도시를 대하는 나의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그 밑바탕에는 가보고 싶다는 욕망이 가장 크겠지만, 질투심에 눈이 먼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이 책을 살까말까 고민을 많이 했다. 스노우캣의 다른 버전을 즐겁게 읽었지만 '파리'라는 제목 때문에 경계심이 인 것이다. 결국 스노우캣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고 구입했는데 참 잘샀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곱지 못한 마음을 철저히 부숴준 파리의 스노우캣은 멋졌다. 거기다 대리만족도 최고였다.
 

  '파리'에 대해서 아는 것은 여기저기서 들은 풍월밖에 없지만, 그 거리를 누벼보고 싶다는 생각은 간절하다. 두려움 때문에 혹은 금전적인 이유 때문에 선뜻 가볼 수 없는 곳이 어디 파리 뿐이겠냐만은, 약 4개월 동안 파리에 머문 저자가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계획에 없던 일정을 늘려 버리는 바람에 금전적인 부담감이 상당했다는 저자 앞에서도 부러움은 자꾸만 커져가고 있었다. 유명 도시에 대한 여행책을 보면서 거부감이 드는 것은, 많은 것을 알리기 위해 꼼꼼하게 기록해가지 못한 글과 시각을 현혹하는 시각 때문이었다. 단기적인 체류도 이유가 될 수 있겠지만 그런 조건으로 보자면 스노우캣의 여행도 그런 면이 다분하다. 이 책을 여행책이라고 볼 수 있을까. 사진이 실린 것도 아니고, 세세한 글이 실린 것도 아닌 그림으로 채워지고 짧막한 글이 실린 책. 그러나 지금껏 만난 어떤 여행책들보다 훨씬 좋았노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을 통해 바라본 파리의 무엇이 그토록 좋았을까. 더군다나 다른 책에서 보아온 파리의 모습을 통해 많은 장소는 낯이 익었는데. 아무래도 파리의 모습을 독특하게 그려낸 저자의 시선이 아니였을까. 사진의 생생함도, 파리의 적나라함도 없었지만 저자가 보고 있는 파리의 모습은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소소함. 지극히 개인적인 시선으로 담아낸 파리와, 일상에서 일어나는 작은 일들의 조화가 적절했다. 파리의 많은 곳을 겉핥기보다 적지만 몇몇 곳에 정을 담뿍 뿌려놓은 저자의 동선이 좋았다. 카페 이름이나 거리의 이름을 말해주어도 어차피 기억을 못하니 그림과 짧은 글을 통해 드러나는 소소함이 대리만족을 시켜주었다. 카페의 나라라고 할만큼 넘쳐나는 카페는 분위기 좋은 곳이 많았으므로, 그곳에 앉아 맛있는 커피를 마시는 저자만 바라봐도 행복했다. 파리의 유명한 곳을 구경하는 것보다 자신의 흔적을 조금씩 흘려놓는 모습이 더 아련하게 다가왔다.

 

  파리라는 도시의 특징 때문일까. 저자가 경험한 것들을 글과 그림으로 풀어낼때마다 느끼는 감정은 예술적인 감각이 철철 넘친다는 것이었다. 카페에만 앉아만 있어도 보이는 풍경이 그랬고, 거리 곳곳마다 사람들의 퍼포먼스가 그랬다. 예술의 도시답게 즐비한 예술적 공간들은 거리에도 넘쳐났다. 거대한 미술관안의 그림들도 좋았지만, 거리에서 마주치는 이름없는 예술가들의 흔적을 만날때마다 도시가 뿜어내는 열기가 벅찼다. 그 거리를 배회하는 저자가 부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사랑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내가 혼자서 저런 거리를 걷는다면 느꼈을 고뇌와 걱정들까지도 유쾌하게 보여주었기에 되려 위로가 되기도 했다. 직접 가보지 않고도 마냥 부러워하는 마음만 들지 않는 과정이 소중했다. 거리의 작은 구석을 누빈 발품이 느껴졌고, 그랬기에 더 애착이 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꿈꾸는 일상이 파리에서 그대로 드러났기에, 저자의 많은 고충은 드러나지 않았더라도 그런 꿈을 직접 꿔보고 싶었다.

 

  저자가 파리에서 경험 중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키스 자렛과 팻 매쓰니의 공연 후기였다. 공연관람을 특히 좋아하는 나로써는 눈이 확 떠지지 않을 수 없었다. 내한공연에 기댈 수 밖에 없는 나에게 파리에서 본 그들의 공연은 그냥 그 자체만으로도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키스자렛의 음반이 달랑 두장 밖에 없지만, 른 콘서트 음반은 정말 좋아한다. 그런데 그의 공연을 직접 보다니, 너무너무 부러웠다. 팻 매쓰니의 공연은 좀더 특별했다. 그의 공연 때문에 여행 일정을 연장한 것이나, 표를 구입할 때 그 사실을 들먹이며 좋은 자리를 찾아낸 것이나 그의 공연을 보고 사인을 받았던 일들. 저자가 느꼈을 뿌듯함이 어땠을지 아주 조금은 알 것 같다. 파리에서 그런 좋은 공연을 두 번이나 보다니. 정말 자신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책을 덮고나니 파리의 거리거리의 생생함이 나를 짓눌렀다. 그 짓눌림은 직접 경험하고 싶다는 무작정의 욕망이 아닌, 한 사람이 체험한 파리의 경험담이 이렇게 가슴 벅차게 다가올 수 있는지에 대한 기쁨이었다. 책을 안고 자면 행복한 꿈을 꿀 것 같은 뿌듯함이 나의 내면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다 책의 거의 마지막에 나왔던 팻 매쓰니의 공연을 되새기다보니, 어디서 많이 들어본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그를 잘 모르지만, 낯이 익다는 느낌에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는데 순간 내 음반꽃이에 그의 음반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다를까 음반꽂이를 정신없이 뒤져보니 그의 음반이 한 장 나왔다. 맙소사! 예전에 재즈를 좋아하는 지인으로부터 선물 받은 음반이었다. 한 두번 듣고 그대로 음반꽃이에 넣어 두었는데, 이 책을 통해서 다시 한 번 환기시킨 것이다. 그런 연결이 너무 뜻밖이기도 했지만, 짜릿했기에 음반을 꺼내 들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혼자 들을 때는 별 감흥이 없더니, 누군가의 경험이 곁들어 지니 음악이 다르게 들렸다. 헤드폰으로 듣는 음악이지만, 눈을 감으면 파리의 공연장이 떠오를 듯한 기분. 팻 매쓰니의 음악을 들으며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의 나는 무척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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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양피지 - 캅베드
헤르메스 김 지음 / 살림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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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문득 내가 원하는 것을 다 이룰 수 있는 비밀을 알게 된다면 무엇을 가장 먼저 원하게 될까. 물질? 명예? 아름다움? 아니면 오랫동안 갈망해왔던 소망이나 꿈을 가지려 할까. 그런 상상보다는 그런게 세상에 어디 있냐는 의심부터 하게 될 것이다. 그만큼 현실적이기도 하지만, 무언가를 이루려는 소망은 철저히 현실에 가려져 있기도 하다. 세상엔 공짜가 없다, 노력없인 대가가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에 사람들은 현혹되지 않는다. 나도 마찬가지다. 정말 쉬운 방법으로 비밀을 얻을 수 있다면 사람들은 더 의심을 하게 될 것이고, 비밀에 또 다른 노력이 숨겨 있다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지나쳐 버릴 것이 뻔하다.
 

  성지순례 중이던 터키 이즈미르 항에서 한 노인을 만난 중년 사내를 보는 시선은이 진부할 수 밖에 없었다. 대뜸 세상에서 원하는 것을 다 얻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겠다는 노인의 말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행색도 이상하고, 자식을 잃어버린 사실에 넋을 놓은 노인에게 그런 비밀이 있다고 믿기가 힘들었다. 해변에서 위기에 처한 노인(아리)을 도와줬지만, 그 댓가로 큰 비밀을 알려주려 하는 노인 앞에서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까. 노인은 자신이 세계적인 억만장자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 오나시스라고 했다. 그런 인물이 초라한 행색으로 자신 앞에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아리는 자신의 삶을 모두 이야기 하며, 자신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50년 전 한 랍비로부터 받은 양피지 때문이라고 했다. 그 양피지에는 성공의 비밀이 담겨 있었고, 양피지에 적힌 내용대로 한다면 어느 누구도 뜻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고 했다.

 

  아리가 들려준 이야기는 놀라웠다. 전쟁 중에 헤메던 17살의 소년이 세계의 거부가 되어가는 얘기는 흥미진진했다. 양피지에 적힌 내용을 그대로 따른(일일이 행동을 가르쳤단 말이 아니다. 아리 자신의 노력이 분명 있어야 했다.) 그에게 많은 성공이 따라왔고,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는 인물로 성장했다. 자유분방하고, 호탕한 그리스인 기질을 그대로 닮은 아리의 인생은 그의 이름에서 추측할 수 있듯이 그리스 신화적인 면모도 띄었다. 저자는 아리의 등장부터 양피지의 내용까지 철학과 신학, 역사의 꿰어맞춤이 뒤섞인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아리의 인생과 버무러진 다양한 이야기는 사실적이면서 신비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자기계발, 성공처세, 경제경영 등 다양한 장르로 이 책을 분류할 수 있을지 몰라도, 한 편의 소설이라고 봐도 무관할 정도의 흡인력을 뿜어냈다. 그만큼 아리가 지나온 삶은 범상치 않았고, 양피지의 비밀이 그대로 드러고 있었다.

 

  그러나 말년의 아리는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는 불행하고 무언가 크게 후회하고 있다. 아리는 양피지의 비밀을 가르쳐준다는 말과 함께, 자기가 한 실수를 되풀이 하지 말라는 충고를 했었다. 양피지에는 성공의 비밀이 숨겨 있긴 하지만, 그만큼 위험하단 뜻일까. 무엇을 어떻게 했길래 아리는 깊은 후회와 아픔이 서려있는 초라한 모습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것일까. 아리는 자신의 아들의 죽음에 깊은 슬픔과 회한을 토로했다. 그의 아들은 왜 죽었으며 양피지에 적힌 내용은 무엇일까. 궁금증이 일어 순식간에 아리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지만, 양피지의 내용은 특별한 내용이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나 평범해서 지나칠 수 밖에 없는 내용이었고, 아리의 성공가도를 달리는 인생에 빠져 중요한 메세지를 놓칠 정도였다.

 

  양피지의 주된 키워드는 공경이었다.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을 공경하고 귀기울이면 그것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그것의 소망을 이루게끔 도와 기쁨을 주면 그로부터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아리가 어려움에 처할때마다 양피지 '캅베드'의 가르침은 시기적절하게 방법을 제시해 주었다. 세계적인 거부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아름다운 여인들과 함께 사업가로 이름을 날릴 수 있었던 것도 캅베드 덕분이었다. 아리는 그런 캅베드의 뜻에 순종했고, 자신의 성공이 그 안에서 나왔다고 생각했다. 그가 세계의 유명인물들과 얽히며, 역사의 한가운데 존재했던 순간들을 지켜보는 것이 충분한 증거가 되었다. 그는 캅베드의 메세지를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는 것에 안타까워 했다. 그러나 그가 캅베드의 격언중에서 꼭 하나 실천하지 않은 것이 있었으니 바로 신을 공경하지 않은 것이었다. 성공에 성공을 거듭한 그는 장애물을 느끼지 못했고, 마치 신이 된 듯한 착각에 빠져 신을 공경할 필성을 느끼지 못했다.

 

  또, 아리가 제대로 이루지 못한 것은 가정이었다. 진정한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었고, 가정에 대한 따뜻한 경험이 없었기에 아리는 하나의 사업체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호화 유람선에 가정을 꾸릴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해도 되는 것이 줄 알았다. 사업상 하게 된 결혼이었기에 태어난 아이들에게 따뜻한 가정을 보여주지 못했다. 아이들은 끔찍한 어린시절을 보냈고 삐뚤어져갔다. 그리고 큰 아들은 비행기 사고로 죽어 버렸다. 아들을 잃고 나서야 아리는 캅베드를 얼마나 잘못 사용해 왔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을 도와준 중년 남성에게  자신과 같은 실수는 되풀이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나는 아리의 얘기를 통해 캅베드의 메세지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이룰 것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떤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하는지 모두 보아왔다. 자계서로 읽는다면 식상하게 줄줄이 늘어놓지 않아서 좋았고, 경영서로의 가르침도 어느정도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거기다 저자가 갖춰놓은 아리의 인생은 문학적인 기질도 다분했다.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꼼꼼한 자료조사를 바탕으로 씌여진 내용이 그랬다. 하지만  마지막 반전은 당황스러웠다. 캅베드를 받은 인물은 누구이며, 그 이후로 어떠한 삶을 살게 되었을지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는 가운데, 중년의 사내는 우리가 익히 아는 빌 게이츠치의 아버지로 설정된다. 빌 게이츠는 아리가 밟았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고 캅베드의 지혜를 적절히 사용한 인물로 쓰이기에 충분했다. 아리가 하지 못했던 신을 기쁘게 하는 일.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눠줄 수 있는 교만을 키우지 않는 일을 한 모델이었다.

 

  독자에게 좀더 현실성을 갖게 하기 위해서 미묘하게 이야기와 이야기를 엮은 것일지는 몰라도, 조금 더 결말이 자연스러웠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캅베드의 가르침에 충실한 인물의 등장에 우리가 익히 아는 사람이라는 친숙함도 있었지만, 더 많은 가능성을 품기보다 한정된 시각에 갖히고 말았다. 독자들을 위해 남겨둔 또다른 가능성인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예도 있으니, 더 멋진 꿈을 이뤄보라는 무언의 남겨짐 같은 것. 어쩌면 한 편의 실재같은 소설 속의 주인공이 얼마든지 내가 될 수 있다는 메세지 인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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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중지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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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뜻한 침대에서 책을 읽다 스르르 잠드는 것은 나의 소소한 행복 중 하나다. 그렇게 잠이 들었다 깨면, 다시 책을 집어 들고 읽는 기쁨이야말로 애서가들이 좋아하는 일상이 아닐까. 그런 행복에 경계를 주는 일은 책이 너무 지루해서 잠이 든 경우다. 애석하게도 <죽음의 중지>가 그랬다. <눈 먼 자들의 도시>로 단번에 각인된 저자였기에 신간이 나왔다는 소식에 냉큼 집어 들었지만, 이런 불명예를 안고 말았다. 이번에는 어떠한 세계로 독자를 이끌 것인지 궁금했건만, 소설은 초반부터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다음 날, 아무도 죽지 않았다......'로 시작한 첫 문장은 강렬했지만, 딱딱한 문체와 대화를 구분하지 않은 경계는 나를 지루하게 만들었다.

 

  첫 문장은 말 그대로였다. 새해를 알리는 종이 친 순간부터 죽음은 사람들에게 오지 않았다. 이 일은 한 나라를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곧바로 수 많은 문제를 야기시켰다. 교통사고를 당해도 죽지 않았고,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사람에게도 생명이 유지되었다. 전국에서 단 한명의 사망자도 나오지 않은 사태에 어리둥절 했지만, 현실의 문제를 잊어서는 안되었다. 죽음이 오지 않은 것은 자연의 생리를 거스르는 일이었고, 원활함이 제약되는 것은 곧 혼란을 뜻했다. 사망자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가장 큰 혼란을 맞이할 곳은 어디일까.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곳, 병원과 장례협회였다. 병원은 공급이 넘쳤고, 장례협회에는 수요의 부족으로 생계를 위협당했다. 또한 교회의 입장도 편치 않았다. 죽음이 있어야 부활이 있고 신의 존재가 자연스러워 지는데, 죽음이 없는 세상은 신이 존재하기에 거북스러운 곳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사망자가 나타나지 않는 나라. 그 나라의 혼란을 짐작하지 못하다가 하나씩 문제가 불거져 나오자 내 머리속은 엄청난 혼란이 일었다. 그 나라를 어떻게 상상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온통 뒤죽박죽 되어버린 상상의 나라는 책을 읽어감에 따라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어지럽혀지고 부서지고 있었다. 병원과 교회, 장례협회의 혼란은 일부분일 뿐이었다. 그 외의 상황이 어떠한지 알고 싶지 않았지만, 저자는 일일이 기록하길 거부했다. 나라일을 맡고 있는 몇몇 인물들과 가장 큰 혼란을 맞이하고 있는 몇몇 기관의 대표자들의 심경으로도 충분한지, 제 멋대로 뻗어가는 상상의 나래를 잠시 차단시켜 주었다. 하지만 그 차단이 유쾌할 리가 없다. 전국을 돌며 혼란을 목격할 필요도 없이 나라의 대표격들이 맞고 있는 현실만 바라봐도 참담함이 느껴졌다. 여기저기서 생각지 못한 복병들이 문제를 일으켰지만, 어디서부터 잘못 된 것인지 바로잡을 수가 없었다. 왜 죽음이 사람들에게 오지 않는지, 어떻게 손을 써야 다시 원활한 자연의 생리를 따를 수 있을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죽음에서 비켜가 있는 혼란의 대국에 작지만 변화를 일이킬 만한 일이 일어난다. 죽음을 앞둔 한 노인은 이렇게 버티는 삶이 정상적인 것이 아님을 판단하고, 자신을 국경으로 데려가 달라고 말한다. 국경 너머는 여전히 죽음이 존재했고, 그 방법이야말로 작은 돌파구를 제시하는 일인 것 같았다. 노인의 가족은 아버지와 아픈 손자를 함께 국경에 묻고 돌아온다. 국경을 넘는 순간 생명은 꺼져버렸기에 슬픔을 느낄 겨를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 일은 순식간에 퍼졌고, 목숨만 붙이고 있는 가족을 그런 식으로 처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방법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시켰다. 먼저 사람들의 양심을 찔러댔고, 주변 국가의 불만을 샀으며, 그 일을 처리해주는 마피아의 손길이 닿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럼에도 그런 식으로 행해진 죽음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아 이전의 공급처럼 원활한 죽음을 마련해주지 못했다.

 

  영원할 것만 같던 죽음이 없는 나라. 그런 나라가 과연 지속될 수 있을까. 혼란에 빠진 나라, 혼란에 빠진 독자를 구원(?)하듯 죽음은 이내 다시 찾아왔다. 몇 달간의 죽음의 중지에서 다시 죽음이 재계될 것이라는 경고장이 날아온 것이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 온지 알 수 없는 자주색 편지. 그 편지는 죽음을 전달하는 메신저였고, 편지를 받는 자는 일주일이 지난 후에 죽게 된다. 죽음이 다시 돌아왔다고는 하지만, 결코 자연스럽지 못한 방법으로 찾아왔기에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죽음은 자주색 편지를 통해 랜덤으로 찾아왔고, 그 편지를 누가 보내는지 알 수 없었다. 저승사자가 지상으로 다시 내려온 것일까? 꿈을 통해 나타나는 것은 고상한 태도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편지를 보내기 시작한 걸까. '죽음(편지를 보낸 행위자)'이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 시점에서, 소설은 급격한 변화의 물결을 탄다. 혼란스러운 나라를 잠시 뒤로한 채, '죽음'의 입장에서 죽음이 보여 진다.

 

  '죽음'을 뭐라 불러야 할까. 사람으로도, 저승사자라로도 표현할 수 없는 뼈로만 이루어진 존재. 죽음의 편지를 일일이 쓰고, 순식간에 편지를 보내는 인물로 생각해야 할까. '죽음'이 인간들에게 죽음을 주는 가운데 미처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지 않았다면, 어떤 식으로 '죽음'을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 죽음의 편지를 받아야 할 사람의 편지가 다시 되돌아 온 일. 제 날짜에 도착하지 못한 편지로 인해 그 사람의 생명은 계속되고 있었다. 49살에 죽어야 했을 독신의 첼로리스트는 50번째의 생일을 맞이하고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죽음'은 첼로리스트를 관찰한다. 그가 어떠한 생활을 하는지, 그에게 죽음이 왜 비켜갔는지 뼈로 이루어졌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인 '죽음'은 죽음이 찾아오지 않은 인간으로 인해 급격한 혼란을 맞고 있었다.

 

  어째 소설의 흐름이 예상 밖으로 흘러간다고 생각했다. 죽음이 왔다갔다 하는 나라의 지루함을 지켜보다 꾸벅꾸벅 졸던 내게 '죽음'의 행동은 새로운 분위기를 만들어냈지만, 전혀 짐작할 수 없는 반전이었다. 책은 거의 끝나가는데, '죽음'은 첼로리스트에게 죽음을 주는 일에 직접 나서고 있었으니 결과에 주목하면서도 상반된 분위기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책을 읽다 또 졸고 말았다. 상상력이 풍부한건지, 단순한건지 알 수 없지만 잠들기 전에 읽은 책 내용은 나의 꿈에서 연결되기 일쑤였고 나는 '죽음'과 첼로리스트의 꿈을 꿨다. 그리고 꿈에서 깨자 얼마남지 않은 그들의 이야기를 읽어 나갔고, 나의 집중력은 최상의 상태를 발휘했으며 이전의 지루함은 떨쳐 버린 채 새로운 이야기를 읽는 듯한 착각에 빠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과를 예상할 수 없지만 결코 순탄하게 흐르게 두지 않을 것을 짐작한 저자의 색다른 면모를 발견한 것처럼, 로멘스 소설을 읽는 듯 끝 부분을 읽어 나갔다.

 

   그것은 독특한 경험이었다. 꾸벅꾸벅 졸면서 힘겹게 읽어간 소설은 모두 사라지고, 죽음을 주려는 '죽음'과 '죽음'을 사랑하게 된 첼로리스트의 이야기만 남아 있었다. 그들의 꿈을 꾸고 나서야 무엇에 홀린 듯 읽어나갔던 일은 물론, 죽음이 사라졌다 다시 온 나라의 일은 현실과 혼동 되었다. 생뚱맞게 서로를 사랑하게 된 '죽음'과 죽음을 비켜간 첼로리스트라니. 혼란에 빠뜨렸던 독자를 우롱하는 것도 아니고, 죽음의 유무를 뭉뚱그리는 것도 아닌 결말 앞에 망연자실 할 뿐이었다. '죽음'이 첼로리스트에게 죽음을 알리지 않고 그를 사랑하게 된 다음 날, 역시 책의 시작과 함께 '아무도 죽지 않았다'로 소설은 끝이 난다.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결말이었지만, 개인적인 경험 앞에서 그것은 또 다른 이야기로 비춰졌다. 죽음은 '죽음'을 통해서 통제된다는 유무를 확인한 셈으로 치기엔 무언가가 석연치 않았다. 두려움의 대상인 죽음이 아니라 죽음을 뛰어 넘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준 듯한 '죽음'의 행동.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는 여전한 숙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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