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왜곡의 역사 - 누가, 왜 성경을 왜곡했는가
바트 D. 에르만 지음, 민경식 옮김 / 청림출판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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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독후감을 쓸때 노트에 먼저 쓴 다음 나름대로의 수정을 거친 후 타이핑을 한다. 타이핑을 하면서도 이 부분이 매끄럽지 못하다고 생각하면 또 수정을 한다. 그러다 보니 어쩔때는 노트의 독후감과 타이핑한 독후감이 아주 조금씩 다를 경우도 생겨난다.

이런 사소한 독후감을 쓰면서도 좀 더 매끄럽게 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생각을 하고 수정을 한다.

그러면서 늘 가까이 하는 성경은 왜 그런 수정이 없다고 생각했을까?

 

교회를 처음 다닐때 예배중 성경을 낭독학때 정말 나의 성경과 다른 사람의 성경이 같은지, 그리고 성경 인용구가 나올때 정말 정확한지 찾아본 적은 있었다. 그러나 내가 찾고자 했던 오류나 궁금증은 현대의 인쇄술에서 나오는 것들이였고 어떻게 저 말씀들을 기록했을까란 의문은 들었지만 그 과정에서의 오류는 깊이 생각해 본적이 없었던 것 같다.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제대로 되어 있겠지란 아득한 상념만 가끔 했을 뿐이였다.

그래서 필사의 과정에서 생긴 오류에 대한 이 책을 접했을때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한번쯤은 생각해봄직한대도 그 말씀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의 삶을 닮아가련느 생각만 했었지 내가 가지고 있는 성경이 그런 과정을 거쳐 왔을 거라는 건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인쇄술이 발달한 현대 사회에서도 책을 읽다보면 오타들을 많이 발견하는데 인쇄술이 발달하지 못한 기독교의 생성시대 때는 말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왜 기독교에서 성경의 오류가 그렇게 중요하냐는 기독교는 유대교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책의 종교이기 때문에 그 만큼성경이 중요한 것이다.

 

책으로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전파할때 사람의 생각이 들어가면 그 해석이 다양해짐은 물론이거니와 그 책이 정확하지 못하고 조금씩 다르다면 온전히 그 뜻이 전해지길 기대하는 건 힘들 것이다.

어느 정도의 틀은 구축할 수 있겠으나 분명 정확하지 못한 책의 영향이 없다고는 볼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대 성경이 그랬다면 어떠할 것인가....

내가 직접 겪어도 객관성이 상당부분 떨어질 것인데 지금으로부터 수천년 전의 일을 기록한 것이라면?

아득해진다. 지금껏 생각해보지 못한 것에 생각을 틔워주니 상상은 끝없이 펼쳐진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말씀을 가까이 하고 주님의 삶을 닮아 가려 애쓰는 데에만 집중하면 되지 라는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책 속에서 나온 수 많은 오류들을 보니 그리고 그 변천사를 보니 가볍게 넘길 처사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의도적인 혹은 실수로 잘못 기록된 필사본들에게서 완전히 뜻이 다름은 물론이고 그 파급효과로 인한 많은 문제점들 또한 알게 된 것이다.

그런 오류들을 지나쳐 버린 수 많은 기독교인들을 생각하니 결코 그대로 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인식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뜻을, 말씀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것,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왜 필요한지 이 책은 말하고 있다.

그래서 저자의 30년 동안의 연구가 왜 필요한지도 이런 노력이 왜 있어야 하는지도 알게 되는 시간이였다.

 

처음의 충격에서 많이 벗어났지만 연구를 하면 할수록, 오류를 발견하면 발견할수록 차분해 진다는 저자의 말처럼 나도 그런 과정을 거쳐온 듯 하다.

그런 오류 속에서 내가 진정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알기에......

그러나 7장으로 나뉘어진 왜곡의 역사들을 읽으면서 분명 저자는 구분하고 흐름을 따라가고 있었지만 반복된다는 느낌도 많이 받은 건 사실이다.

본문비평이라는 작업이 탐정처럼 조사하고 증거를 찾는 애로사항이 있어서라지만 400페이지를 그득 메운 성경 왜곡의 역사는 비슷하다는 느낌, 반복된다는 느낌이 짙었다.

독자들에게 좀 더 꼼꼼하게 알리고 싶었던 의욕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당연히 알아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내가 믿고 있는 종교, 그리고 책을 읽는 내내 예수님의 행적을 좇는 듯한 느낌과 그 안에서 성경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할 수 있어서 종죠를 가진 한사람으로써 뿌듯한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성경에 대해서 분명 애정을 가질 수 있는 시간이였고 이제는 그 성경을 묵상하고 행하는 믿음을 만들어 가야겠다는 은혜까지 받았으니 더더욱 소중할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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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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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책을 덮고 눈을 감기가 두려웠다.

눈을 떴을때 나도 '눈이 안보여'라고 말하게 될까봐 어쩔 수 없이 눈을 감게 되면 떨리는 마음으로 눈을 뜨게 되었다.

눈이 멀어버린 그들 모두는 갑작스럽게, 단지 눈이 멀어버린 사람을 봤다는 이유만으로 눈이 멀어버렸다.

그러나 왜 눈이 멀었을가? 최초로 눈이 멀어버린 남자가 눈이 멀게 된 원인은? 알수 없다. 왜 눈이 멀어 버렸는지 그리고 눈이 멀어버린 사람들을 보면 왜 눈이 멀어 버리고 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전염성이란 걸 알고 정부에서는 그들을 격리 시키지만 수용소에서의 생활은 비참함의 연속이였다.

최초로 눈이 먼 남자, 그리고 그 사람을 치료하려 했던 의사와 의사부인, 썬글라스를 낀 여자, 차도둑, 엄마를 잃은 아이 등 눈이 멀어 버린 연관성이 조금씩 있는 그들이 눈이 멀어 버렸다는 사실도 설명할 수 없지만 단 한사람, 의사의 부인만은 볼 수 있다는 의문도 설명할 길이 없다.

 

모두들 눈이 안보이는 틈바구니에서 나 혼자만 눈이 보인다고 한다면 과연 그 기분은 어떨까? 그들이 벌여 놓은 끔찍한 식량 쟁탈전, 오물 투성이의 건물, 무질서함, 살인, 굶주림 등 오로지 그녀만 볼 수 있다. 보통의 인내력과 한계를 가진 사람이였다면 미쳐버리거나 죽어 버렸을지 모른다. 그녀에게 왜 그런 시련이 없었겠냐만은 그녀는 현명했다. 그리고 눈이 멀어 버린 사람들의 세계에서 훌륭한 조력자가 되어 주었다.

그러나 그들의 생활은 순탄할 수 없었다.

온 도시가 눈이 멀어 버린 사람들의 세상이라고 생각해 본다면 지체할 것 조차 없이 마음에 먹구름이 바로 생긴다.

포기가 빠른 인간들은 삶을 마감 하는게 낫다고 생각해도 무난할 정도로 앞은 캄캄했다.(이 비유야 말로 그들에게 딱 드러맞는다.)

 

모두가 눈이 멀어 버렸다.

단 한사람, 의사 부인만 눈이 멀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 사실을 드러낼 수가 없다.

생각해 보라. 그녀가 눈이 보인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주변의 반응이 어떨지... 곱지 않은 시선, 의심, 불평들이 그녀에게 쏟아져 나올 것이다. 그녀의 은밀함으로 그 그룹이 속해 있는 수용소는 질서가 잡혀 갔지만 세상을 살때 나만, 몇몇 지인들만으로는 살아 갈 수 없듯이 그 수용소는 축소된 하나의 국가가 되어간다.

그것도 사회주의가 팽배한 소국가가 형성되고 있다.

그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일까?

기본적인 욕구다. 그중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는건 바로 식량이다.

수용소에 있었기에 처음에는 밖에서 그들에게 식량을 배급해 주었다. 그러나 수용소 밖의 사람들은 혹여 눈이 멀어 버릴까봐 전전긍긍하며 식량을 뭉텅이로 던져 놓는다. 그것을 찾아가야 하는 것도 눈먼 자들이고 모두가 먹을 수 있게 나눌 수 있는 것도 그들이다.

그러나 모두가 분별력을 갖출 수는 없을 것이다. 배식이 정확하지 않아 배고픔이 길어 진다면 다른 사람의 몫을 내가 슬쩍 한다면 그 행위는 드러나겠지만 누가 그걸 가려낸단 말인가..

불만은 높아가고 해결책은 없고 그들은 단 한시간도 미래를 꿈꿀 수 없을때 총을 가진 자들이 나타난다.

 

몇몇 무리들로 이루어진 그들은 총을 무기로 식량을 쟁탈하고 배가고프면 금품을 가져와서 식량을 교환해 가라하고 여자들까지 요구한다.

그들도 눈이 멀었는데 금품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들의 행위는 무기를 전제로 하는 독재 정권이였고 당하는 사람들은 국가안에서 또 다른 소국가로부터 존재감을 인정받지 못했다.

즉, 눈이 멀어 버린 상황은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닌 도시 전체가 눈이 버린 사람들로 넘쳐나는 이상 그 사회에서의 또 다른 생존권과 삶을 다투게 된 것이다.

정말 막막했다. 처음 눈이 멀지 않는 사람들이 존재했던 도시와 모두가 눈이 멀어 버린 도시 앞에서 국가를 운운했던 그 국가는 이미 상실된지 오래고 가상 공간 속에서 붕 떠있는 듯한 느낌, 또 그곳을 헤치고 나가야 하는 두려움 속에서 그들 소 그룹은 수용소 밖으로 나오게 된다.

눈이 멀지 않은 의사 부인의 도움으로 도시로 돌아오고 삶의 터전으로 돌아가지만 그곳은 수용소 보다 더 끔찍하다.

눈이 멀어 버린 사람들이 제 집을 찾아 갈리도 없고 모든곳이 그들의 생활 공간이 되어 버렸다.

의사의 집도 엉망이였지만 그들은 우선 그곳에서 함께 살아간다.

날마다 식량난, 기본적인 생리욕구들을 걱정하며 살아가지만 그들은 끈끈하게 결집되어 있다.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는 그 곳에서 새로운 희망을 품으며 그 삶을 개척해 가는 그들, 그렇게 막을 내릴 것 같고 그들의 운명이라 생각하고 나도 그들도 인정할 즈음, 눈이 멀어버린 원인이 이유없이 나타났듯이 그들에게 시력이 회복 된다.

반전.

절대 안정권을 허용하지 않는 반전.

우울함과 길고 긴 어두운 터널을 받아 들이며 빛이 있는 세상의 끝을 기대하지 않던 그들에게 시력이 회복된다는 건 그 터널의 과정을 무색하게 만들어 버렸다.

특히 안대를 한 늙은 노인과 썬글라스를 낀 젊은 여자와의 관계는 그들의 실체가 드러남으로써 반전의 시작을 알리고 있을 뿐이였다. 그러곤 의사의 부인은 이제서야 자신의 차례가 되었다는 듯 눈이 멀것 같다는 예감을 비추며 책은 끝이 난다.

 

이처럼 무척 독특하고 흥미를 돋구는 내용이였지만 책을 읽어내는 과정은 녹록치 않다.

눈이 멀어 버린 세계에서 의사의 부인처럼 모든걸 지켜봐야 하는 고통을 내가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의사의 부인이 마치 내가 된듯 그 과정을 헤쳐나가는 건 단순한 책 읽기의 인내심이 아니였다.

바로 내가 헤쳐나가야 하는 삶 그 자체였다.

한바탕 용을 쓴 듯, 그리고 기나긴 험한 경험을 한 듯 책을 덮고 나서도 쉬이 잊혀지지 않는 여운이 오래 남는 책이였다.

눈을 감고 나면 눈이 멀어 버린다는 순간의 두려움은 사라졌지만 그게 언제 내 차례가 될지 안심은 할 수 없다.

 

지금 나의 눈이 멀어 버린다면?

자신이 없다.

그들처럼 헤쳐나갈 자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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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으로 튀어! 1 오늘의 일본문학 3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은행나무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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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표지를 보라!

남쪽으로 튀지 않으면 정말 큰일 날 것 같은 저 남자의 표정을.

그냥 군말없이 남쪽으로 튀고 싶다. 그러나 튈때 튀더라도 이유는 알고 튀어야 겠지? 역시 이유를 알고 나니 튀는데 의의를 달기가 싫다. 그냥 튀자! 남쪽으로!

 

전작 공중그네와 인더풀에서 엽기적인 정신과 의사 이라부의 인상이 너무 강해 이책도 그런 분위기 일거라 생각하고 기대반 의심반이였다. 그러나 초등학교 6학년인 지로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가족사와 세상은 잠시 당황하게 만들었다.

'이번에 초등학생인가?' 라며 초반에는 미덥지 못했던게 사실이였다. '더군다나 이런 식으로 2권까지? 음... 전작의 흥행이 너무 강했군.' 이리며 멋대로 초반부터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역시 나는 뒷통수를 맞고 말았다.

초등학교 6학년의 시각으로 이렇게 멋지게 엮어 나갈줄은 초반에 절대 알 수 없었다. 어느새 푹 빠져 혼자서 낄낄대며 그 웃음이 멈추지 않아 행복해 하며 웃어댄 곳이 얼마나 많았던가...

저자의 말처럼 이처럼 무게 있는 내용을 가볍고 재치있게 쓴 저자의 능력에 나 또한 감탄했고 지로의 순수한 모습을 보면서 나의 유년시절을 떠올릴 수 있어서 무척 좋았다.

 

과거 운동권의 유명한 투사였던 아버지 이치로 때문에 늘 말썽에 휘말리고 평범한 아버지를 갖는데 소원인 지로. 그런 걱정 속에서 숨통을 틔워 주는건 친구들이였다.

능청스럽고 유쾌한 친구들. 그러나 중학생들의 폭력과 협박은 그런 평화를 앗아간다. 아버지 만으로도 충분한데 말이다.

팍팍한 현실은 그것도 초등학교 6학년이 겪기에는 다소 암울한 감이 없진 않았지만 그런 현실을 나름대로, 자기의 신분에 맞게 헤쳐 나오는 건(하룻밤의 가출은 칭찬해 줄 순 없지만...) 역시 멋졌다.(미덥지 못한 어른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그러나 늘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아버지와 같은 뜻을 가진 현대에 어울리지 않는 투사 아키라 아저씨의 테러에 지로가 가담하면서 일은 엄청나게 커지고 만다. 우익과 좌익의 틈바구니에서 홀로 투쟁하는 아버지. 과거의 사상을 버리지 않았지만 역시나 현대에 조금은 구시대 적이긴 해도 민감한 문제라서 파장은 엄청났다. 언론에 지로와 아버지 이치로가 공개됨으로써 더 이상 도쿄에 머무를 수 없음을 알고 아키라 아저씨의 고향이자 절대적인 지지자들이 존재하는(과거 투사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남쪽 오지 이리오모테 섬으로 떠난다. 누나 요코는 도쿄에 남겨둔채 엄마,아버지,지로,여동생 모모코와 함께 모든걸 처분하고 너무나 쉽게 빠르게 말이다.

 

현실에 안주하는 것보다 떠난다는게 어려운 법인데 이치로네 가족은 그런 현실을 너무나 쉽게 떠난다. 늘 정의와 나름대로의 뜻을 가지고 있었지만 도쿄에서는 갇힌 듯 살아온 이치로 부부는 그제서야 오지의 섬에서 숨통이 틔인 것 같다. 지로와 모모코에겐 불편한게 이만 저만이 아니지만  불량학생이 없는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되어서 나름대로 적응해 가는 중이다. 전교생이 다섯명 뿐이라 조금 외롭긴 하지만.

그러나 아버지가 가는 곳이 섬이라고 잠잠할리가 있겠는가.

도쿄에서 그러고 이리오모테 섬으로 왔는데.

이번에는 리조트 개발 업자들과 맞딱트린다.

그 오지에서도 지로네 평화는 꾸준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번엔 더 크게 언론에 공개되고 결국 누나와 모모코 지로를 남겨둔채 엄마 아버지는 다른 곳으로 떠난다.

잠시간의 도피이긴 하지만 지로 엄마,아버지는 행복해 보인다. 그리고 섬에서 3남매의 생활도 그럭 저럭 자리잡아 간다.

 

자칫 아버지가 중심이 되는 소설로 볼 수 있지만 무게감이 절대 없다고 할 수 없는 소설이지만 나는 지로의 성장, 모험을 다룬 소설이라는 데 동의한다.

지로의 그런 과정을 통해 가족의 소중함, 친구들과의 우정, 또한 초등학생이라는 다소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것들을 겪으면서 나름대로 자신의 삶을 개척해 가는게 인상 깊었다.

삐뚤어지지 않아서 예뻤고 그 나이 특유의 유쾌함을 가지고 있어서 순수했다. 또한 일본의 초등학생에 대한 제제와 규칙들이 몇가지 독특해서 신선했던 기억도 남는다.

마음 고생을 많이 해서 사뭇 진지한 면도 없지 않지만 지로를 보고 있자니 나의 어린시절이 생각난다.

분명 나도 마음 고생을 했지만 지로처럼 순수한 때가 있었기에...

참으로 재미난 여행이였다.

나도 그들처럼 훌훌 털어버리고 남이든 북이든 튀고 싶다.

그러나 우선은 현실에 충실해야 겠지?

충동적인건 곤란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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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Mr. Know 세계문학 3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자먀찐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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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러시아 문학이라면 무조건 산다.

또한 번역자가 석영중님이라면 그건 더 빨리.

절판 되었던 '우리들'이 mr.know 보급판으로 나왔을때의 기쁨은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열정에도 불구하고 이제서야 읽다니(이런 책이 너무 많다.) 소유의 독서가 되어 가는 것에 대해 브레이크를 걸 필요성을 느끼지만 그렇게 쌓아 놓은 책 중에서 러시아 문학은 늘 나를 설레게 한다. 도스또예프스끼로 관심을 갖게 된 러시아 문학에 대한 관심은 혹여나 내가 러시아 문학을 읽어 버린다 해도 지속될 것 같은 느낌...

내게 러시아 문학은 그만큼 특별하다.

 

시대는 29세기.

개인적인 것들은 모두 배제된채 200년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들로 이루어진 단일제국이다. 우리 모두는 <은혜로운 분>의 통치하에 번호로 등록되어 있다.

우주선 인쩨그랄의 조선 담당 기사 D-503의 불법적(?) 기록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읽어가면 갈수록 무의식의 바다 속에서 헤엄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투명한 건물에서 모든것이 감시 당하듯이 밥 먹는 시간, 성관계를 가지는 시간까지 시간 율법표에 의해서 돌아가야 하는 것처럼 모든것은 적나라하다.

I-330을 만나기 전까지 D-503의 생활과 의식은 단일제국에 합법적인 것이였다. 나름대로 만족을 하고 있던 생활속에서 자신의 존재감이 서서히 개인화 되어 간다.

의식이 깨어 가는 번호들, 혁명을 일으키려는 번호들, 고대국가 처럼 아이를 낳고 싶고 사랑을 하고 싶어 하는 번호들이 생겨났다.

그 가운데 하나인 I-330을 사랑 하게 되고 자신에게 등록 되어 있떤 O-90은 D-503의 아이를 낳고 싶어 한다.

불법적인 임신을 하게 된 O. I를 사랑하는 D.

결국 그런 시도는 실패로 끝나지만 우리에게 익숙해져 있던 그런 스토리와 진행으로 나아가는건 아니다.

줄거리가 무엇인가 한참을 고민해 본적이 있다면, 책에서 도움을 받고자 읽는 책을 기웃거린 적이 있다면 이 책이 바로 그런 책이다.

 

29세기라는 아득한 미래의 의식세계를 상상할 수 없듯이 그런 혼란을 감추지 않는 책이다.

D는 서서히 자신을 깨워 나가지만 그런 낯선 세계 그리고 경멸해 마지 않는 세계 였기에 혼란스럽다.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자신의 기록임에도 그의 생각을 간추리기가 어렵다.

I와 같은 뜻을 품었으나 그 뜻을 밀고 나가고 도와주려 하나 자신에겐 도무지 어색하다. 자신의 마음과 동일하게 움직여 주지 않는 행동과 의식 세계에서 방황하는 D가 안쓰러울 정도다.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세계가 그들에게 고대가 되고 내가 고대 시대를 배척하는 것처럼 D도 현재 나의 세계를 경멸하면서도 조금씩 인간적이 였던 고대를 인식해 가는 과정은 미래인이라는 아득함 속에서 나와 그들을 연결해주는 자그마한 빛이였다.

 

인간의 가장 꼭대기에 있는 욕구는 자아성찰이라도 하던데 미래에서는 그 자아성찰이 배제되어 있다는 건 역시 익숙치 않았다.

조지오웰의 '1984', 헉슬리의 '위대한 신세계'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우리들.

20세기 초반 소설이라지만 지금 읽어도 미래의 아찔함을 느낄 수 있었던 책이였다. 무의식의 세계에서 나 또한 몽롱해지고 그들의 혼란을 따라가던 시간들은 뭐라 똑 부러지게 말할 수 없지만 늘 분명하기를 원하는 현대에서 만난 불분명함 이였기에 나름대로 괜찮은 세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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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07 0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느린 희망 유재현 온더로드 6
유재현 지음 / 그린비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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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하면 '체 게바라'가 떠오른다.

그리고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도 생각이 난다.

그것 외에는 쿠바에 대해서 아는게 별로 없다.

그래서 이 책을 통해 쿠바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알고자 했고 흔히 보아온 그런 여행책일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건 여행책이 아니였다. 쿠바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살아 있는 책이였다. 사진속에 보여지는 것이 쿠바의 전부가 아닌 것처럼 글 속에 나타난 것들이 쿠바의 전부를 말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내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순간에도 쿠바는 그렇게 살아서 움직이고 있었다. 저자의 말처럼 서서히... 그리고 느리게.

 

책 속의 쿠바는 체 게바라가 존재하던 시절도 아니고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에서 보았던 궁핍하지만 낭만적인 나라의 쿠바도 아니였다.

쿠바를 통해서가 아닌 그들로 인해 쿠바를 알아갔기에 많은 모습을 왜곡하고 있었었다는 걸 알았다. 그 베일을 벗긴다는게 때론 위험하면서도 쉬운 것인데 이 책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여전히 나는 쿠바의 겉모습만 핥고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이 긴 것도 아니고 사진이 쿠바 전체를 말해 주는 것도 아니지만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들은 조금씩 느껴갈 수 있었다.

흔히 보아온 여행책, 혹은 있는 그대로를 보여 주는 책들속에서 묻어나는 낭만적인 몽상은 이 책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런 책들을 꼬집기라도 하듯 저자의 시선은 날카롭고 현실을 직시한다. 조금은 민망한 생각이 들 정도로 저자에 의해 펼쳐진 쿠바는 낯설면서도 그렇게 존재하는 곳인 것처럼 친근하기도 했다.

사회주의도 민주주의도 아닌 그 중간쯤 존재하는 것 같은 쿠바.....

둘 중의 하나를 콕 찝어서 말하기엔 어색한 쿠바.....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희망을 던져줄 수 없지만 희망을 기대하며 지켜볼 수 있는 쿠바인들을 만날 수 있었던 시간이였다.

그들 옆에 내가 서 있는듯 혹은 내가 저자가 되어 쿠바를 구석 구석 돌아다닌 것 같은 느낌은 아마 그래서일 터였다.

 

쿠바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게 체 게바라였듯이 온통 체 게바라로 범벅이 된 쿠바를 상상했었다. 그러나 이건 나의 환상임을 깨닫는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고 아직도 그런 생각을 품고 있는 내가 낯설었다.

 

가장 인상 깊은건 학교였다.

한명이든 두명이든 학생만 있다면 학교를 세우고 교사를 파견하는 쿠바.

그런 학교가 2천여개가 넘는다고 하니 주입식 교육이 아닌 배움의 장을 연다고 할만한 나라이다. 수학 문제를 풀지 못하고 잠자는 학생을 짖꿎게 찍은 사진을 보면서 공부하는 모습은 비슷할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교육에 대한 쿠바의 열정은 무척 부러웠다.

 

조금씩 조금씩 자신들의 모습을 찾아가는 쿠바인과 쿠바를 보면서 우울함도 아닌 동경도 아닌 우리의 삶의 모습과 비슷한 사람 냄새가 나서 좋았던 것 같다.

사람 냄새를 나게 하지 못한채 동경만,우울함만,우월감만,얕보는 마음만 그득한 책들도 많은 반면 정말 있는 그대로의 쿠바를 보여 주어서 여행을 하고 온 기분이다.

들뜨거나 힘든 여행이 아닌 잔잔한 미소가 엷게 퍼지는 여운이 그득한 그런 여행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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