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물 받은지 좀 된 책들이다.

이달에 30여권을 책장에서 빼서 지인들에게 주었는데...

빠진 책들의 권수만큼 다시 들어온 기분이다.

헐..... ㅠㅠ

 


- 크리스마스 전후로 엄청나게 받은 책 선물이다.
<바리데기>만 내가 구입하고..

나머지는 이웃분들에게, 이벤트로 받은 책이다.

그 중에서 가장 눈길이 가는건..

역시 고흐 책이다...

책상 그득 펼쳐지는 고흐 책이 압권이다..

아핫.. 책이 너무 많이 들어와서 좋다..^^

 

 

1. 왜 날 사랑하지 않아? -클레르 카스티용

2. 한달 후 일년 후 - 프랑수아즈 사강

3. 자살가게 - 장

4. 예언자 - 칼릴 지브란

5. 무서록 - 이태준

 

6. 연애소설 읽는 노인 - 루이스 세풀 베다

7. 예찬 - 미셸 투르니에

8. 바보의 알파벳 - 시배스천 폭스

9. 배고픔의 자서전 - 아멜리 노통브

10.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 미셸 투르니에

11. 어린이를 위한 하나님의 임재 연습 - 진인경

12. 바리데기 - 황석영

13. 테메레르 3- 나오미 노빅

14. 나는 깊은 바다 속에 잠들어 있던 고래였다 - 수산나 타마로

15.~16. 반야 1,2 - 송은일

17. 빈센트 반 고흐 - 빈센트 반 고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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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나의 집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읽기 전, 저자의 가족사를 조금 전해 들었다. 세번의 이혼 후, 각각 성이 다른 세 자녀와 살고 있다고. 저자의 작품을 떠나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기에 나름 충격이 컸다. 남들과 같은 곱지 않은 시선일지라도 세번의 이혼은 내가 어느 정도 꾸려놨던 저자의 이미지에 흔들릴 수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저자의 글을 편애하며 좋아했던건 아니지만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의 문체 변화를 염두해 두고 있던 터라 저자의 사생활이 어느 정도 영향이 미쳤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랬기에 처음엔 이 책을 읽을 엄두가 안났다. 내가 상상하는 저자의 가족은 우울할거라고 팍팍할거라고 제 멋대로 생각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오히려 오기가 생겨 내 멋대로인 감정을 뒤집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저자의 가족이 잘 사는 모습을 보면 될 것 아니냐는 자기 합리화적인 오기가.

 

  그러나 나는 이 작품이 소설이라는 것을 잠시 잊은 듯 했다. 이 모든 것이 공지영 작가의 가족 이야기라고 생각해 버린 나의 실수가 치명적이었다. 내 멋대로의 생각에서 헤어 나오기는커녕, 더 깊은 암울함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소설적이다라고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요소는 분명 존재했다. 그것은 19살의 딸 위녕의 눈에 비친 엄마, 공지영 작가의 모습 때문이었을 것이다. 분명 유명작가의 엄마는 평범하지 않다. 그리고 아빠의 집에서 살다 엄마의 집에 왔지만, 성이 다른 두 동생과 작가인 엄마를 감당하기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런 위녕이 눈으로 비춰지는 엄마의 가족과 아빠의 가족은 너무나도 달랐다. 아빠보다는 엄마가 자신의 마음을 더 편안히 해주는 것 같지만 표현이 다를 뿐 엄마, 아빠를 모두 사랑하는 마음은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가기도 한다.

 

  그런 위녕을 편안히 해주는 엄마는 너무나 발랄하다. 어쩔땐 딸과 엄마의 위치가 바뀌어 위녕이 엄마 같을 때도 많았지만, 그것 보다는 가능성을 너무나 많이 부어주는 엄마의 말들이 소설적이다라고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위녕 자신도 늘 긍정적인 용기를 북돋워주는 엄마의 말과 행동이 좋지만 결국은 자신에게 모든 책임이 주어 진다는 부담이 어쩔때는 버겁다고 했다. 그래서 위녕의 친구가 가출 했을 때, 악을 쓰며 말도 안되는 소리를 늘어놓는 친구의 엄마가 부러웠는지도 모를 일이다. 나 또한 차라리 그런 엄마의 모습이 더 편하게 느껴졌었다.

 

  그렇다고 위녕의 엄마에게 평범한 모습이 없다고 느꼈던 것은 아니다. 유명하다는 것 때문에 오히려 우리가 그녀에게 지적이고 근엄한 모습을 기대했을 뿐이지 그녀도 소설가 이전에 평범한 인간일 뿐이었다. 그녀의 이혼도 어쩌면 유명했기에 더 신중했으리라는 의견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그녀가 행복하지 않고 글을 쓸 수 없었을거라 생각한다. 그녀가 위녕에게 했던 말도 늘 그랬듯이 이혼으로 인한 세간의 이목 보다는 자신의 행복이 더 중요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세번의 이혼을 무조건 따가운 시선으로 볼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이해를 해야 수긍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녀에겐 이혼이 행복의 과정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상처받고 힘든 사람들이 많았지만 사랑했던 기억이 있기에 세 아이들과 나름 즐겁게 지낼 수 있는거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껏 위녕의 눈을 통해서 가족의 모습을 보려는 것이 아니라 위녕의 엄마에게 더 많은 관심을 쏟은 것 같다. 세 번이 이혼이라는 사실은 나를 계속 따라다니며 소설 속의 작가, 현재의 작가를 저울질 하게 만들었기에 그녀의 가족에 많은 관심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것은 소설을 읽은 후에도 마찬가지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저저와 위녕, 둥빈, 제제 모두가 남들이 달아준 꼬리표를 달아야 하듯 내가 그들에게 붙여준 꼬리표 때문에 괴로워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즐거운 집으로 인식하면 아무 문제가 없듯 나 또한 즐거운 집으로 인식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집이 온전히 즐거워 보이지 않는 것은 왜일까. 조각난 퍼즐이 맞춰져 있는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그 가족 뿐만이 아닌 많은 가족들이 각각의 모양의 퍼즐을 가지며 살아가다 그 조각들이 맞춰졌을 때 가족이라 불리우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성이 다른 아이들이라고 해서 조각이 맞춰지더라도 하나가 될 수 없을 거라 생각하고 싶은 기분은 무엇일까.

 

  그건 솔직함일 수도 있을 것이다. 모두가 감추고 싶어 하는 모습을 드러낸 솔직함. 그 안에서 행복을 꿈꾸며 살아가는 발랄함. 거기다 나의 오기를 뒤집어 주지 않은 발칙함까지. 우울하지 않았지만 좀 더 나은 모습을 기대했기에 맘에 들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가지는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행복한 가족이라는 것은 주어진 삶에 충실할때 만들어 진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를 받아 들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그렇기에 퍼즐의 모양이 다른 구성원일지라도 가족이라는 의의는 변치 않을 것이다. 조각난 퍼즐을 가지고 가족의 울타리를 벗어나도 두렵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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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soil's cartoon grammar - daniel E. Hamlin, 옥문성

 

2. 롱기누스의 창 - 아르노 들랄랑드

 

 

 

 

- 오늘도 어김없이 책이 왔다.

생각지도 않은 책이였는데 배송 문자가 와서 책이 오는걸 알게 되었다.

오후쯤 택배를 받고 보니 두개나 되었다.

하나는 이벤트 책으로 신청한 영어 책이였고...

하나는 황매에서 보내준 책이다.

추리소설이 온다고 했는데 이 책인가 보다.

책만 온게 아니라 책갈피와 비니까지 같이 있어 받는 재미가 쏠쏠하다는 표현이 딱 맞아 떨어진 기분이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느낌..^^

읽을 책은 많고 읽기는 더디도다..

빨리 빨리 읽고 리뷰도 막힘없이 팍팍 쓰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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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즐거운 나의 집 - 공지영
 
 
 
 
 
- 이벤트로 응모한 책이 왔다.
우행시 이후에 처음 만나는 책이다.
공지영 작가의 가족 이야기라는 데 .....
세번의 이혼과 성이 다른 세명의 아이들과 산다는 사실을...
이 책을 접하기 전에 들어서 놀랬었다.
곱지 않은 시선을 던질지라도...
우선은 이런 얘기가 하기 힘들었을텐데...
그런 용기만으로도 대단하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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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젤
이시다 이라 지음, 인단비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이시다 이라의 작품을 서너편 읽었지만 그의 문체를 한마디로 일축하기는 힘든 것 같다. 서정적으로 파고 들다가도 속도감 있게 달음질 치는가 하면, 어쩔때는 인내심을 요구하듯 느리게 전개 되기 때문이다. 한 작가의 작품이 읽을 때마다 다른 느낌이 난다는 것은 여러가지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일관된 문체를 선호하는 터라 이시다 이라의 문체는 종잡기 힘든 점이 사실이다. 특히나 이번 작품은 가장 적응하기 힘든 작품이었다. 이시다 이라의 책은 어떤 문체건 속도감에 있어서는 밀리지 않았는데 초반부터 진도가 나가지 않아 조금은 애를 먹은 작품이다. 거기다 소설을 계속 겉도는 느낌은 무어라 말해야 할까. 마치 엔젤의 주인공처럼 이 공간 저 공간을 넘나들며, 책 속으로 흡수되지 못하고 방황하는 느낌. 그런 느낌은 주인공의 현재 상황과 연관이 있는게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까지 들게 만들었다.

 

  주인공 가케이 준이치는 영혼으로 떠돌고 있다. 그러나 자신이 왜 죽었는지 왜 이승을 떠돌고 있는지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그 기억을 찾기 위해 자신의 인생의 중요한 시점들을 돌아보고 있지만 별 소득은 없다. 더군다나 플래시 백을 통한 이동의 순간에서 소설이 시작되고 있었기에 준이치나 나나 정신을 차릴 수 없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그런 혼란의 시간이 지나고 자신의 존재를 조금씩 인식하게 되는 준이치는 주변 조사를 해나기가 시작한다. 자신을 구덩이 속에 묻었던 야쿠자의 목소리를 기점으로 자신이 죽기 전 2년 동안의 기억을 되찾으려 필사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순간이동을 하고 잠복을 하며 자신의 특기를 발휘해 인간에게 모습을 드러내므로써 과거의 자신을 찾아가고 있는 준이치. 그 과정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과거를 알아가면 갈수록,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면 낼수록 한 여인이 위험에 처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죽음의 원인에 다가가면서 수 많은 선택의 기로 앞에 홀로 놓인 스스로를 보며 자신의 죽음을 꼭 알아야 하는지 혼란스럽기만 했다.

 

  우연히 콘서트 홀을 떠돌던 준이치는 다른 영혼인 고구레 씨를 만난다. 준이치가 이것저것 물어 보았을 때 그는 그런 말을 했었다. 몰라도 되는 건 모르는 게 나을 때도 있다고. 그것은 준이치가 자신의 죽음을 파헤쳤을 때 받게 될 또 하나의 상처를 염려한 것이었을 것이다. 기억을 잃어 버린 준이치. 자신의 기억을 찾아 필사적인 노력을 하는 준이치. 그는 결국 자신의 죽음의 끝에서 혼란스러워 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죽음 앞에 침묵하려는 자가 있을까. 누구나 다 준이치의 상황이 되면 기억을 되찾으려 어떤 수단이든 동원할 것이다. 더구다나 자신의 아이를 가진 아름다운 여인이 자신을 기억하고 있다면 더욱 더 노력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준이치는 아버지와 인연을 끊은 댓가로 10억엔의 유산을 물려 받았다. 게임세계에 발을 들여 놓으면서 우연한 계기로 투자 쪽 일을 하게 된 것인데, 자신의 죽음 캐다보니 미심쩍은 투자 기록이 있었다. 자신이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영화에 대한 고액 투자. 그 부분을 캐 나가다 후미오라는 여자를 알게 된다. 그 여인이 누구인지 몰랐지만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에 빠져들게 만드는 매력을 지닌 여인이었다. 그러다 그 여인과 자신이 연관이 있다는 걸 눈치채고 음성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그 드러남이 자신의 죽음의 의문을 푸는 열쇠가 되는 듯 했지만 후미오에게 위험이 손길이 뻗쳐오고 있었다. 자신의 아이와 후미오를 노리는 손길. 바로 자신을 죽였던 야쿠자의 손길이 또 다시 다가오고 있었다. 준이치는 후미오와 태어날 자신의 아이를 지키는 데 혼신의 힘을 쏟는다. 그러나 자신의 죽음의 의혹을 풀고 났을 때는 후미오도 자신의 아이도 생각할 수 조차 없을 정도로 충격과 허무함 속에서 헤메이게 된다. 그제서야 고구레씨의 말을 이해하게 되지만, 사랑을 통해 또 다른 사랑의 결실을 맺게 되는 준이치의 모습은 뻔한 결말일지라도 사랑의 위대함을 믿게 만드는 묘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러나 준이치의 죽음 앞에서 느꼈던 허무는 씁쓸하게 남아 있었다. 그런 허무의 농도는 준이치가 가장 짙겠지만 돈과 야쿠자와의 얽히고 얽힌 어두운 면은 소설을 읽어 나가는데 지치게 만드는 요소가 되었다. 준이치가 캐나가는 자신의 죽음은 진부하게 펼쳐지고 있었고, 물질 때문에 살해 당했다는 사실은 분노보다 허탈함이 더 컸다. 준이치는 인간만이 인간을 죽인다고 했다.극적인 죽음보다 생명의 존귀함이 지켜지지 않는 죽음은 얼마나 많은가. 치열하면서도 비열한 인간 세계에서 그의 죽음은 그러한 본보기가 되었다고 해도, 준이치는 그들과 똑같은 앙갚음을 하지 않았다. 후미오가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한 사실은 자신의 아이라고 해도 그 아이에게 닥친 위기를 외면할 정도로 충격을 주었지만, 준이치가 그 생명을 무시할 수 없게 만들었던 것. 그것은 어쩌면 존귀함이 지켜지지 않았던 자신의 죽음 앞에 준이치가 던지는 희생의 결정체가 아니였을까. 억울했던 죽음을 귀한 생명으로 돌려 주는 것. 그런 순환의 고리 속에서 우리의 생명이 지켜지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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