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기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 폴 오스터

 

2. 목련 전차 - 손택수

 

 

짜잔~~!!
지인이 책 선물을 해준다고 하기에 폴 오스터 책을 선물해 달라고 했어요.. 폴 오스터 작품중에 괜찮은 걸루요...
그랬더니 이 책을 선물해 주셨답니다.
오오.. 기대됩니다. 원작이 된 dvd도 보내주셨는데..
책 읽고 보면 좋을 것 같아요..
 
제가 읽은 건 뉴욕3부작, 환상의 책, 타자기를 치켜세움 요 세권 뿐이였거든요....
타자기를 치켜세움은 서점에서 읽어서 저에게 없습니다..^^
어여 이 책을 다 읽고 뉴욕 3부작 옆에 '오기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가 꽂히길 고대합니다.
 
폴오스터의 작품이 한권 늘어났습니다.
오오.. 기분이 좋아요..^^
 
 
 
또 한권은 간만에 시집을 선물 받았습니다.
이 책은 또 다른 지인이 시집 좋아하냐고 묻더군요..
다른분께 시집을 받았는데....
한권 주겠다며 고르라고 하길래..
그냥 제목만 보고 골랐답니다..^^
아핫... 시에 문외한이여도 시집은 좋아하기에..
고른 시집인데...
벌써부터 마음이 풍성해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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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돌이 2007-11-26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핫 러시아문학작품도 좋아하시나봐요? 뒤에 마지막사진에 빨간책들(러시아 문학책)가 많네요^^

안녕반짝 2007-12-17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러시아 문학 너무너무 좋아해요..^^
 
스파르타쿠스의 죽음 막스 갈로의 로마 인물 소설 1
막스 갈로 지음, 이재형 옮김 / 예담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세계사라면 절레절레 고개를 먼저 흔들지만, 스파르타쿠스라는 이름은 들어봄직하다.

역사에 획을 그은 로마시대에 그야 말로 획은 그은 인물이니 그럴 수 밖에.

그렇다고해서 스파르타쿠스에 대해 빠삭하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스파르타쿠스에 여전히 관심이 없었지만 스파르타쿠스와 만난 기억을 되살려 주는 이야기를 만났기에 장광설이 길어졌다.

책 제목에서 떡하니 스파르타쿠스를 강조해 놓았지만, 내가 스파르타쿠스를 기억하게 된건 6000개의 십자가가 나오는 부분에서였다.

 

책의 첫머리는 가장 중요할 것 같은 '스파르타쿠스의 죽음'을 묘사해 놓고 있었다.

묘사라고 해도 영웅적인 죽음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책의 시작을 알리는 부분이기에 책을 다 읽고 난 후에 다시 읽어보게 만드는 조금은 귀찮은 구성이였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그 죽음을 말할때 6000개의 십자가에서 생소한 인물이 아닌 어느 책에선가 만난적이 있는 스파르타쿠스를 떠올렸으니 아이러니한 구성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내가 스파르타쿠스의 이야기를 듣게 된 책은 '철학 콘서트'에서 였다.

10인의 사상가를 실어놓은 책안에 예수가 지게된 십자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저자는 크라수스가 세운 6000개의 십자가의 잔혹함을 말하고 있었다.

그 십자가의 형틀을 따르자면 예수는 시대의 반항자라는 것인데 각설하고, 그 6000개의 십자가가 만들어지도록 이끈 스파르타쿠스의 이야기를  펼쳐놓는 것이 바로 이 책이다.

간단하게나마 스파르타쿠스를 만난 경험도 있겠다, 이탈리아 반도를 광기로 휩쓴 봉기군의 이야기를 재미나게 읽을 수 있겠구나 하며 물만난 고기처럼 약간은 주책을 떨며 즐거워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건 스쳐가는 인연이였으면 나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알려주는 시초에 불과했다.

 

예전에도 '칼의 노래'를 쓰면서 인물 소설의 난점을 얘기한 적이 있다.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잘 풀어내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작업임에 틀림없는 것이 어떠한 시각에서 그 인물을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확연하게 달라진 다는 것을 경험한 터였다.

그런 기억이 있었지만 인물소설이라고 하기에 가볍게 읽을 심산이였는데, 초반부터 저자의 문체에 길을 잃고 말았다.

우선 책을 이어나가는 관찰자의 시점이 혼동스러웠다.

스파르타쿠스도 아니였고, 제 3의 인물도 아니였고,  담담히 써내려간 시각을 의도했다 치더라도 수시로 바뀌는 느낌이 들어 안정감을 갖지 못했다.

거기다 인물의 특징과 사건의 드러남이 명확한 것이 아니라 모호하게 그려져 있어 안그래도 어려운 이탈리아의 이름들과 뒤섞여서 혼란을 야기하고 있었다.

또한 노예 반란의 지도자가 스파르타쿠스라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이 책을 대했다고 하지만, 노예 반란의 근원이 되는 것들이 상세하지 않았다.

로마인들이 인간을 짐승보다 미개하게 취급하는 묘사는 쉴새없이 나오지만 노예들의 생활에 깊이 파고들어  동감을 유발시키지 못한것이 아쉬웠다.

이런 상황이였으니 스파르타쿠스라고 인물묘사가 뛰어났을 리는 없다.

또한 늘 스파르타쿠스 곁에 머무르는 부인인 아폴로니아는 디오니소스 신을 모신다고 하지만 그것보다는 욕정을 주체못하는 인물로 그려졌다는 인상만 남겼을 뿐이였다.

스파르타쿠스를 제대로 부각시켰다면 분명 그의 주변 인물들에 대한 명확성도 있었을 터인데 모든것이 뒤죽박죽인 느낌이였다.

처음부터 이러한 분위기다라고 고정틀을 만들어 놓고 모든것을 가시돋힌 눈으로 바라본 나의 시각이 문제일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사건이 되었던 봉기에서도 여전히 무관심한 구경꾼일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책을 읽긴 읽었지만 스파르타쿠스에 대한 남음이 별로 없다.

노예 반란이라는 제대로 된 배경도, 스파르타쿠스가 어떤 인물인지도, 그가 어떠한 일을 이끌어 내고 죽음을 맞이했는지도 내게 남아 있는 것은 없고 온통 모호함 뿐이다.

거기다 문체는 갈수록 장황함을 더해 그 사이에서 모든것이 제멋대로 날뛰는 느낌이였다.

오히려 타 책에서 십자가의 의미를 알려주기 위해 설명된 짧막한 소개가 더 그럴듯 하게 다가왔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렇듯 책의 푸념만 내뱉고 있는것은 책의 한가운데로 들어가지 못함을 심히 아쉬워 하는 것이리라. 그 주체가 내가 되었든, 저자가 되었든 간에.

 

결국, 또 한번 인물 소설에 대한 약점을 만나버리고 만 것인가.

스파르타쿠스여, 심히 애통해 할 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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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죽음의 가면 기담문학 고딕총서 2
에드거 앨런 포 지음, 김정아 옮김 / 생각의나무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다른 책에서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에 대한 언급을 굉장히 많이 보았다.

그런 책들은 궁금증을 유발시키기 마련이고, 읽고 싶은 충동을 자아내기 마련인데 포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도 선뜻 읽어보고 싶다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흘려 들은 분위기를 짐작하건데, 포의 작품들은 괴기스럽고 어둠을 드러내는 이야기 일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생각의 나무에서 '고딕총서' 시리즈로 발행된 포의 작품집을 보게  되었다.

내가 익히 알고 있던 고골의 작품도 고딕총서 시리즈에 포함되어 있기에 지금이 좋은 기회다 라며 읽게 된 것이다.

그런데 저자의 이름에 너무 치중하다 보니 '고딕'이라는 장르를 너무 쉽게 봤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고딕'은 나에게 여전히 낯설었고 내가 생각한 포의 작품들은 더 기괴했기 때문이다.

 

총 14편의 단편이 수록된 포의 작품집은 처음에는 포만의 독특함으로 이끌어 가고 있었다.

고딕소설이라고 하면 자극적인 표현들과 기괴함만이 채워져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포를 대표하는 수식어에 낭만주의가 왜 붙어있는지 조금을 알만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선정적인 문구들로만 채워져 있는게 아니라 기괴함을 더해주는 수려한 문장들과 묘사들이 어우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한켠에 자리잡고 있는 나의 편견들은 무조건 포의 작품들을 신선함과 놀라움으로 읽게 만든건 아니였다.

책을 읽어갈수록 살인, 죽음,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함, 정신착란 등 그것들이 얽히고 설켜 책을 읽는 나조차 혼란스럽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고딕이라는 장르가 낯선것도 있었지만 이런 작품들을 많이 접해보지 않았기에 책을 읽으면서 나의 인상은 찡그려질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행위들이 포의 기괴함을 현실에 대응시키려 해서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온전히 책 속으로 빠져들지 못한 이유도 있었으리라.

그랬기에 점점 혼란의 늪으로 빠져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개운치 못한 생각들이 나의 머릿속을 채워 가고 있었다.

책 속에서의 죽음은 너무나 흔했고 쉬웠기에 현실이 비정상적으로 보이기 시작했고 현실과 동떨어진 흥미로움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더 우울하게 만들어 버리곤 했다.

 

이처럼 잔인하고 암울하고 설명할 수 없는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대부분이였지만, 그러한 가운데 묘사와 완성도가 뛰어난 작품들도 간간히 보여 때때로이런 나의 마음을 식혀주기도 했다.

예를 들어 '직사각형 상자'라는 작품에서도 포다운 문체로 씌여졌지만 장모에게 사랑하는 아내의 시신을 가져다 주기 위해 위장을 한 모습과 배가 난파된 후 부인의 시체와 함께 바다로 뛰어든 모습은 애절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사연을 몰랐을 때는 괴상쩍었지만 사연이 드러난 후는 색다른 감정이 지배할 수도 있다는 것.

그것이 포의 독특함일지도 모르겠다.

 

포의 작품집은 무한한 상상력과 소재의 다양함이 있었고 결코 가볍지 않은 내용들을 싣고 있었다.그러나 나에게 포는 미국인들이 한동안 그를 재능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만큼이나 냉랭함이 그득하다.

미국인들처럼 포의 사생활을 빌미로 이런 편견을 얻게 된 것은 아니지만 대중성을 가미한 고딕이라고 해도 전체적인 분위기는 우울함이 짙었던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안개가 휩싸인 밤을 표현하듯, 몽롱한 꿈속을 헤메듯 펼쳐지는 포의 이야기는 서늘함 보다는 드러내고 싶지 않은 의식체계를 말하고 있는 듯 했다.

그것이 포의 문학의 주체라고 해도 여전히 그러한 어둠은 감추고 싶은게 나의 마음인가 보다.

억지스러움일 수도 있고 고정관념일 수도 있지만 여전히 빛으로 어둠을 밝혀 버리고 싶은 마음을 숨길수가 없다. 어둠을 어둠으로 맞서는 것보단 빛으로 밝히는 게 희망차 보이고 덜 괴기스럽다는 마음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모두가 숨기고 싶어하고 드러내고 싶지 않은 우리 모두의 의식세계와 마음 한구석에 존재하고 있는 어둠을 과감히 드러낸 포의 필적은 고딕문학에 획을 그을만 하다.

그것은 위대한 미국작가라는 데에 이견을 제시할 수 있어도 세계 문학에서 중요한 미국 작가라는 데에는 일리 있는 평가라고 말하는 것처럼 시각을 달리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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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은 바다로 떠났다
존 반빌 지음, 정영목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비는 안오지만 장마의 영향 때문인지 뿌연 안개가 도시를 휘감고 있다.

통유리를 통해서 바라보는 바깥세상은 물에 잠긴 느낌이다.

이 공간을 벗어나면 숨이 막힐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하지만 안개로 뒤덮인 세계가 바다의 시작이라고 생각하면 묘한 기분이 든다.

내가 저 바다로 사라져 버린다해도 잔물결 하나 만들 수 없을 것 같은 미미함.

그 미미함 가운데서도 사라져 버리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은 들지 않는다.

숨이 막혀 버릴 것 같은 답답함과 순간적인 두려움만 들 뿐.

이렇게 뿌연 세상은 사라짐에 있어서도 관능적일 것 같다. 그러나 너무나 화창한 여름의 바다, 잔물결 하나 일지 않던 바다에서 순식간의 파도가 휩쓸고 가버린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꿈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고? 사실이 아닐 거라고?

어릴적 추억이 깃든 바다를 찾은 맥스는 그 답을 얻기 위해서 온게 아니지만 바다로 사라져 버린 것들에 대한 고통은 여전히 남아 있는 듯 하다. 그러나 그에게 남아있는 추억은 전혀 다른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부인을 잃고 상실감에 모든 것을 뺏기지 않으려는 맥스에게 있어서는.

 

맥스는 전혀 위로가 될 것 같지 않은 하숙집 시더스에 머물면서 부인의 투병생활과 바닷가에서 보냈던 어린시절의 추억, 자신의 현실을 모조리 그려낸다.

그런 고백은 몽롱하게, 혼란스럽게, 진부하게 펼쳐지지만 그가 기억하는 그레이스 가족은 특별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 추억만으로도 부인을 잃은 상실감을 잠시 잊을 수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책의 마지막에서는 부인의 죽음과 비슷한 잃어버림을 안겨 줄 뿐이다.

분명 그레이스 가족에 대한 추억으로 마음의 상처를 어느 정도 치유할 수 있다 생각했다.

그러나 그레이스 가족의 결말은 참담했고 어린 맥스와 현재의 맥스는 상처로 뒤범벅이 되어 버린 것 같다.

그러나 그 사실을 맥스 자신이 잘 앎에도 다시 이 바닷가를 찾은 이유는 무엇일까.

부인을 잃어버린 상실감속에 그레이스 가족을 덩달아 떠나 보내려 했던 것일까.

아니면 낱낱이 꺼냄으로써 모든 것을 드러내려 했을까. 자신의 삶 전부를 탈탈 털어 낸다는 기분으로?

 

그러나 맥스가 바닷가를 다시 찾은 이유보다 맥스가 꺼내놓는 그 여름과 그레이스 가족에 염두해 둘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중점을 뒷받침 해주는 것은 저자의 문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해설가도 말했지만 이 책은 결코 수월하게 읽히는 작품은 아니다.

비교적 보통 양인 260페이지의 책을 얼마나 오랜시간 읽었는지 맥스의 이야기를 아주 오래전부터 들어온 느낌이 들 정도였다.

책의 초반에는 너무나 진부해서 정체되어 있는 느낌이 들었고 묘사는 뛰어났지만 읽기는 수월치 않다고 내 멋대로 생각해 버린게 사실이였다.

그러나 녹록치 않은 읽기에서 뛰어난 묘사를 발견해서인지 지루하다고 팽개쳐 버리는 것이 아니라 묘하게 나를 자극하는 분위기에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러한 자극은 결국 나를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고 읽어가면 읽어갈수록 저자의 문체와 분위기에 빠져 몰입을 경험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묘사가 자아내는 인물들 속으로 빠져들 수 있었지만 이 책에서는 인물이나 배경이 툭 불거져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레 조화를 이루며 그림 같은 풍경과 잔잔함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인상 깊게 다가왔다.

또한 이어질 듯한 문장에 마침표를 찍어 버리는 것이 단절을 의미한다 생각할 정도로 초반에는 저자의 문체가 낯설었으나 자연스레 적응해 가는 내가 신기했다.

그것은 저자의 의도를 파악했다기 보다는 저자가 그려내는 분위기에 공감을 더해 간다는 의미였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분명 맥스를 통해서 과거와 상실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저자의 분위기에 끌려가다 보니 단순히 그것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희미하게나마 맥스에게 부여될 새로운 생활(딸과 사윗감이 될 청년과의 결합된 삶)은 좌절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조차도 맥스의 새로운 생활에 무언가를 온전히 기대할 수 없지만 적어도 과거로 인한 상실과 좌절만이 존재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분명 아픈 과거이기는 하나 그에겐 소중하고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 갔던 재료가 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재료가 기다리고 있지만 이번에는 그에게 기쁨과 사랑과 환희가 더 넘치는 삶이 되길 바래본다. 그래서 드 넓은 바다를 보더라도 자책감에, 상실감에 몸부림치지 않고 자신의 존재에 감사함을 갖을 수 있는 마음을 갖길 바란다.

모르지 않는가. 새로운 신들이 다시 돌아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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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캐러멜! 중학년을 위한 한뼘도서관 3
곤살로 모우레 지음, 배상희 옮김 / 주니어김영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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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다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서 글을 쓰고, 생각을 하는 코리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글을 쓸 때나 생각에 빠져 있을 때 그 중점에는 캐러멜이 있을 것이다.

캐러멜을 더올리며 캐러멜이 했던 말을 써내려 가는 것.

코리는 단지 캐러멜의 말을 옮겼을 뿐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듣지 못하는 코리가 캐러멜을 통해 터득한 언어였다.

 

귀가 들리지 않는 코리는 사람들의 입모양을 보며 어렴풋이 이해를 하며 살았기에 낙타가 쉴새없이 되새김질을 하느라 입을 움직이는 것을 보고 낙타도 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낙타 캐러멜을 보며 코리는 큰 위안을 삼는다.

자기 또래의 아이들을 만나면 놀리고 돌을 던질 뿐, 친구가 되어 주지 않았는데 삼춘네 낙타 캐러멜은 적어도 코리를 밀쳐내지 않았다.

그리고 쉴새없이 움직이는 입을 보며 대화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캐러멜과 하는 대화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듣지도, 말할 수도, 읽을 수도 없는 코리는 캐러멜의 말을 적기로 했다. 그래서 선생님을 졸라 글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그 글의 시작은 서툴고 힘겨웠다.

그러나 일식을 보며 코리가 쓴 첫 글은 '해와 다리 사랑해서 하느레서 만나지요' 였다.

맞춤법은 서툴렀지만 일식을 이런 식으로 쓸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코리는 그것은 캐러멜이 한 말이라고 했다.

 

그런 코리가 자신안에 갇히지 않고 캐러멜을 통해 세상에 한발짝씩 내딛는 모습이 감동적이였다. 그러나 그런 캐러멜과의 시간은 오래가지 못한다.

삭막한 알제리 사막에서 살고 있는 사하라위 난민촌에 기근이 닥치면서 숫놈인 캐러멜을 계속 키운다는 것이 사치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코리의 삼촌은 코리가 캐러멜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기에 마음만 아파할 뿐 코리를 위해서 도와줄 수가 없다.

그래서 케러멜을 데리고 도망을 친다.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은 삭막하고 험란하고 희망이라곤 보이지 않는다.

캐러멜을 데리고 갈 곳이 없는 것이다. 사막에서 길을 잃고 희망을 잃어버린 코리와 캐러멜의 모습은 단순히 그들에게 닥친 위기만이 아니라, 사라하위 난민들 모두에게 닥쳐있는 위기이기도 하다. 나라를 뺏긴 설움을 안고 삭막한 사막에서 살아가는 그들에게 코리와 캐러멜의 위기는 당연한 것이고 또한 그들을 통해 자신들의 고통을 비춰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삼촌에 의해 구조된 코리와 캐러멜은 다시 난민촌으로 돌아오고 캐러멜은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곤 캐러멜은 코리에게 슬퍼하지 말라고 위로를 한다. 그 말들을 코리는 낱낱이 적으며 캐러멜을 잃은 슬픔으로 절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세월이 흐른 후 존경받는 시인이 된다.

자신보다 오랜시간 존경 받아온 원로 시인이 코리의 시를 칭찬하고 감명 깊게 코리의 사연을 대하지만 여전히 코리는 캐러멜의 말을 옮겼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매일 캐러멜이 사라져간 땅을 바라보며 캐러멜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코리를 보며 시인이 되었다는 것보다, 절망적인 사람이 되지 않았다는 것보다, 캐러멜을 잊지 않는다는 사실이 감명 깊게 다가왔다.

코리에게 사랑을 가르쳐주고 기꺼이 친구가 되어 주었던 캐러멜을 기억하는 것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나 코리안에 온전히 녹아 있는 캐러멜은 그만큼 컸다.

 

인간이 해줄 수 없는 것을 동물인 캐러멜이 해 주었다는게 미안하고 마음 아프지만 세상을 살아가는데 절망만을 안겨주지 않아서 캐러멜에게 고마울 뿐이다.

이런 코리를 보며 사라하위 부족들이나 마음에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힘겨워 하는 사람들이 희망을 얻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마음속에 캐러멜을 품고 살아가는 코리처럼 우리도 힘차게 살아 갔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별과 만남의 인사 안녕!이 아닌 '고마워 캐러멜!' 이라고 외쳤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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