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에서 길어 올린 한식 이야기 식사 食史
황광해 지음 / 하빌리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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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역사 사료들이 잔뜩 등장해서 음식에 관한 책이 아닌 줄 알았다. 그래서 조금 읽다 책을 덮었고 한참이 지나서 다시 펼쳤는데 이상하게 잘 읽혔다. 책이 잘 읽히지 않을 땐 묵히는 버릇이 있는데 잊지 않고 다시 꺼내 들어 재밌게 읽은 건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처음과 달리 왜 이렇게 재밌게 읽혔을까? 여러 이유들이 있겠지만 우리가 흔히 접하고 있는 음식에 대한 새로운 사실과 오류들이 속속 드러나서 재정립하는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예를 들면 고려가요 <쌍화점>의 쌍화는 만두라는 것, 그러므로 쌍화점은 만두전문점이었다는 사실과 제갈공명이 처음 만든 것도 아니며 만두라고 칭하는 종류가 엄청나다는 사실들이었다. 또한 대구탕은 대구가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대구 명물 육개장(쇠고기+개장국)이 대구탕으로 불렸다는 것들이다. 미나리는 또 어떤가. 더러운 물에 산다고 천대하던 미나리는 ‘충성과 겸양의 상징이’며 미나리는 성균관의 아이콘이었으며, ‘미나리를 캔다’는 표현은 ‘성균관에서 공부한다’는 뜻이었다고 한다. 그동안 오해하고 몰랐고, 관심도 없었던 이런 이야기들이 역사 속에서 속속 드러나고 지금까지 이어지는(방향이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것을 보니 재미있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많이 변형되었다 하더라도 옛 사람들도 먹고 같은 이름으로 불렸다는 사실이 기분을 묘하게 만들었다.

순조는 한 한밤중에 냉면이 먹고 싶어 신하를 시켜 ‘냉면 테이크아웃’을 하는가 하면, 조선 시대에도 ‘수유’라는 버터 혹은 치즈가 있었고 군역을 면하기 위해 그 부락으로 숨어드는 멀쩡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귤이 너무 귀해서 제주에서 진상되면 궁궐에서는 과거를 치렀다고 한다. 그런데 그걸 서로 받겠다고 싸우기도 하고 그런 사정이다 보니 정작 제주에서는 ‘귤나무를 일일이 세어 장부에 기록하고, 열매가 맺을 만하면 열매숫자를 기록’하는 일도 있었단다. 지금은 풍족하고 대량생산되는 시대에 살고 있고, 시대도 변해서 이런 이야기들이 상상이 되질 않지만 그에 따른 고충은 고스란히 전해져온다.

당시의 생활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 있어 마치 그 시대가 눈앞에 펼쳐지는 듯한 착각이 일기도 한다. 지금까지 이어 내려오는 음식들이 신기하기도 하고 현재 우리가 먹는 음식과 비교하면 씁쓸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정치적으로 얽힌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더 그렇다. 임금이 받는 수라는 민심과 정치적인 상황을 받아들여 수시로 바뀌곤 하는데 연산군의 여지(리치) 사랑에 관한 이야기는 기가 찰 정도다. 내게는 뷔페에서 만나게 되는 과일로 인식되어 있는 만큼 자주 접하고 먹는 과일이 아님에도 조선시대에 그 과일에 빠져 무리하게 요구한 군주가 연산군이라고 하니 음식에도 폭군이 있나 싶어 씁쓸했다. 그가 강화도로 쫓겨난 후에야 국가 체면을 떨어뜨리는 여지 구입이 끝났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술과 관련된 문제가 다양했다는 점도 그렇고 나라의 국력이 타국에 쏠려 있을 때 관련 음식들도 슬프게 기억된다는 것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과연 현재 우리가 먹는 음식들이, 시대를 거쳐 가면서 변화되고 변형되어 다음 세대에는 얼마나 남아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세대들은 음식과 현재를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잘 상상이 되질 않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하나의 바람이 생겼다. 좀 더 건강한 음식을 남길 수 있었으면 싶었다. 지금도 건강한 음식을 먹고 있다는 인식이 부족한데 다음 세대는 캡슐 하나로 식사를 끝내는 건 아닌가 하는 쓰잘머리 없는 상상까지 하게 된 것이다. 음식과 얽힌 다양한 이야기를 알다 보니 내가 현재 먹고 있는 음식, 구입하고 만들어 먹고 누군가와 함께 먹는 음식이 즐겁게만 기억되어도 좋겠다는 바람이 생겼기 때문이다. 옛 사람들은 무엇을 먹고 살았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이런 의미까지 끌어올릴 줄은 몰랐다. 좀 생뚱맞긴 해도 오늘 먹는 한 끼니에 최선을 다해야겠단 생각이 불쑥 올라온다. 저녁 시간이 다가온다. 주부로서, 엄마로서의 역할을 해야 할 시간이다. 항상 고민과 귀찮음이 동반되는 이 일이 오늘은 좀 더 진중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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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바인
데이브 컬런 지음, 장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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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쪽에 달하는 두툼한 책을 모두 읽고 덮었을 때 현실감각이 없었다. 머릿속에는 책 속의 상황이 생생하게 펼쳐져 나 혼자 낯선 곳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것 같았다. 혼란스런 상황을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 곧장 외출을 했다. 사람들 사이에 적당히 섞여 그들을 바라보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내 눈에는 지극히 평범해 보이고 그저 우연히 한 공간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누군가는 이런 사람들을 내면의 분노로 인해 없애버리고 싶은 대상으로 생각했다고 하니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실제로 실행했다. 13명의 사망자와 24명의 사상자를 낸 총기사건으로 기억하고 있지만 진실이 밝혀지면 밝혀질수록 ‘사실 총기사건이 아니었다. 실패로 끝났지만 폭탄 테러사건이었다.’는 저자의 말에 점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섬뜩했다. 1999년 4월 20일. 내가 고 3때였고 범인들은 나와 태어난 해가 같았다. 당시 내가 총격사건에 대한 뉴스를 접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어렴풋이 캐시 버넬의 순교에 관한 이야기는 들은 기억이 났다. 이 책을 통해 많은 부분이 미화되었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 그 인물이 콜럼바인 총기 사고의 희생자였다는 사실도 몰랐다. 그럼에도 섬뜩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1999년의 나는 진로에 대한 고민과 번뇌만 잔뜩 짊어지고 있었는데, 지구 반대편에 나와 나이가 같은 에릭 해리스는 사건 일 년 전부터 ‘자신이 받은 학대의 상징’인 학교를 향해 대학살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리고 딜런 클레볼드와 함께 사제폭탄과 총을 들고 학교로 들어가 사람들을 죽이고 다치게 했다. 나와 에릭과 딜런의 차이점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왜 그런 생각을 하고, 실행을 하고, 많은 사람들을 끔찍한 고통 속으로 들여놨는지 공백을 전혀 좁힐 수가 없었다. 완전히 다른 존재라서? 아니면 그들이 정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건이 터진 후 모두가 그들의 동기를 찾으려고 온갖 것들을 목표로 삼았지만 가장 중요한 ‘왜?’에 대한 이유는 찾지 못했다. 그리고 이 책은 저자가 약 10년 동안 조사하고 있는 그대로를 기록하면서 ‘왜?’에 대한 많은 사실을 드러낸다.

저자는 자료 출처에 대해 ‘내가 멋대로 지어낸 문장은 없다.’고 했다. 차라리 사실이 아니었음 싶은 이 사건은 있는 그대로의 일이었다.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나 생생하고 촘촘해서 당시 상황을 들여다보고 있는 착각이 들었지만 당혹스러웠다. 에릭과 딜런의 행동은 어떤 식으로든 이해를 요구할 수 없지만 충동적인 게 아니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영민함을 범죄로 끌어들인 에릭은 많은 기록을 남겼다. 홈페이지와 일지에 세상에 대한 분노와 심지어 살인에 대한 예고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한 학생의 부모가 끈질기게 에릭을 예의 주시할 것을 경찰에 알렸지만 방관했다. 그리고 사건이 터졌을 때 관련 기록을 삭제했고 은폐하려 했다. 나중에 그 모든 사실이 밝혀졌지만 적어도 그런 살상이 일어나지 않게 조금은 예방할 수 있었다는 안타까움이 내내 마음에 맴돌았다. 하지만 총격 직 후 에릭과 딜런이 자살함으로써 책임과 비난을 향할 대상이 없어져 버렸다. ‘콜럼바인 사태의 경우, 총기 제공자를 제외하고는 재판을 받을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처럼 사건은 혼돈 그 자체였다. 언론과 경찰, 유가족과 부상당한 학생과 부모, 가해자의 부모까지 모두 얽혀들어 진흙탕 싸움이 끊이질 않았다. 결국 이 사건의 책임은 붕 떠버렸다. 혼란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당하고 있는데도 ‘왜?’ 에 대한 답은 여전히 없었다.

 

그런 와중에 ‘FBI 요원으로 왔지만 임상심리학자로서 더 중요한 역할을 하게’되는 퓨질리어가 에릭과 딜런이 남긴 기록을 보며 순차적으로 ‘왜?’에 접근해 가는 과정이 흥미로우면서도 섬뜩했다. 그는 에릭과 딜런이 남긴 모든 기록과 자료를 반복해서 보며 날카로운 분석을 한다. 에릭이 분노와 우월감으로 사이코패스의 전형적인 과정을 밟으며 서서히 범죄자로 발돋움 하는 것과 달리 딜런이 강한 우울증을 겪고 있었지만 실천력이 없었던 아이였다는 것. 여러 과정을 거쳐 결국 둘은 총을 들고 학교로 들어가 대학살을 실행했고 엄청난 결과를 만들어 버렸다는 사실에 다다랐다.

그들이 1999년 4월 20일로 점점 향해가는 과정과 사건 전 후의 수많은 사람들의 증언과 혼란이 이 한 권의 책에 촘촘하고도 낱낱이 드러나 있다. 비극의 보고서이면서, 잘 짜인 소설처럼 흡인력 있게 정점을 향해가는 이 기록 앞에 당황스러웠던 것도 사실이었다. 사건이 터졌을 때 다양한 사람들의 심리 변화와 제각각의 대응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인간군상을 철저히 경험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중요한 사실들이 은폐되고 혼란을 야기시켰다. 사람들은 믿고 싶은 대로 믿었고,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했으며 그 틈을 이용하려는 기회주의자들도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부상자를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은 고통 받고 있었다(원치 않은 부상을 입고도 자신의 삶을 잃지 않으려 했던 패트릭의 이야기는 이 비극을 경멸이 아닌 숙연함으로 만들기도 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사람들은 이 사건의 진실을 제대로 알고 있을까?  처음에는 사건 자체가 궁금했다. 그러다 이 일이 일어난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리고 정점을 향해 가는 이 보고서가 어떻게 마무리 될지 궁금했다.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사건에 대한 명확한 결론을 이 책이 알려주길 바랐다.

저자는 탄탄한 구성 속에 냉철한 기록이 섬세하게 녹아들도록 이 사건을 기록하면서 ‘철저한’ ‘자기반성’을 이끌어 내고 있다. 두 소년의 마지막 모습으로, 남겨진 사람들의 소식을 전하는 것으로 이 책은 끝이 나지만 수많은 질문과 상상, 그리고 남겨진 메시지가 이를 대변한다. 이 사건을 면밀히 관찰한 내 마음에 가장 깊이 새겨진 메시지는 ‘도와줘야 한다.’였다. 이 사건을 마주하고 수많은 내면의 변화를 겪었는데 내게 남겨진 메시지에 나 역시 놀랐다. ‘FBI는 구체적인 경고 신호의 목록을 작성’했고 ‘한 가지 사항을 지적했다. 거의 모든 경고 신호를 보이는 아이는 공격을 계획하기보다는 우울증이나 정신질환을 앓고 있을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준에 딱 들어맞는 아이는 가둬둘 것이 아니라 도와줘야 한다.’는 부분이 강렬하게 새겨졌다. 어쩌면 딜런은 에릭과 같은 사이코패스가 아니었기에 도와줬다면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에릭의 경우는 더 복잡하다. ‘에릭은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었고 미친 것도 아니었다. 사이코패스는 이와는 다른 별개의 범주’ 라고 말한 것처럼 이런 증상을 보인 아이들을 어떻게 도와야 할지 여전히 어렵다. 에릭이 남긴 섬뜩한 기록을 보고 있으면 과연 도움이라는 것이 통할지 확신할 수도 없었다.

분명 강력한 원인은 에릭의 사이코패스와 딜런의 우울증 때문이지만, 그 하나의 원인만 사건의 동기로 단정 짓기는 어렵다. ‘결정적인 고비가 된 사건이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복잡다단한 이유 혹은 본성, 환경, 시스템 그리고 유려하지 않았던 상황도 포함되기 때문이다(이는 퓨질리어의 냉정한 분석을 받아들였 뿐, 두 소년의 행동에 대한 이해와 공감의 동의어는 아니다.). 또한 누군가 그들에게 관심을 더 기울였다면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몇몇은 그들의 위험을 감지했고 알렸다. 하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이 사건을 통해 많은 부분이 재조명되고 정비되었지만 이후에도 총기 사고는 일어났고 현재에도 일어나고 있다. 내 주변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이 일을, 적어도 조금은 알아차릴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에릭과 딜런을 봐도 가능한 이야기다. 하지만 여전히 나와 우리가 그런 이들과 마주했을 때 할 수 있는 일은 충분치 않다. 많은 변화와 노력이 따라야 한다. 그것은 누군가의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일일 때 제대로 된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이 말들이 모호하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이 사건을 이야기하는 내 시선 또한 그럴 수 있다는 것도 말이다.

그럼에도 더 이상의 관찰자와 방관자가 되고 싶지는 않다. 적어도 ‘도와야 한다’는 메시지가 들어왔다면 도울 준비를 마련해야 한다. ‘폭력으로 향하는 과정은 여기저기 놓인 표지판을 따라가는 점진적인 길이’라면 그 표지판을 선한 것들로 바꾸고 때론 단속하고 도움의 손길도 내밀어야 한다. 우리가 개입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 사실을 인정하되 방치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적어도 극단적인 ‘왜?’로 향하는 길목을 차단할 수 있지 않을까? 내면의 분노가 타인의 생명을 해하지 않도록 방향을 틀 수 있지 않을까? 여전히 모호하고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남겨진 이들이 해야만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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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운 여름
위화 지음, 조성웅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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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 작가의『우리는 거대한 차이 속에 살고 있다』를 읽지 않았더라면 이 책의 존재도 몰랐을 것이다. 책이 너무 좋아서 위화 작가의 팬이 되기로 결심하고 책장을 뒤지다 이 책을 발견했다. 언제 책장에 들인지도 기억도 나지 않은 책이어서 결심하고 찾아보지 않았더라면 아마 더 오랫동안 내 책장에 숨겨져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저자 또한 독서에는 인연이 있다고 했으니 6년 전에 처음 만난 위화란 작가를 이제야 제대로 만나고 이해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 인연이 신기할 따름이고 또 한명의 좋아하는 작가가 생겼다는 사실이 더할 나위 없이 기쁘다.


내가 처음 만난 위화 작가의 작품은『4월 3일 사건』이었다. 저자에 대한 어떠한 배경지식도 없었기에 모호했고 다른 작품을 더 읽어봐야 그의 문학세계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저자나 작품에 관한 배경지식이 없어도 읽기에 무리가 없는 작품이 있는가하면 위화 작가의 작품은 배경지식을 알고 나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이 중단편집을 읽고 느꼈다. 다시『4월 3일 사건』을 꺼내 읽으면 당시에 모호하고 몽롱했던 부분들을 좀 더 또렷하게 볼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저자의 에세이를 통해서 자신의 문학세계는 물론이고 성장과정에서 드러나는 중국 역사의 배경과 소설가가 되기까지의 과정 모두를 담고 있어서 이 소설들을 읽는데 도움이 되었다.


가장 먼저는 소설의 소재가 어떠한 것이든, 독자의 예상을 깨고 일그러짐으로 진행시키든 당황하지 않게 되었다. 저자가 겪은 문화대혁명과 직업도 마음대로 가질 수 없었던 시기를 지낸 저자의 작품세계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모두 수긍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 소설들은 저자의 문학 색깔이 달라진 1990년대 이후에 쓰인 소설이라 실험적이고 심연을 거니는 듯한 모호함은 적었다. 현재 읽고 있는 위화의 또 다른 소설『재앙은 피할 수 없다』는 1980년대에 쓴 소설이라 그런 세계를 철저히 마주하고 있는 반면 이 소설은 소재와 구성이 참신하기도 했고 갑작스런 비극과 극단적이기까지 한 결말에서도 뭔지 모를 수긍을 하게 만들었다.


12년 전에 받은 편지로 기억의 다름을 경험하는 독특한 연애 이야기도 있고, 살인 사건 현장에 함께 있었던 낯선 사람들끼리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건의 이면을 추측하는 이야기도 있다.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설마 결론이 이러할까라고 추측한 순간 정말 그대로 끝이 나버려서 잠시 시간이 정지한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부부의 이야기도 있고 아이를 귀하게 키울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의 또 다른 부부의 당황스러움과 묘한 삼각관계를 이야기하는 이야기도 있다. 그 모든 이야기를 만나면서 중국 소시민들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 본 기분이 들었다. 여섯 편의 이야기로 중국 전체를 들여다봤다고 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지만 그만큼 그들의 삶을 섬세하게 녹여낸 저자 덕분에 그런 착각이 드는 것이다. 모두 색깔이 다르고 놓인 상황이 다르고 삶의 방향이 다른 것이 삶이라고 말하는 듯, 다양한 인간 군상을 만난 시간이었다.


흥미로운 여섯 편의 단편을 지나고 나면「나의 문학의 길」이란 제목의 저자의 글쓰기에 관한 글이 나온다. 저자의 에세이를 통해 이미 접한 내용이지만 마치 소설을 읽고 난 독자에게 따뜻한 밥 한 끼를 대접하듯 그의 문학의 길은 찡하고 가슴 벅차고, 문학을 사랑하는 수많은 독자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무엇이 있다. 그래서 그의 단편들로 다양한 삶을 들여다보고, 저자의 글쓰기에 관한 글로 그의 문학세계를 알고 나면 다른 작품을 더 읽어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요즘 위화 작가의 작품에 빠져 있다. 6년 전에 겨우 한 권을 읽었으나 최근에 3권을 읽었고, 중단편집과 장편소설을 동시에 읽고 있으며 이 책을 다 읽고 난 뒤에 다른 작품도 읽어볼 생각이다. 이왕이면 출간 순서대로 읽어볼 생각이고 그의 문학세계를 맘껏 유영한 뒤에 신작을 기다리는 작가 대열에 올려놓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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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7-10-07 21: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반짝님, 추석연휴 잘 보내셨나요. 좋은 주말 보내세요.^^
 
나의 처음 타이완 여행 - KID'S TRAVEL GUIDE TAIWAN, 워크북(스티커.컬러링.만들기.게임판.여행일기장) Kid's Travel Guide
Dear Kids 지음 / 말랑(mal.lang)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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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 권을 재밌게 읽었을 뿐인데 타이완이란 나라가 친근하게 느껴진다. 가보지 않은 나라라서 조금은 지난한 시선으로 책을 펼쳤는데 이렇게 재밌게 읽힐 줄 몰랐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딱 맞을 정도로 타이완에 대해서 알고 나자 직접 보면 더 신나게 구경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까지 생겼다.


조카가 교환학생으로 타이완에 가있다. 그리고 이 책을 재밌게 읽었다며 보여주었다. 책 속에서 본 먹고 싶은 음식을 보여주자 핸드폰을 뒤적거리더니 똑같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조카도 가서 먹어봤다는 야시장의 음식이었다. 포장지까지 똑같은 걸 보고 크게 웃고는 맛이 궁금하다고 하자 조카가 느낌을 말해주었다. 그 외에도 조카가 가본 곳 이야기도 해주고 가보지 않은 곳을 체크하더니 다음에 가보겠다고 했다. 2학기 수업을 들으러 얼마 전에 출국한 조카에게 다른 조카들이 내년 초에 놀러 가기로 했다. 언니네는 맞벌이라 함께 못가니 아이들만 보내서 여행시킨다고 하는데 막내가 초등학생이라 이 책을 바로 주었다. 이모가 재밌게 읽은 책이니 가고 싶은 곳 골라보고 워크북도 꼼꼼히 작성해서 여행 하고 와서 한 번 보여 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모가 가보고 싶은 곳은 예류 지질공원, 야시장, 고궁박물관을 골랐다. 막내조카는 초등학생답게 리락쿠마 캐릭터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을 가장 먼저 골랐는데 어디가 되었든 잘 체험하고 워크북도 활용 잘 하고 오라고 했다. 그리곤 어른인 내가 이 책을 재밌게 읽은 이유가 뭔지 생각해보았다. 한 나라의 역사와 문화 관광지를 한꺼번에 안다는 게 조금 지루하고 귀찮게 느껴지기도 하는데 이 책은 그 부분을 흡인력 있게 소개해 놓았다. 이를테면 지질공원이 만들어진 원인은 물론이고 그늘이 없으니 모자와 썬크림을 꼭 챙기라는 자잘한 조언이 붙어 있어서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거기다 대만의 역사를 지루하지 않게 소개해 주었는데 그 역사를 알고 박물관을 살펴본다던지 중국과의 관계를 생각해볼 때 그제야 이해가 가는 면도 있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똑같은 구성의 하와이 책을 바로 읽고 싶어졌다. 하와이 책을 펼치기도 전에 혼자서 항공권을 검색해보기도 했다. 아마도 결혼 전에 읽었더라면 단박에 신혼여행을 하와이로 정했을 거라며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지금 당장은 갈 수 없으니 우선은 책으로 실컷 여행하기로 했다. 적어도 이 책을 읽고 직접 가면 설명을 들으러 애쓰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여유가 생긴다. 타이완이 그랬다. 구석구석을 살피느라 괜히 걷지도 않은 내 다리가 아픈 것 같았지만 여행 전에 읽게 되면 더 두근거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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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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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하루키의 신간 혹은 개정판이 꾸준히 출간되고 있어 예기치 않게 그의 작품을 나름대로 열심히 읽고 있다. 그러다 이 책의 출간소식을 들었고 여행에세이라고 하기에 기대감은 폭발했다. 하루키를 썩 좋아하지 않던 내가『먼 북소리』와『하루키의 여행법』을 읽고 호감을 가졌기 때문이다. 오랜만의 여행에세이. 어떤 이야기로 채워질까 기대감에 책장을 펼쳤는데, 보스턴 첫 번째 이야기를 마주하자마자 김이 조금 새버렸다. 마지막은 조금 달랐지만 마라톤 에세이에 나왔던 내용이었고 이 책에 실린 에세이가 모두 새로운 에세이가 아님을 알아버렸다.


 

그 사실을 알고 책을 마주하는 내 눈빛에 생기를 좀 잃어버리긴 했지만 하루키는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만의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중복된 이야기일지라도 빨려들게 만드는 힘. 그리고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끝까지 읽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힘 앞에 결국 두 호흡 만에 이 책을 완독했다. 몇몇 이야기는 낯이 익었지만 나머지는 새로운 이야기였고 어떠한 목적을 띠고 어떤 곳을 여행하든 그가 경험한 생생함이 남겨 있었다. 그래서 마치 단기간에 그 모든 장소를 다 여행한 것 같은 착각이 일었고 순식간에 그 모든 걸 경험하다 보니 인생이란 게 여행하고, 맛있는 음식 먹고,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달리는 게 전부일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까지 하게 된 것이다.


 

‘여행지에서 모든 일이 잘 풀리면 그것은 여행이 아니다(137쪽)’는 하루키의 철학처럼 여행지에서 봉착한 난관에 대해 이야기도 하고, 글로는 설명할 수 없는 풍경에 대해, 이방인의 시선으로 보는 있는 그대로의 그 나라를 보기도 한다. 그래서 이 여행기를 읽는 동안 나와 저자의 국적을 잊고, 단지 한 사람의 안내자를 따라 세계 곳곳을 누비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예능 <꽃보다 청춘>에서 잠깐 마주했던 아이슬란드를 여행하는 부분이 좋았다. 신기하고 재밌는 나라였고 자연에 순응하며 최대한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며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하루키 스스로도 굉장히 개인적인 사람이라고 말하듯이 종종 독자에게 직접 말을 건네는 말투를 쓰고 있긴 하지만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여행 에세이가 아닌 경험을 기록하는 느낌이 강했다. 그 안에는 새로운 곳에 가면 자신이 좋아하는 연결고리를 찾고(마라톤, 음악, 와인 등) 그것을 어떻게 즐겼는지 이야기한다. 그렇기 때문에 유명한 곳만 줄줄이 나열한 여행기라는 것이 애초에 하루키와 잘 연관이 되질 않지만(유명하지 않는 곳을 가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그런 곳에 가더라도 자신만의 색깔로 이야기 하기에) 현장감이 느껴져 그곳을 직접 거닐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드는 것이다. 이상하게 저긴 꼭 가봐야지 하는 바람보다 하루키를 통해 이미 다 경험해 버린 기분이 들었다. 아마 내가 어떤 장소에 갔을 때 문득 ‘어, 이건 하루키 책 속에서 보았던 풍경과 비슷한데?’ 라고 생각하며 동질감을 끌어낼 그런 느낌을 가진 이야기들이었다.


 

어떤 이는 이 책을 읽고 당장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고 싶은 충동이 들 수도 있을 것이고 미래의 여행을 꿈꾸며 행복한 상상에 빠져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과연 내가 여행을 한다면 이 책 속의 하루키와 어떤 공통점을 가질 수 있을까 생각해보니 그건 바로 책이었다. 저자처럼 영어원서를 읽을 수 없으니 그런 경지는 아니더라도 번역된 훌륭한 작품들을 들고 여행하는 기쁨을 누리는 것. 저자가 여행지에서 자신의 좋아하는 연결고리를 찾았던 것처럼 그 장소에 어울리는 책을 읽고 있는 내 모습이 순간 스쳐지나가 멋쩍은 웃음이 났다. 그래서 좋은 호텔에서 느긋하게 책을 보고 있는 저자의 모습이 인상 깊었고 신혼여행 중 묵었던 풀빌라에서 남편은 혼자 수영을 하고 폭신한 침대에 누워 책을 보면서 각자 여유를 즐겼던 시간이 떠올라 이미 나도 그런 여행을 경험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지금도 신혼여행에서의 멋진 관광지보다 풀빌라에서 느긋하게 누워서 책을 보며 바라보던 바다, 책 읽기에 적합했던 폭신했던 침대(남편은 이 글을 보지 않을 것이므로)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런 나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남편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각자의 취향을 존중할 때 오히려 서로에 대한 여유가 생긴다는 사실을 알았으므로 그런 여행을 또 경험해보고 싶다. 꼭 국외가 아니더라도 근교에서도 그런 여행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내 여행 철학은 누구와 함께 있느냐에 비중이 크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들과 하는 여행은 일단 즐거울 것 같다. 모든 일이 잘 풀리지 않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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