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럼바인
데이브 컬런 지음, 장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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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쪽에 달하는 두툼한 책을 모두 읽고 덮었을 때 현실감각이 없었다. 머릿속에는 책 속의 상황이 생생하게 펼쳐져 나 혼자 낯선 곳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것 같았다. 혼란스런 상황을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 곧장 외출을 했다. 사람들 사이에 적당히 섞여 그들을 바라보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내 눈에는 지극히 평범해 보이고 그저 우연히 한 공간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누군가는 이런 사람들을 내면의 분노로 인해 없애버리고 싶은 대상으로 생각했다고 하니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실제로 실행했다. 13명의 사망자와 24명의 사상자를 낸 총기사건으로 기억하고 있지만 진실이 밝혀지면 밝혀질수록 ‘사실 총기사건이 아니었다. 실패로 끝났지만 폭탄 테러사건이었다.’는 저자의 말에 점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섬뜩했다. 1999년 4월 20일. 내가 고 3때였고 범인들은 나와 태어난 해가 같았다. 당시 내가 총격사건에 대한 뉴스를 접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어렴풋이 캐시 버넬의 순교에 관한 이야기는 들은 기억이 났다. 이 책을 통해 많은 부분이 미화되었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 그 인물이 콜럼바인 총기 사고의 희생자였다는 사실도 몰랐다. 그럼에도 섬뜩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1999년의 나는 진로에 대한 고민과 번뇌만 잔뜩 짊어지고 있었는데, 지구 반대편에 나와 나이가 같은 에릭 해리스는 사건 일 년 전부터 ‘자신이 받은 학대의 상징’인 학교를 향해 대학살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리고 딜런 클레볼드와 함께 사제폭탄과 총을 들고 학교로 들어가 사람들을 죽이고 다치게 했다. 나와 에릭과 딜런의 차이점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왜 그런 생각을 하고, 실행을 하고, 많은 사람들을 끔찍한 고통 속으로 들여놨는지 공백을 전혀 좁힐 수가 없었다. 완전히 다른 존재라서? 아니면 그들이 정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건이 터진 후 모두가 그들의 동기를 찾으려고 온갖 것들을 목표로 삼았지만 가장 중요한 ‘왜?’에 대한 이유는 찾지 못했다. 그리고 이 책은 저자가 약 10년 동안 조사하고 있는 그대로를 기록하면서 ‘왜?’에 대한 많은 사실을 드러낸다.

저자는 자료 출처에 대해 ‘내가 멋대로 지어낸 문장은 없다.’고 했다. 차라리 사실이 아니었음 싶은 이 사건은 있는 그대로의 일이었다.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나 생생하고 촘촘해서 당시 상황을 들여다보고 있는 착각이 들었지만 당혹스러웠다. 에릭과 딜런의 행동은 어떤 식으로든 이해를 요구할 수 없지만 충동적인 게 아니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영민함을 범죄로 끌어들인 에릭은 많은 기록을 남겼다. 홈페이지와 일지에 세상에 대한 분노와 심지어 살인에 대한 예고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한 학생의 부모가 끈질기게 에릭을 예의 주시할 것을 경찰에 알렸지만 방관했다. 그리고 사건이 터졌을 때 관련 기록을 삭제했고 은폐하려 했다. 나중에 그 모든 사실이 밝혀졌지만 적어도 그런 살상이 일어나지 않게 조금은 예방할 수 있었다는 안타까움이 내내 마음에 맴돌았다. 하지만 총격 직 후 에릭과 딜런이 자살함으로써 책임과 비난을 향할 대상이 없어져 버렸다. ‘콜럼바인 사태의 경우, 총기 제공자를 제외하고는 재판을 받을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처럼 사건은 혼돈 그 자체였다. 언론과 경찰, 유가족과 부상당한 학생과 부모, 가해자의 부모까지 모두 얽혀들어 진흙탕 싸움이 끊이질 않았다. 결국 이 사건의 책임은 붕 떠버렸다. 혼란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당하고 있는데도 ‘왜?’ 에 대한 답은 여전히 없었다.

 

그런 와중에 ‘FBI 요원으로 왔지만 임상심리학자로서 더 중요한 역할을 하게’되는 퓨질리어가 에릭과 딜런이 남긴 기록을 보며 순차적으로 ‘왜?’에 접근해 가는 과정이 흥미로우면서도 섬뜩했다. 그는 에릭과 딜런이 남긴 모든 기록과 자료를 반복해서 보며 날카로운 분석을 한다. 에릭이 분노와 우월감으로 사이코패스의 전형적인 과정을 밟으며 서서히 범죄자로 발돋움 하는 것과 달리 딜런이 강한 우울증을 겪고 있었지만 실천력이 없었던 아이였다는 것. 여러 과정을 거쳐 결국 둘은 총을 들고 학교로 들어가 대학살을 실행했고 엄청난 결과를 만들어 버렸다는 사실에 다다랐다.

그들이 1999년 4월 20일로 점점 향해가는 과정과 사건 전 후의 수많은 사람들의 증언과 혼란이 이 한 권의 책에 촘촘하고도 낱낱이 드러나 있다. 비극의 보고서이면서, 잘 짜인 소설처럼 흡인력 있게 정점을 향해가는 이 기록 앞에 당황스러웠던 것도 사실이었다. 사건이 터졌을 때 다양한 사람들의 심리 변화와 제각각의 대응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인간군상을 철저히 경험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중요한 사실들이 은폐되고 혼란을 야기시켰다. 사람들은 믿고 싶은 대로 믿었고,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했으며 그 틈을 이용하려는 기회주의자들도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부상자를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은 고통 받고 있었다(원치 않은 부상을 입고도 자신의 삶을 잃지 않으려 했던 패트릭의 이야기는 이 비극을 경멸이 아닌 숙연함으로 만들기도 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사람들은 이 사건의 진실을 제대로 알고 있을까?  처음에는 사건 자체가 궁금했다. 그러다 이 일이 일어난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리고 정점을 향해 가는 이 보고서가 어떻게 마무리 될지 궁금했다.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사건에 대한 명확한 결론을 이 책이 알려주길 바랐다.

저자는 탄탄한 구성 속에 냉철한 기록이 섬세하게 녹아들도록 이 사건을 기록하면서 ‘철저한’ ‘자기반성’을 이끌어 내고 있다. 두 소년의 마지막 모습으로, 남겨진 사람들의 소식을 전하는 것으로 이 책은 끝이 나지만 수많은 질문과 상상, 그리고 남겨진 메시지가 이를 대변한다. 이 사건을 면밀히 관찰한 내 마음에 가장 깊이 새겨진 메시지는 ‘도와줘야 한다.’였다. 이 사건을 마주하고 수많은 내면의 변화를 겪었는데 내게 남겨진 메시지에 나 역시 놀랐다. ‘FBI는 구체적인 경고 신호의 목록을 작성’했고 ‘한 가지 사항을 지적했다. 거의 모든 경고 신호를 보이는 아이는 공격을 계획하기보다는 우울증이나 정신질환을 앓고 있을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준에 딱 들어맞는 아이는 가둬둘 것이 아니라 도와줘야 한다.’는 부분이 강렬하게 새겨졌다. 어쩌면 딜런은 에릭과 같은 사이코패스가 아니었기에 도와줬다면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에릭의 경우는 더 복잡하다. ‘에릭은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었고 미친 것도 아니었다. 사이코패스는 이와는 다른 별개의 범주’ 라고 말한 것처럼 이런 증상을 보인 아이들을 어떻게 도와야 할지 여전히 어렵다. 에릭이 남긴 섬뜩한 기록을 보고 있으면 과연 도움이라는 것이 통할지 확신할 수도 없었다.

분명 강력한 원인은 에릭의 사이코패스와 딜런의 우울증 때문이지만, 그 하나의 원인만 사건의 동기로 단정 짓기는 어렵다. ‘결정적인 고비가 된 사건이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복잡다단한 이유 혹은 본성, 환경, 시스템 그리고 유려하지 않았던 상황도 포함되기 때문이다(이는 퓨질리어의 냉정한 분석을 받아들였 뿐, 두 소년의 행동에 대한 이해와 공감의 동의어는 아니다.). 또한 누군가 그들에게 관심을 더 기울였다면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몇몇은 그들의 위험을 감지했고 알렸다. 하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이 사건을 통해 많은 부분이 재조명되고 정비되었지만 이후에도 총기 사고는 일어났고 현재에도 일어나고 있다. 내 주변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이 일을, 적어도 조금은 알아차릴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에릭과 딜런을 봐도 가능한 이야기다. 하지만 여전히 나와 우리가 그런 이들과 마주했을 때 할 수 있는 일은 충분치 않다. 많은 변화와 노력이 따라야 한다. 그것은 누군가의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일일 때 제대로 된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이 말들이 모호하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이 사건을 이야기하는 내 시선 또한 그럴 수 있다는 것도 말이다.

그럼에도 더 이상의 관찰자와 방관자가 되고 싶지는 않다. 적어도 ‘도와야 한다’는 메시지가 들어왔다면 도울 준비를 마련해야 한다. ‘폭력으로 향하는 과정은 여기저기 놓인 표지판을 따라가는 점진적인 길이’라면 그 표지판을 선한 것들로 바꾸고 때론 단속하고 도움의 손길도 내밀어야 한다. 우리가 개입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 사실을 인정하되 방치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적어도 극단적인 ‘왜?’로 향하는 길목을 차단할 수 있지 않을까? 내면의 분노가 타인의 생명을 해하지 않도록 방향을 틀 수 있지 않을까? 여전히 모호하고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남겨진 이들이 해야만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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