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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루몽 9
조설근 외 지음, 안의운 외 옮김 / 청계(휴먼필드) / 2007년 1월
평점 :
3월에 읽은 책들을 정리하면서, 4월에는 무슨 책을 읽을지 나름대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다 정말 오랫동안 미뤄왔던 독서를 4월에 해야겠다고 맘먹고, 책장에서 약 20권 가량의 책을 골라냈다. 다름 아닌 읽다 만 장편소설들이었다. 먼저 선택된 아리랑, 요셉과 그 형제들, 도스또예프스끼전집, 홍루몽을 꺼내고 보니 그야말로 책 탑을 이루고 있었다. 도대체 몇 년 째 이 책들을 방치했으며, 어느 때 꺼내더라도 이야기가 이어지길 바랐는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쉬었다. 그 책들만 바라봐도 마음이 묵직해 지는 게, 완독하지 못했다는 자책과 이미 읽은 부분에 대한 기억상실이 나를 더 짓눌렀다. 그만큼 쉽게 손대지 못하고 차일피일 미루다 이제야 큰 맘 먹고 읽기를 자청했으니, 이번에는 꼭 완독하리라 굳게 맘먹었다.
읽다 만 장편들을 읽자는 거창한 포부아래 먼저 집어든 것은 4권을 남겨두고 2007년 여름에 읽기를 멈춰버린 홍루몽이었다. 꺼내 놓은 책들 중에서 가장 두께가 얇기도 했거니와 재미있게 읽은 기억 때문이었다. 지난 리뷰를 뒤져 줄거리라도 챙겨볼까 하는 생각도 잠시, 귀찮다는 핑계로 무작정 책을 꺼내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책을 펴자마자 주인공들 이름도 헛갈려 1권을 꺼내 인물사전의 도움을 받았다. 그렇게 대충 인물을 파악하고는 나머지 기억은 책의 흐름에 맡겨보기로 하고 계속 읽어 나갔다. 나의 걱정과는 달리 생각보다 재미있어서 순식간에 읽어버렸다. 오랫동안 방치해 둔 시간이 민망할 정도의 읽힘이라, 남은 3권에 대한 열망이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타올랐다.
홍루몽 9권을 읽기 시작하긴 했으나 그 전의 줄거리가 기억나지 않은 것이 많아 책을 읽으면서 유추해 나갔다. 줄거리도 중요하지만 책 속에 담긴 자잘한 일상과 대화 자체가 중요한 사료가 될 정도였으므로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즐거움을 만끽했다. 당시 사람들의 생활풍습과 문화, 사상, 시대의 흐름을 통해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해 알 수 있었고, 대관원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다양한 사건과 인간군상을 통해 자연스레 삶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책의 뒷면만 봐도 '『홍루몽』은 적어도 다섯 번은 읽어야 한다.'고 말한 마오쩌둥이나 '『홍루몽』이 나타난 뒤로 전통적인 사상과 작법이 모두 타파되었다.' 라고 말한 루쉰처럼 중국 고전에 있어서 홍루몽의 위치는 확고한 것 같다.
삼국지보다 더 많이 읽혔다고 하는 홍루몽이 인기가 있는 것은 봉건시대 중국인들의 삶을 농밀하게 그려내고, 그 안에 축약된 민족의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졌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시대적 배경이 달라 많은 부분 공감할 수 없더라도, 윗세대들이 살아왔던 삶을 지켜본다는 것은 한편으로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무엇보다 역사적 의의나, 방대한 사료적 가치를 떠나 재미나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나에게는 여전히 그네들의 문화와 생활양식이 생경하지만 사람이 사는 곳의 풍경은 거의 비슷한 것 같아 순식간에 빠져들 수 있었다. 그래도 무언가 아쉬워 홍루몽 8권의 리뷰를 들춰보니 점점 비극으로 치닫는 흐름에 지쳐버린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9권을 집어 들어서인지 그런 감정이 남아있을 리 없어 홍루몽 10권을 마주하려는 시점에서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굳이 홍루몽 8권의 리뷰를 들춰보지 않더라도, 9권을 통해 조금씩 가세가 기울고, 불행은 거침없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홍루몽의 중심선상에 있는 가보옥과 임대옥의 사랑은 점점 정점을 끝을 향해가고 있었다. 인물사전에 간략한 설명에 결말이 이미 나와 있어 살짝 김이 빠지긴 해도, 직접 읽는 즐거움이 다르기 때문에 보옥과 대옥의 어긋난 사랑은 피하고만 싶었다. 평화롭다고 할 수 없는 날들이 이어지는 가운데, 보옥과 대옥은 하루하루 성장해서 혼사를 치룰 수 있는 나이가 되어갔다. 여전히 감수성이 예민하고 철부지인 가옥은 집안의 많은 시녀들과 누이들, 여자 어른들 틈바구니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보옥은 아버지의 충고로 학숙에 다니며 공부를 하게 되었고, 대옥은 늘 약해빠진 몸을 건사하며 보옥을 마음에 품은 채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었다.
많은 친인척과 가족이 함께 사는 가씨 집안에서는 많은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후에 보옥과 혼인하게 될 설보채의 오빠인 설반이 살인을 저지르는가 하면, 설반의 부인들이 사이가 좋지 않아 늘 시끄러웠다. 거기다 원춘 귀비가 몸이 아팠고, 그로 인해 서서히 가씨 집안의 몰락이 눈앞에 보이는 듯 했다. 어른들의 일보다 가옥과 대옥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청춘남녀의 이야기에 더 관심이 쏠려 있었기에, 너무 많이 변해버린 분위기가 낯설어 그들이 여러 자매들과 함께 어울렸던 시기가 생각나기도 했다.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기며, 젊음을 만끽하던 그때는 무척 즐거운 시간들의 연속이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그들이 조금씩 변해가게 만들었고, 보옥과 대옥은 서로를 향한 마음이 깊어갔지만 어른들에게 관철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조금씩 보옥의 혼사 문제가 들춰지면서 대옥은 오해를 하여 몸을 상하게 만들기도 했고, 그 사실을 모른 채 보옥은 여전히 철부지마냥 대관원을 훑고 다녔다.
어른들은 보옥의 짝으로 설보채를 염두에 두는 것이 조금씩 드러남에 따라 그 사실이 보옥과 대옥에게 알려지면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 뻔했기에 괜히 우울해지기도 했다. 어차피 보옥과 대옥의 사랑은 비극을 맞이하고, 대옥의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즐거움으로 대했던 9권을 읽고 나자 다음 이야기를 마주할 자신이 없어졌다. 그러나 그들이 주인공이라 해도, 홍루몽을 보옥과 대옥의 사랑이야기로 치부할 수 없는 노릇이기에 대관원 안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인간군상과 가씨 집안의 흥망성쇠를 끝까지 지켜보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대돈방의 삽화가 한껏 흥취를 더해주었고, 이 방대한 이야기의 대단원이 어떻게 마무리되어질지 여전히 궁금하다. 어렵게 꺼내 힘겹게 재회한 만큼, 홍루몽을 끝까지 완독하고 내 나름대로의 마무리도 잘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