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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손잡이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2
니콜라이 레스코프 지음, 이상훈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요즘같이 세계문학의 풍년인 시기가 있을까 싶다. 여러 출판사에서 앞 다투어 세계문학 전집 시리즈를 내놓으면서, 이미 읽은 작품일지라도 세트로 모으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시리즈가 통째로 책장에 있을 때의 그 뿌듯함을 느끼고 싶었지만, 내 책장에 있는 책이나 읽자며 무관심한 척 갖은 애를 쓰곤 한다. 그럼에도 외면할 수 없는 책들을 마주하곤 하는데, 내가 좋아하는 저자의 색다른 작품이거나 러시아 문학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문학동네에서 나온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왼손잡이>가 그랬다. 워낙 러시아 문학을 좋아하기도 하거니와 내게는 비교적 생소한 작가에 속해서 무조건 읽어야 한다는 생각에 급 흥분을 하고 말았다.
저자도, 이 책에 실린 세 편의 단편도 모두 생소한 가운데 무척 설렌 마음으로 책을 읽게 되었다. 또 한명의 러시아 작가를 알아간다는 기쁨도 있었고, 유명한 러시아 작품을 우려먹는 것이 아닌 초역이 된 작품이 실려 있어 더 기대를 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나 다를까 세 편의 단편 모두 흡족할 만한 작품이었고 한 권의 책을 달게 읽은 것 같아 뿌듯했다. 많은 책을 읽어도 만족스러운 책들을 만나는 일은 드문데, <왼손잡이>는 최근에 읽은 작품 중에서도 단연 최고였다고 말하고 싶다.
이 책에 수록된 <왼손잡이>, <분장예술가>, <봉인된 천사> 모두 러시아인의 기질을 잘 드러내는 작품이었다. 러시아 작가 중 도스또예프스끼를 가장 좋아하는 이유도 보통 사람들의 내면을 파고들며 장황스러울 정도로 러시아 인의 삶을 말하고 있어서인데, 레스코프의 작품에서도 동일한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세 편의 단편에서는 예술이 밑바탕이 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예술이 밑바탕이 되었다고 해서 현재의 시선으로 작품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눈에 띄지 않는 보통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예술에 대한 에피소드로 받아들여야 작품의 진정한 의미를 느낄 수 있다.
첫 단편인 <왼손잡이>는 영국에서 제조된 인공 벼룩에 맞선 한 대장장이에 관한 이야기다. 알렉산드르 2세가 영국을 방문했을 당시 영국인들은 자신들의 기술을 자랑하고자 황제에게 인공 벼룩을 선물한다. 그 벼룩은 현미경으로 보아야 할 정도로 작았고 태엽을 감으면 춤을 추기도 하는 정교하기 이를 데 없는 물건이었다. 황제는 그 기이함에 놀라 벼룩을 거금을 주고 사오지만, 같이 동행했던 플라토프 장군은 러시아인들도 그에 못지않은 기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그러나 황제의 죽음으로 실현되지 못했고, 기억에서 묻힌 벼룩은 우연히 다시 들춰져 플라토프 장군에 의해 툴라의 대장장이에게 맡겨진다. 플라토프 장군은 러시아의 우수성을 드러낼 수 있을 거라 믿고 그들에게 신신당부를 한다.
노력 끝에 무언가를 만들어 낸 그들은 벼룩을 바쳤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장군은 불 같이 화를 낸다. 하지만 툴라의 대장장이들은 별다른 도구도 없이 벼룩의 발에 굽을 달아 자신들의 이니셜을 새겼고, 그 사실이 밝혀지자 그것을 영국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대장장이 가운데 한명인 왼손잡이도 영국에 가게 된다. 벼룩을 보고 놀란 영국인들이 왼손잡이를 붙들려고 하지만 그는 막무가내로 러시아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영국에서 알아낸 총기 간수 비법을 황제에게 알려주기 위해서였지만 결국 그의 뜻은 이뤄지지 못하고 허망하게 죽고 만다. 그 총기 간수 비법이 알려졌더라면 크림 전쟁에서 패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저자의 말은 씁쓸함만 남겼다.
<분장예술가>는 농노 신분의 분장사 아르카지와 여배우 류보피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아르카지와 류보피가 하는 일 자체가 극단에 몸담고 있었기에, 이 단편을 읽으면서 어렵지 않게 <왼손잡이>의 예술성과 연결시킬 수 있었다.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의 가진 예술에 대한 속성을 내세우면서도 결국은 비극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어 당시의 상황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아르카지와 류보피는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있었고, 주인 백작으로 인해 류보피가 위험에 처하자 아르카지는 그녀를 데리고 도망친다. 그 벌로 아르카지는 고문을 당한 뒤 전쟁터에 나가게 되고 그런 그를 기다리며 류보피는 겨우겨우 살아가고 있었다. 기다림 끝에 아르카지가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왔지만 운명은 가혹하게도 그녀와 만나기 하루 전날, 머무르던 여관에서 강도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그 고통을 술로 달래면서 오랜 세월을 견뎌온 류보피의 이야기는 당시의 농노제와 삶의 가혹함을 돌아보게 하면서 마음을 아프게 했다.
세 작품 중에서 보통 사람들의 예술적인 면모를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낸 작품은 <봉인된 천사>였다. 분량도 가장 많을 뿐더러, 한 유랑 석공 단체의 러시아 구교도들이 이콘(성화상)을 되찾기 위한 과정을 그리고 있었는데, 그들의 보수적인 신앙이 오히려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일의 특징상 무리를 지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이 아끼는 이콘이 이적을 일으킨다고 믿고 있는 욕심 많은 한 귀부인으로 인해 관청에 이콘을 빼앗기고 만다. 게다가 납으로 봉인까지 해버린 이콘을 찾기 위해 그들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콘의 원본을 찾기 위해서는 그와 똑같은 이콘을 그린 뒤 바꿔치기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천사 이콘은 그리는 방법도 까다롭고, 그릴 수 있는 화가들도 드물었기에 과연 이콘을 찾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이콘을 어떻게 그려야 하며, 어떤 재료를 써야하는지에 대한 그들의 지식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들이야말로 평범한 사람에 속하면서도 예술에 대한 지식이 고집스러울 정도로 뛰어났고, 왜 이콘이 구교도들에게 중요한지를 드러내는 부분에서는 신앙의 신실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들의 태도에 감동한 영국인 감독을 비롯해 여러 사람들이 그들을 도와주려 했지만, 그들만의 방식에 답답하고 가슴이 조마조마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렵게 구한 이콘화가가 떠날 뻔도 했고, 실수로 인해 그림 바꿔치기에 실패할 수도 있었다. 그림을 안고 강을 건너는 장면에서는 천사가 도움을 줬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을 명장면이 펼쳐지기도 했다 해설을 통해 러시아 정교회에서 구교도로 분리된 배경을 알고 나니 그들의 태도가 좀 더 이해가 갔으나, 이콘을 되찾음으로 인해 그들 모두가 정교회로 개종을 하는 사건은 개연성이 부족한 옥의 티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구교도들의 이콘을 찾는 과정에서 하나의 뿌리로 인해 나눠졌던 종교의 갈등을 해소하는 걸로도 보였고, 신앙으로 인해 삶의 의미가 되새겨지는 것으로도 보였다. 세 편의 단편이 보통 사람들의 예술에 밑바탕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날 정도로 뛰어났고, 무엇보다 러시아 사람들의 기질을 있는 그대로 보여줘서 색다른 동질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들의 사투리나 액자형식으로 서술된 기법이 재미를 더했고 동시대를 살아간 사람인양 그들이 속한 세계로 빨려들기 바빴다. 그럼에도 저자는 이념 논쟁과 검열로 인해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삶 중반부터 조금씩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작가로써 평탄하지 않는 삶을 살았지만 그가 남긴 작품을 통해 러시아인의 기질과 이야기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어 나로서는 감사할 따름이다. 앞으로 출간될 세계문학 시리즈에 이렇게 숨은 작품이 많이 엮어져 독자들에게 즐거움을 안겨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