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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시골에서 자란 탓인지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반딧불이』 가 친근하게 다가왔다. 버스정류장에서 한참을 걸어야 집으로 향할 수 있었던 내게 여름밤에 흔히 볼 수 있는 게 반딧불이었다. 캄캄한 밤길을 걷다보면 듬성듬성 나타나는 반딧불이 들이 약간 무서워진다. 그러다 반딧불이와 함께 몇 번 밤길을 걷다보면 시골의 또 다른 매력으로 간주하게 된다. 그래서일까. 유난히 환상적인 분위기가 짙었던 『반딧불이』를 읽으면서 밤길의 그 묘한 특별함이 내내 생각났다.
『상실의 시대』 의 모티브가 된 중편이 『반딧불이』 라고 하니, 어떤 분위기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대학시절 살던 기숙사에서 룸메이트에게 받은 반딧불이를 날려 보내며 그녀를 생각한다. 절친의 여자친구였던 그녀는 친구가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을 택하자 마음을 닫아 버린다. 그런 그녀와 재회해 데이트를 하면서 조금씩 나아진 듯 했으나 그녀는 잠적하고, 여전히 그녀를 기다리는 자신을 보게 된다. 그 모든 추억들을 룸메이트가 건네 준 반딧불이에 덧입혀, 그녀에 대한 기억을 덜어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반딧불이』 에 등장하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나 그의 여자친구, 반딧불이를 건네 준 룸메이트 등, 평범을 가미한 그들이 만들어 내는 일상은 특별하다. 『헛간을 태우다』 에 등장하는 내연녀인 그녀의 새 남자친구, 『춤추는 난쟁이』 속의 기묘한 운명을 가진 난쟁이, 『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 의 귀가 아픈 사촌과 친구의 여자친구의 병문안을 갔던 경험의 나열은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를 만드는 듯 하면서도 연관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세 가지의 독일 환상』 처럼 상상속의 세계의 이야기가 아닌 일상이 빚어내는 설명할 수 없는 묘함을 잘 끌어내고 있는 느낌이었다.
추억하고, 이야기를 듣고, 계기를 끌어내는 소재들이 그러했고, 그것을 적절히 섞어낸 저자의 기발함이 돋보였다. 나였다면 헛간을 태우는 남자,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귀가 아파 자신과 종종 병원을 가는 사촌, 친한 친구의 여자친구와의 데이트를 이토록 자연스러우면서도 이야기의 힘을 빌려 생생함을 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어딘가 끊기고, 개인적인 감정이 잔뜩 들어간 뭉뚱그려진 이야기를 전달했을 것이다. 저자의 능력에 굳이 나의 보잘것없는 언변을 덧붙이자는 것이 아니라 하루키이기에 이런 소재로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이야기들을 밤에 읽어서인지, 책 제목을 보고 유년시절에 보았던 반딧불이와 함께 걷는 밤길을 떠올려서인지, 환상적인 분위기가 감돌았음에도 이야기와 나 사이에 큰 강이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은 덜했다. 소설이라고 인식하고 읽는 작품보다, 현실을 인식하되 내가 경험하지 못한 불가능할 것 같은 세계의 이야기를 읽는다는 기분으로 읽을 수 있는 작품들을 좋아한다. 『반딧불이』 는 그런 부분에서 나의 충족감을 채워주었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다양한 면모를 만나게 된 것은 물론이었다. 『태엽감는 새』 의 모티브가 되었던 『태엽감는 새와 화요일의 여자들』 처럼, 역시 『상실의 시대』 의 모티프가 된 『반딧불이』 를 읽을 수 있어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