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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그라운드 ㅣ 언더그라운드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평점 :
이 책을 마주할 때만 해도 책을 읽다 눈물을 흘리게 될 줄은 몰랐다. 1995년 3월 20일, 일본의 지하철역에 옴 진리교 소행으로 사린이라는 독가스가 뿌려져 많은 사상자를 낸 사건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 안타까운 사연들이 많이 나오지만 피해자들의 증언을 읽어나가다 보면 내가 눈물을 흘릴 이유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랬기에 뜻하지 않은 눈물은 수많은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얻게 된 다양한 감정들을 정리하는 계기가 되었다. 처음엔 당시의 사건 상황으로, 그다음엔 피해자들의 제각각인 사연으로, 그리고 마지막은 그래도 희망으로 점철되는 결말(이 사건에 결말이 있을까 싶지만)로 다가간 기분이다. 벌써 15년 전 사건이라고, 나와는 동떨어진 과거의 이야기라고 치부해 버리지 않고 그 가운데서도 희망을 건져 올릴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TV에서 연일 속보로 보여주었기 때문인지 사건이 일어난 당시 중학교 2학년이었던 나에게도 희미하게나마 기억이 남아있다. 충격적인 사건이긴 했으나 당시에 지하철을 한 번도 타보지 않은 내게는 먼 얘기로만 느껴졌었다. 아마도 어린 마음에 '일본에서는 별의 별 일이 다 일어나는구나.'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던 것 같다. 그렇게 15년이 지난 뒤 그 사건을 다시 마주하게 되니 이런 만남이 신기하면서도 철없었던 당시의 내가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이 책을 읽게 된 주요 장소가 지하철이었고, 책을 읽는 도중에 지하철이 고장 나서 목적지까지 운행되지 않는다는 방송을 듣기도 했다. 그제야 당시 사린사건을 만났던 사람들이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이었으며, 무방비했고, 증상이 나타났을 때의 두려움이 얼마나 컸는지가 느껴졌다. <언더그라운드>를 읽고 있어 과민반응을 했을 수도 있으나, 바로 지하철에서 내려 다음 열차를 갈아타면서 피해자들이 불특정 다수였다는 점, 특정 종교집단이 계획적으로 노렸다는 점을 결코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7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을 읽으면서 정작 저자가 이 책을 쓰기로 한 출발점(다른 이유들도 있었지만)이 되었던 이 질문을 나는 하지 않은 것 같다. 당시 상황이 궁금하긴 했으나 단순하게 사망자가 별로 없다는 것에 나름 안도했던 것 같다. 12명의 사망자 뒤에는 수백 명의 사상자가 있었음에도 그들이 겪는 고통은 표면적으로 다가오지 않아 정황만 알려고 기를 썼다. 그래서인지 초반에 이어지는 똑같은 증언들이 별 특징 없이 느껴졌다. 이미 오래전의 일이라고, 증언한 사람들도 기억에서 희미해졌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책이 끝을 향해 갈수록 수많은 사람들의 증언을 듣고 있노라니 그 사건이 그들에게 미친 영향이 실로 방대하면서도 치명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 그 사건으로 인해 인생이 바뀌고,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분노를 떠안고 살아가야 했던 사람들의 고충이 느껴졌다. 15년이 지난 후에 그 사람들의 사연을 읽었다고 해도, 생생한 사건의 경험은 15년 동안 축적되었을 거란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정말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대부분 멀리서 출퇴근하는 회사원들이 대부분이라 늘 복잡한 지하철에 대한 고충이 가득했다. 그것을 운명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날따라 일이 생겨 우연히 타게 된 사람들, 평소와는 다르게 몇 분 차이로 사린이 뿌려진 지하철을 탄 사람들, 늘 지정된 자리에 앉았다는 이유로 사린가스를 마신 사람들. 사린가스로 인해 중상을 입게 된 아카시 시즈코 씨의 오빠는 '운이 나빴다는 걸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문제입니다.' 라고 말한다. 사건을 당하기 전날 여동생과 가족들이 모여 식사를 하면서 '이런 걸 행복이라고 하는 거야.' 말했는데 다음 날 여동생은 사린 사건에 휘말리고 만다. 저자는 그런 시즈코 씨를 인터뷰 하러 가면서 '나는 과연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이 취재를 해 낼 수 있을까?' 란 고민을 하게 된다. 시즈코 씨의 인터뷰를 읽으면서 처음으로 저자의 고민이 이해가 갔다.
다양한 사람들의 증언을 들으면서 인생도, 생각도, 증상과 후유증도 제각각인 것을 보며 그들에게 이 사건은 결코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옴 진리교에 대한 분노를 대부분 드러냈으나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고, 목숨을 잃지 않고 이 정도인 것에 감사하는 사람들 등 불특정 다수였던 만큼 다양한 생각과 인생들이 엉켜있었다. 저자는 그 모든 것을 기록해 가면서 짧은 질문들을 던졌고, 대부분 그 사람들의 인생 이야기나 그날의 상황, 현재의 상황에 대해 듣는 편이었다. 처음엔 이 사람들이 살아온 삶이 길게 펼쳐지는 것을 보고, 이것이 사린 사건과 무슨 연관이 있을까란 의문을 갖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린 사건이 그들의 삶에 깊은 영향을 끼친 것을 느끼고, 저자는 그것을 온전히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한 증언자의 말처럼 사린사건을 통해 목숨을 잃은 사람들은 분들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희생당했는가.' 라는 것이다. <언더그라운드>는 지하철 사린 사건을 지켜보는 독자에게 수많은 의문과 질문을 던지지만, 정작 명확한 결론을 끌어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문제제기를 던지는 사람들이 많았다. 일본이 치안이 가장 안전한 나라라고 안심하는 사이 그것을 노리고 사건을 일으킨 옴 진리교, 큰 사건이 터졌을 때 체계적이지 않은 시스템, 그 전에 옴 진리교가 사린 사건을 한 번 더 일으켰는데 그걸 철저히 조사하지 않아 대형 사고가 터졌다는 사람들. 자신은 이제 괜찮으니 별 상관없다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후유증 가운데도 의식이 깨어있고 그것을 개정하길 요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았구나.'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또한 다른 이들을 구하기 위해 희생된 분들을 기억하는 사람들, 자신과 같은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걱정하는 사람들, 후유증을 견딜 수 있도록 도와준 동료와 가족에게 고마워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 사건으로 인해 사람들의 마음까지 삭막하게 바꿔놓지는 못했다는, 어쩌면 섣부른 결론을 내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다 고 와다 에이지 씨의 부인의 인터뷰를 읽으면서 참 많은 눈물을 흘렸다. 와다 에이지 씨의 부모님의 인터뷰를 읽으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금치 못했지만, 당시 임신 중이었던 와다 요시코씨는 남편의 사망 소식을 듣고 후에 혼자 딸을 낳았다. 남편을 만나게 된 이야기,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담담히 하면서 사건이 일어났던 당일 유난히 다정했던 남편을 그리워했다. 그리고 딸에게 아빠 이야기를 해주며 잠들기 전에 아빠 사진을 보며 인사하는 딸에게 가련함을 느끼는 보통 여인이었다. 남편을 잃어버려 옴 진리교의 교주에 대한 분노는 강했지만, 딸아이를 키우면서 달라지는 자신의 모습, 또한 삶을 이어가려는 의지가 돋보여 담담한 그녀의 말투와 고백에 눈물을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와다 요시코 씨가 안됐다는 마음도 있었지만, 그것보다 남편을 잃은 상황을 견뎌내고 스스로 일어서려 하는 모습이 너무 처연했다. 그랬기에 와다 요시코씨의 인터뷰가 마지막에 있었던 것이 이 사건을 극단적으로 끌어내지 않고 위로를 받게 해주었는지도 모른다.
책을 읽으면서 찾아볼 수도 있었으나 책을 다 읽은 후에 이 사건을 검색해 보았다. 사람들이 묘사했던 대로 아수라장이었던 당시의 사진을 보면서 인터뷰 한 사람들이 있을까란 생각이 들어 열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면서도 와다 요시코 씨의 딸이 이제 내가 사린 사건 소식을 들었던 나이쯤 되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만감이 교차했다. 아빠를 잃어버린 아이, 남편을 잃어버린 아내, 아들을 잃어버린 부모. 그들의 증언은 마음 아프고 슬펐지만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갈 것을 다짐하는 모습에 도리어 힘을 얻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안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통해 자신의 상처를 치유 받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이 책의 의미는 남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이 책에 단순히 피해자들의 증언을 기록해 간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훗날 『1Q84』를 쓰게 된 계기가 된 것만큼 저자는 『언더그라운드』를 통해 삭막해져 가는 도시의 불안한 사람들을 그렸고, 어떠한 글을 써야 하는지에 대한 지표를 삼게 된 것 같다. 하루키 마니아를 가르는 기준이 <언더그라운드>라고들 하는데, 그의 작품을 많이 읽어보지 않은 나로서도 그 이유를 알 것 같은 분명함이 드러나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