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세바스찬과 검둥이 마술사
대니얼 월리스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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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명절 때 TV에서 해주는 마술쇼나, 예능프로그램에서 보여주는 마술에 늘 흥미를 못 느꼈다. 분명 어딘가에 속임수가 있을 거라며 허점을 살피는 게 마술을 보는 것보다 더 열심이었다. 시간이 흘러도 마술에는 여전히 매력을 못 느끼면서 『미스터 세바스찬과 검둥이 마술사』를 집어든 것은 순전히 저자 때문이었다. 영화 <빅 피쉬>로 더 유명한 작품이자 국내에는 『큰 물고기』로 번역된 저자의 작품을 읽고 아버지에 대한 울림을 주는 글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저자의 작품이 출간된 것을 보며, 내가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마술사'가 제목에 들어가 있으면서도 아무런 망설임 없이 책을 펼칠 수 있었다.
 

  어떤 작가를 알고 작품을 대한다는 것은 때에 따라 장점으로 다가올 수도 있고, 낯선 작가를 대하는 것보다 못한 단점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이 책을 읽을 때는 전자에 속했는데 나의 기대를 뛰어넘어 대니얼 월리스란 작가를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된 작품이 되었다. 이야기의 힘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는 걸 넘치도록 보여준 작품이었다. 이야기 자체가 큰 힘이 되어 작품을 지배한다는 것을 느껴본 것이 얼마만이던가. 저자는 『미스터 세바스찬과 검둥이 마술사』를 통해 『큰 물고기』보다 더한 감동을 주었고, 자칫 복잡할 수도 있는 이야기의 흐름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것을 보며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설의 주인공은 검둥이 마술사 헨리 워커이다. 그가 몸담았던 서커스단의 동료이자 기인들이 기억하는 헨리 워커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검둥이 마술사란 특별한 이미지를 가지고도 제대로 마술을 하지 못해 늘 웃음거리가 되던 헨리 워커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사람들은 기억하고 것이 각자 달랐다. 그래서 그들이 알고 있는 헨리 워커에 대해서 얘기하게 되는데, 그것은 기이한 이야기일 수도 있고 슬픈 이야기일 수도 있으며 끝내 진실을 알 수 없는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마술쇼에서 동네 건달들을 창피 주었다는 이유로 린치를 당한 헨리 워커는 그들에 의해서 흑인이 아님이 밝혀진다. 지금껏 흑인이라고 믿어왔던 그는 왜 백인이면서 흑인 마술사로 살아가야 했던 것일까.

 

  그가 흑인 마술사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가 펼쳐지고, 그가 어릴 적 잃어버린 여동생 해나의 이야기가 또 다른 중심축으로 펼쳐진다. 경제공항의 위기로 한순간에 몰락해 버린 아버지와 함께 호텔 쪽방에서 살아가던 헨리와 해나는 어느 날 702호에서 이상하고도 신기한 사람 미스터 세바스찬을 만나게 된다. 그의 이름이 미스터 세바스찬인지도 확실하지 않은 가운데 헨리는 그에게서 마술을 배우게 되고, 그가 부린 마술로 인해 여동생 해나와 영영 헤어지게 된다. 그가 평생 잊지 못하는 여동생 해나, 흑인 마술사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운명, 때로는 마술사로 명성을 얻긴 했지만 해나를 떠오르게 만드는 메리엔과 사랑에 빠지기도 하는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문 듯 쉼 없이 독자를 안내한다.

 

  마치 양파껍질을 벗겨도 벗겨도 양파가 나오는 것처럼, 뫼비우스 띠처럼 돌고 돌아도 어디가 끝이고 시작인지 모르는 것처럼 헨리 워커의 이야기가 딱 그랬다. 헨리 워커의 인생의 정점도 아닌, 오히려 초라할 대로 초라한 검둥이 마술사의 끄트머리에서 이야기는 시작되어, 그의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 현실과 마술이 섞인 몽상적인 이야기로 향한다. 어떠한 이야기를 할 때 자신이 말하고 싶은 부분부터 시작해 하나하나 이야기를 완성해 가는 것처럼, 헨리 워커의 인생은 그렇게 미미한 곳에서 시작돼 거대하게 펼쳐졌다 날기 위한 발돋움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헨리 워커가 날 수 있는 현실은 해나와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일지도 모르나 그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녀가 살아있다는 보장도 없었고, 어릴 적 702호에서 사라져 버렸던 해나를 찾을 방법도 없었다. 그렇게 헨리 워커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여동생도 잃어버린 채, 자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모른 채, 미스터 세바스찬에게 배운 마술을 하면서도 그에게 복수를 꿈꾸었다.

 

  때론 몽환적인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이것이 현실에서 일어난 일인지, 헨리 워커의 몽상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헨리 워커가 미스터 세바스찬을 찾아가 복수를 하는데, 일어나지도 않는 살인을 보며 괴로워하는 그의 모습이 나타나기도 한다. 미스터 세바스찬으로부터 마술을 배운 대가로 치르게 된 고통이 얼마나 그를 지배하고 있는지 여실히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반전은 전혀 다른 인물로부터 모든 이야기가 정리되는 부분이다. 헨리 워커가 해나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한 탐정의 등장으로 이 이야기의 숨겨진 진실이 비로소 독자에게 전달된다. 이야기 자체만으로 큰 흥미를 느끼면서도 헨리 워커의 인생에 대한 애잔함을 갖고 있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반전으로 이 모든 이야기가 비로소 완성 된 듯 했다.

 

  하지만 그 이야기 앞에 헨리 워커만이 온 지구를 돌아 시작의 발단으로 돌아오지 못한 것 같아 마음이 쓸쓸하다. 세월이 흘러 진실은 드러났지만 그가 그토록 원하던 해나와의 해후도, 미스터 세바스찬에 대한 복수도 어느 것 하나 속 시원히 드러나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의 삶이 엇나가 버린 것에 702호에서 일어났던 그날의 일을 떠올리며 그는 복수를 꿈꾸었고, 그렇게 그의 삶이 조금씩 사그라들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사라져버린 헨리 워커 앞에서 나의 삶은 과연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현재의 나는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되뇌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이런 이야기를 읽을 수 있었다는 것에 독서의 묘미를 느낄 정도로 정말 오랜만에 굉장한 이야기를 읽은 것 같아 여운이 오래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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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 재앙
루이스 어드리크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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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커상, 콩쿠르상, 나오키상, 이상문학상 등 매년 주목하게 되는 문학상이 있다. 최근에는 퓰리처상까지 눈여겨보는데 비록 퓰리처상을 받지 못했을지라도 후보에 오른 작품에도 관심이 가기 마련이다. 그런 연유로 2009년 퓰리처상 최종 후보에 올라 경합을 벌인 『비둘기 재앙』이 번역되었다고 하기에 단박에 관심이 갔다. 두툼한 두께감에 살짝 부담이 가긴 했으나 어떤 작품인지 궁금했다.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무척 집중해서 읽게 되었는데, 이야기에 빠져들면서도 복잡하게 전개되는 구조에 더 긴장하게 되었다. 책을 읽으면서 가계도를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게 들었고 거미줄처럼, 실타래처럼 엉켜드는 인물 구조에 정신을 못 차리면서 이야기에 조금씩 매료되어갔다.
 

  인디언 소녀 에블리나는 할아버지 무슘에게 다양한 이야기를 들으며 성장한다. 1911년 백인 일가족이 살해되고, 살아남은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고 찾아간 인디언 가족이 오해를 당해 처형되는 사건이 이 책의 핵심이었다. 할아버지의 입을 통해 듣게 된 이야기는 나무의 잔뿌리처럼 뻗어가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냄과 동시에 수많은 사람들과 얽히게 된다. 에블리나의 시점에서 시작해 인디언 부족 판사 쿠츠 이야기, 인디언은 치료하지 않은 여의사 등 다양한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구술문학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 이야기를 듣는 동안에 무슘 할아버지가 말한 사건의 진실은 물론 시간을 넘나들며 많은 사람들의 다채로운 삶을 엿볼 수 있다.

 

  이 책에서는 총 8개의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연관성 없이 펼쳐지는 이야기가 아니라 마지막에는 하나의 이야기로 완성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하나의 이야기 속에도 무수한 이야기가 들어있고, 화자도 제각각 달라 처음엔 이 이야기가 어떻게 하나의 이야기로 아우러지는지 알 수 없었다. 조금씩 인물들이 겹쳐 들어가긴 했으나 그 이야기를 꼼꼼하게 정리하기란 무리였다. 그래서 아예 관계도를 잊고 이야기의 흐름에 집중하자 잘 읽히고 흥미롭기까지 했다. 인물들이 얽히는 노선을 잘 알고 있으면 읽는 재미가 더하겠지만, 인물파악을 과감히 포기하고 이야기를 중점에 두니 관계도에 묻혀버린 이야기의 의미를 되찾을 수 있을 정도였다. 에블리나는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추적해 '정교한 거미줄을 그릴 수 있었다.'고 하는데 '관계가 너무 얽히고설켜 지우고 지우다가 종이에 구멍이 뚫린 이름도 몇 개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에블리나처럼 이 책의 관계도를 그려보진 않았지만 나의 심정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아 반가우면서도, 오히려 복잡한 관계도를 트릭으로 내세워 중요한 내용을 감추려 하는 것이 아닌가란 생각이 들 정도로 새로운 발견이었다.

 

  이렇게 많이 쏟아지는 이야기가 하나의 소설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많이 들어는 봤지만 정작 잘 알지 못하는 인디언 문화에 이질감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문화가 다르고 생각이 다를 뿐, 지구 반대편의 사람 사는 이야기는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괴짜 같은 인물들도 있고, 진실을 파헤쳐가는 이야기, 우리의 옛 전설처럼 흘러 내려오는 이야기 등을 통해 뿌리는 다를지라도 그 땅이 가지고 있는 역사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었다. 책 속의 인물인 빌리는 '이 땅은 내 가족의 땅, 인디언의 땅이었어. 다시 그렇게 될 거야.'라고 말하는데, 그런 자조적인 말투에서 또 다른 역사를 듣는 듯 했다. 이 모든 이야기들은 홀리 트랙이라는 소년의 교수형과 연관을 맺고 펼쳐졌는데, 진실의 근원은 위로 한참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지만 결국 진실을 향해 가고 있었다. 

 

  얽혀있는 인물처럼 시대를 오가며 펼쳐놓은 이야기들은 절대 경험할 수 없는 독특하고, 신비로우며, 삶의 밑바닥을 드러내는 적나라했다. 오해가 만들어낸 사건으로 인디언과 백인 사이의 미묘한 문제를 들이밀 수도 있지만, 인디언 구역에서 살아왔던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듣는 것에 더 큰 의의를 두고 싶었다. 이 책을 통해 삶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고 관계를 맺으며 한치 앞도 모르는 미래를 향해 용기 있는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 아닌가란 생각이 들었다. 줄거리를 정리할 수 없을 정도로, 띄엄띄엄 드러내는 이 책에 대한 단상이지만 각각의 이야기는 나의 뇌리에 잔여물처럼 남아있다. 하지만 이질적인 문화와 삶을 통해 색다를 세계를 여행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생생한 소설인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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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드 아틀라스 1
데이비드 미첼 지음, 송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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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사탕 하나를 고를 때도 고민이 많아진다. 다양한 맛의 향연 속에서 도대체 어떤 맛을 골라야 나의 미각을 만족시킬 수 있을지 복잡하게 생각한다. 20대 초반까지만 해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한 뚜렷한 자긍심이 있었는데, 이제는 우유부단해지고 갈수록 팔랑귀가 되어 가는 것 같다.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인데, 시간이 흐를수록 성향은 고루 퍼지는 반면 좋아하는 작품의 색깔은 점점 흐릿해 진다. 점점 까다로워지는 나의 이런 입맛에 꼭 들어맞는 소설을 오랜만에 만났는데, 바로 『클라우드 아틀라스』다. 31가지 맛을 볼 수 있는 아이스크림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6개의 맛을 드러내는 소설을 만난 것은 확실하다.
 

  두 권의 책을 보면서 당연히 장편소설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읽었음에도, 첫 번째 이야기에 이어 펼쳐진 두 번째 이야기가 전혀 다른 내용이 나와 당황했다. 분명 장편소설인데 왜 이렇게 이야기가 갑자기 끊어져 버리는 걸까 의아했다. 분명 「애덤 어윙의 태평양 일지」에서는 19세기를 배경으로 태평양을 건너는 애덤 어윙이란 사람의 항해일지가 펼쳐진다. 그러나 「제델헴에서 온 편지」는 어윙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로버트 프로비셔라는 청년이 모든 것을 잃고 작곡가의 비서로 들어가는 내용이 나온다. 배경은 1930년대였고 제목처럼 친구와의 편지 교환으로 자신의 상황을 최대한 이겨내는 청년의 파란만장한 이야기가 드러나, 이렇게 다른 이야기가 어떻게 장편소설이 될 수 있나 싶었다. 그러나 저자는 인내하는 독자를 달래기라도 하듯 여섯 편의 이야기를 무척 흥미롭게 이어가기 시작했다.

 

  「제델헴에서 온 편지」에서는 로버트 프로비셔가 작곡가의 집에서 우연히 애덤 어윙의 항해일지를 발견하는 것으로 연결된다. 「애덤 어윙의 이야기」가 뚝 끊겨버리고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어 의구심이 들 무렵, 저자는 다른 이야기의, 다른 인물을 통해 앞의 이야기를 다르게 조명해 주었다. 애덤 어윙은 몸이 좋지 않은 가운데 배 안에서 만난 의사와 친해져 그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건강은 좋아지지 않았는데 로버트 프로비셔는 애덤 어윙이 그 의사에게 속고 있다고 지적한다. 배경은 또 다시 바뀌어 1970년대 미국의 핵발전소의 음모를 캐내는 「반감기-첫번째 루이자 레이 미스터리」 이야기가 펼쳐진다. 핵발전소의 결함을 알고 있는 물리학자가 목숨의 위협을 느끼며 여기자 루이자 레이에게 사실을 폭로하려 하지만 그는 살해당하고 만다. 이에 의문을 가진 루이자 레이는 이 사건을 해결해 가다 물리학자의 유품에서 로버트 프로비셔의 편지들을 발견한다.

 

  로버트 프로비셔는 자신이 작곡한 곡을 가로채려는 스승, 약을 대로 약은 그의 부인과 불륜을 일으키지만 결국 <클라우드 아틀라스 육중주>를 완성하고, 막 뜨려던 참에 죽었다는 사실이 「반감기-첫번째 루이자 레이 미스터리」 에서 밝혀진다. 네 번째 이야기 「티머시 캐번디시의 치 떨리는 시련」에서는 21세기 초로 배경을 옮겨와 출판사 사장 티머시 이야기가 펼쳐진다. 조그만 출판사를 운영하던 그는 한 사건으로 인해 대박을 터트리지만, 오히려 그 행운으로 협박을 당해 먼 곳으로 피난을 가게 된다. 동생이 알려준 곳이라 안심하고 찾아갔지만 그곳은 강제 요양원이었고, 아무도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아 스스로 탈출을 감행해야 하는 곳이었다. 그가 출판사 사장일 때 받게 되는 소설의 제목으로 「반감기」, 부제로는 「첫번째 루이자 레이 미스터리」가 나온다.

 

  다섯 번째 「손미~451의 오리즌」에서는 근 미래 한국으로 옮겨와 최하층으로 살아가는 복제인간 손미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순혈인간들은 복제인간들을 부리며 살아가는데, 그들에게는 많은 것이 절제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 특히 지적인 능력을 억제시켜왔는데 손미 451이란 이름을 가진 복제인간에 지적상승이 일어나게 된다. 그로인해 겪게 되는 최하층 복제인간의 고통과 전혀 다른 세상을 맛보게 되는 이야기들이 모두 펼쳐진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한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 호감이 갔다. 서울의 수많은 지리가 등장하는 것부터 주인공의 한국식 이름까지, 이 소설이 탄생한 배경이 궁금해질 정도였다. 소설에서 말하는 과거에서 미래의 모습을 읽는 듯한 착각이 일었고, 역시나 「티머시 캐번디시의 치 떨리는 시련」의 언급도 빠지지 않았다.

 

  여섯 번째 「슬로샤 나루터와 모든 일이 지나간 후」에서는 모든 문명이 파괴된 후 하와이 섬에 살아남은 부족들이 이야기가 펼쳐진다. 주인공 자크리는 야만족 때문에 가족을 잃은 아픔을 담고 있는데, 그가 믿고 있는 신으로 손미가 등장한다. 그리고 손미의 영상이 담긴 화면을 보게 되기도 한다. 유일하게 이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와 달리 중단되지 않고 완결이 된다. 그리고 다시 거꾸로 「손미~451의 오리즌」의 이야기부터 타고 올라가 「애덤 어윙의 태평양 일지」까지 다시 이야기가 펼쳐지면서 앞에서 간간히 보여주었던 복선이 아닌 후반부에 해당하는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독특한 구성만큼이나 이야기의 소재, 문체 등 모든 것이 달라 한 사람이 쓴 소설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함을 맛본 소설이었다. 항해일지, 스릴러, 편지소설, 미지의 세계를 엿보는 미래소설까지 한 권의 소설에 연관성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묘한 연관성을 지닌 소설들이 등장해 독자의 까다로운 입맛을 충족시켜 준 기분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다보면 깔깔거리며 웃다가, 과거와 미래로 깊이 시간여행을 하면서 현재를 잊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소설을 시대 순으로 나열하긴 했지만 굳이 시작과 끝을 구별하지 않는 구성도 돋보였다. 또한 제각각 다른 이야기들을 펼쳐놓으면서 교묘하게 연결되는 이야기 속에서 각각의 주인공들은 자신들이 당면하고 있는 현실을 문명이라는 거대한 틀로 낱낱이 드러내고 있는 점도 흥미로웠다. 이 이야기를 읽고 나면 하나의 장편소설이 얼마나 다채롭게 변화하고,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8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완성도나 만족도 면에서 충분히 호평을 들을 수 있는 소설임에는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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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우보이
존 레이 지음, 이은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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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대지진으로 전 세계가 불안에 떨고 있다. 가장 먼저는 지진으로 삶의 터전과 가족을 잃고, 그것도 모자라 방사능 유출이라는 최악의 상황에 놓인 일본 열도가 불안감이 가장 크다.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의 상황을 보고 있자니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다. 그들에게 온정의 손길이 끊이지 않고 어서 빨리 불안감이 가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정말 기적이 일어나 암울한 이 현실을 희망으로 바꿔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다. 지진이 일어난 상황을 보면서도 도저히 현실이라고 믿어지지가 않는다. 이렇게 눈으로 모든 것을 봐도 믿겨지지 않는데, 하물며 혼자서 읊어대는 말들을 믿을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는 '로우보이'처럼 어떤 현상에 관해 경고를 하는 말을 터무니없다고 지금껏 무시해 온 것은 아닐까? 왜 이제야 갑자기, 로우보이로 불리던 소년이 생각이 난 것일까?

 

  『로우보이』를 만난 것은 작년이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만난 느낌을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의 아량으로는 로우보이 윌리엄 헬러를 이해하기란 역부족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열 시간 후에 세상이 곧 멸망할거란 소년의 말에 과연 귀를 기울일 수 있었을까? 그것도 이제 막 정신병원의 감시를 벗어난 소년의 말을? 아마 로우보이의 배경을 알고 실없는 소리를 한다고 들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소설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마치 로우보이가 곁에 있는 양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치부하면서도 점점 뜨거워지는 세상이 멸망할 징조를 발견했음에도 사람들은 소년의 배경을 보고 믿어주지 않았다. 윌을 걱정하는 사람은 엄마뿐이었다. 정신분열증의 영향으로 아들을 잃을까 전전긍긍하는 엄마와 윌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힐까 걱정하는 특수 실종계 수사과 라티프 형사만이 윌을 쫓고 있었다.

 

  실제로 저자는 지하철에서 대부분 소설을 썼다고 하는데, 로우보이란 별명을 가진 윌은 지하철을 배경으로 하는 모습으로 자주 나온다. 지하철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것을 통해 다양한 도시의 모습을 투과시켜 주기도 한다. 특별한 방법으로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 윌은 세상이 점점 뜨거워지는 것을 막으려는 사명이 자신에게 있다 생각한다. 그런 과정 속에 윌의 과거와 세상을 구할 방법, 그가 만나게 되는 맨해튼의 어두운 면이 드러나기도 한다. 윌은 자신이 세상을 구하는 것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에밀리란 소녀를 찾아간다. 유일한 친구를 찾아가는 거라 생각했지만 에밀리는 윌을 보며 기겁한다. 2년 전 사건으로 윌이 정신병원에 가게 된 만큼 에밀리의 불안감을 이해할 수도 있었으나, 윌의 진심을 알아줄 만한 사람은 없어 보였다. 자신을 쫓고 있는 엄마와 형사에게 발견되어도 상황은 달라질 것 같지 않았다.

 

  윌이 마주하게 되는 현실 속의 세계는 때론 환상적으로 비춰지기도 하며, 자신 만의 세계에 깊이 빠져있는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품게 되는 배경들이 하나씩 드러나면서 조금씩 윌을 관심 있게 지켜보게 되었다. 이 소설의 최고의 반전은 윌의 주장대로 이뤄지는 현실을 드러내는 결말이지만, 그 전에 엄마의 비밀이 밝혀지면서 윌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그를 쫓는 형사 라티프가 윌의 과거를 알아가던 중 밝혀지게 되는 엄마의 비밀은 윌의 현재 상태와 주장에 신빙성을 더해갔다. 윌이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불안감은 사라지고 그 아이의 내면에 들어있는 생각과 세상이 맞아 떨어질 것인지에 관심이 갔다. 저자는 그런 상황을 윌을 통해 몽롱하면서도 차근차근 전개시켜갔다.

 

  윌은 자신이 세상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취했다. 그러나 "너로 인해 멈춘 건 아무것도 없어."란 말만 되돌아 올 뿐이다. 그리고 "나는 소명을 받은 줄 알았어. 에밀리. 소명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 그렇지 않으면 내가 태어난 이유가 없잖아." 라고 말한다. 윌은 과연 소명을 받은 것일까? 아니면 그의 방법이 실패한 것일까? 그 모든 것이 지나간 후에 세상은 과연 어떻게 되는 것일까? 결말 앞에 망연자실 하면서도 윌을 진중하게 바라봐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나를 지배했다. 책을 읽고 난 다음에는 윌의 상황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음에도 의구심이 들어 고개를 갸웃거리기 바빴다. 그러다 아무도 이런 대재앙이 일어날 거라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현실로 드러나자 진정으로 타인의 말들을(윌을 포함해서) 제대로 들어주지 못한 것에 깊은 후회가 일었다.

 

  어쩌면 일본의 지진과 그들이 처한 상황을 보며 윌을 떠올리는 것이 생뚱맞을 수도 있다. 이 책을 떠올렸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내 스스로도 놀랍고, 신기할 따름이지만 왜 이렇게 마음이 아련한지 모르겠다. 마치 이웃나라 사람들의 고통이 내 탓인 양 마음이 아파오고, 윌 같은 소년이 곁에 있었다고 해도 따뜻하게 대해주지 못했을 거라는 것을 알기에 억지후회를 갖다 붙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드러난 결과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더 마음이 아프다. 소설 속이든 현실이든 나라는 존재가 이렇게 미미하게 비춰준다는 것이 못 견디게 미안하다. 더 이상 이런 고통들이 밀려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세상이 평화와 행복으로 가득했으면 좋겠다. 그런 희망은 과연 소설 속에서도 현실 속에서도 불가능 한 것일까? 이런 말을 되뇌는 것만으로도 잔인하게 느껴질 정도로 현실이 팍팍하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파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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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8
페터 한트케 지음, 안장혁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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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꼭 한 번 혼자서 여행을 떠나보고 싶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현재에 안정되어 갈수록 어딘가를 떠난다는 것이 불안해진다. 용기도 사라지고 무언가 새로운 환경을 맞이한다는 것이 겁이 난다. 국내 여행도 제대로 못 해봤는데 해외로 간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이렇게 내가 겁이 많고 소심한 사람이었나 싶다가도, 그나마 무언가를 잊어버리기 위해 여행을 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안심이 되었다. 실연을 당했을 때, 모든 것이 낙담스러울 때 어딘가로 간절히 떠나고 싶어진다. 하물며 누군가를 찾으러 갈 때는 오죽하랴. 그것이 나의 가족이라면, 갑작스레 떠나버린 연인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사람의 뒤를 좇아갔을 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은 "나는 지금 뉴욕에 있어요. 더이상 나를 찾지 마요. 만나봐야 그다지 좋은 일이 있을 성싶지 않으니까."란 아내의 편지를 받는다. 그런 아내를 찾아 오스트리아에서 미국까지 건너왔지만 주인공에게는 절박함이 없었다. 아내가 묵고 있는 호텔에 연락을 취하면서도 비싼 호텔이라는 것을 알고 아내의 이런 저런 단점들을 되뇐다. 그리고 그들이 제대로 헤어지지 못해 서로를 미워하고 있음을 서서히 드러낸다. 주인공은 아내를 찾아 여행을 하는 것 같으면서도 아내의 이동에 대해서 그다지 큰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은 듯하다. 오히려 예전에 잠깐 만났던 클레어에게 전화해 필라델피아에 와 있다는 소식을 전한다. 혼자서 아이를 키우고 있던 그녀는 아이와 세인트루이스에 갈 생각이라며 여행에 동행하기를 권한다. 주인공은 그 여행에 동행하면서 클레어와 그녀의 딸 베네딕틴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모녀와 함께 하면서 그는 여행의 묘미를 느끼고, 조금씩 현재를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키워나가기도 한다.

 

  "당신은 장소를 바꾼다기보다는 미래 속으로 달려가려고 마치 타임머신을 탄 듯이 이곳으로 왔어. 하지만 이곳에서 앞으로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지는 알 수 없어."

 

  클레어는 주인공에게 미국의 모습을, 그리고 그가 향해가는 모습을 단적으로 알려준다. 처음엔 아내를 찾으러 왔지만 미국이란 낯선 도시에서 배회하는 그는 어디에도 정착할 수 없는 이질적인 존재로 보였다. 클레어와 베네딕틴을 만나 조금씩 오스트리아에서의 삶과 아내와의 결혼생활 등을 떼어내지만 어디로 가야하는지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마음이 가는 데로 이동하고, 돈을 아무 생각 없이 쓰며 앞으로의 계획 같은 것은 장착하지 않은 채 앞으로 쏜살같이 달려가려고만 했다. 그는 미국에 도착해서 '혼잣말증후군'에 빠지기도 한다. 누군가에게 하는 말이겠지 하고 그를 지켜보고 있어도 그의 말을 들어줄 대상이 없다는 것에 내가 더 계면쩍어졌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이상하게 보인다거나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때로는 자신에게 때로는 곁에 없는 아내에게 하는 말들을 듣고 있노라면 오히려 '혼잣말증후군'에 약간 길들여진 내가 그의 말을 귀 기울이고 싶을 정도였다.

 

  그는 미국에 머무는 동안 두 권의 책을 읽는다. 그 중에서도 『녹색의 하인리히』를 오랫동안 읽는데, 예전에 어느 책에선가 그 책에 대한 언급을 보아서 무척 궁금했다. 검색을 해도 그 책이 나오지 않아 여러 방법을 취하다 국내에는 『초록의 하인리히』로 출간된 것을 보고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이 책을 다 읽으면 그 책을 구입하기로 하고 우선은 주인공과의 동행에 충실했다. 분명 그의 여행과 그의 삶에 이 책이 어떠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알 수 있으나, 이 책을 읽지도 않고 그 책을 읽는다면 무언가 들떠버릴 것 같았다. "그의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그가 '적막한 숲 가장자리에 누워, 지난 100년의 목가적인 행복과 낭만을 가슴속 깊이' 느꼈을 때의 감정이 내게도 그대로 전해져."처럼 그가 종종 들려주는 책 속의 이야기에 만족해야 했다.

 

  그러면서도 아내에 대한 기억, 아내에게 남겨 있는 자신의 기억이 극을 향해 있음을 자주 상기시켜준다. 클레어와 베네딕틴과의 여행이 끝난 후 혼자서 여행을 하게 되는 주인공을 아내는 바짝 따라온다. 그러나 아내의 따라옴은 반가움이 아니라 테러하기 위한 따라옴이었다는 것을 알고 경악하게 된다. 그런 아내의 흔적을 느끼면서도 태연자약한 주인공이 안타까웠다. 좋은 헤어짐이란 것도 분명히 있는데, 그들은 좋은 헤어짐을 하지 못해 이렇게 서로를 한껏 몰아세우고만 있었다. 그러나 주인공은 "왜 유디트에게는 지금처럼 아무런 거리낌 없이 친절하게 대해주지 못했을까?"라는 말을 되뇌며 서서히 좋은 이별을 향해, 그리고 자신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어둠 속에 누워 '더이상 아무런 변명의 여지도 없으며 이성적으로도 설명이 안 되는 고통만 느껴졌다. 말하자면 무언가가 내게서 뜯겨나간 뒤에 생긴 빈자리, 그래서 다시 채워야 하는 빈자리 같은 것이 느껴졌다.'라며 무언가 자신을 뚫고 나왔음을 깨닫기도 한다.

 

  소설의 절정은 주인공이 존 포드 감독과의 만남을 통해 아내 유디트와 실제로 일어난 이야기라는 사실을 상기하는 부분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향한 적대감을 없애고 좋게 헤어지기로 한 뒤, 한 때는 '우리'였던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이다. 그 이야기가 이미 펼쳐진 것일 수도 있고, 앞으로 펼쳐질 수도 있지만 주인공의 여행도, 유디트의 떠나옴도 헛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긴 이별을 하기 위해 먼 곳을 돌아왔다는 마음도 들었고, 그런 여행을 통해 내면의 세계를 더 잘 알게 되었다는 마음도 들었다. 주인공의 여행을 지켜보며 어딘가를 떠나고자 하는 마음이 동하지는 않았지만, 목적을 가진 채 왔다 목적을 상실한 여행을 하는 방법도 매력적으로 보였다. 끝내 무언가를 건져내지 못한 여행이 아니었음을 알았기에 방법은 다를지라도 주인공의 뒤를 좇아보려고 한다. 그 첫 번째 여행으로 『초록의 하인리히』를 구입해 내 일상에서 주인공과 책 속의 하인리히의 여행에 동행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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