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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세바스찬과 검둥이 마술사
대니얼 월리스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3월
평점 :
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명절 때 TV에서 해주는 마술쇼나, 예능프로그램에서 보여주는 마술에 늘 흥미를 못 느꼈다. 분명 어딘가에 속임수가 있을 거라며 허점을 살피는 게 마술을 보는 것보다 더 열심이었다. 시간이 흘러도 마술에는 여전히 매력을 못 느끼면서 『미스터 세바스찬과 검둥이 마술사』를 집어든 것은 순전히 저자 때문이었다. 영화 <빅 피쉬>로 더 유명한 작품이자 국내에는 『큰 물고기』로 번역된 저자의 작품을 읽고 아버지에 대한 울림을 주는 글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저자의 작품이 출간된 것을 보며, 내가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마술사'가 제목에 들어가 있으면서도 아무런 망설임 없이 책을 펼칠 수 있었다.
어떤 작가를 알고 작품을 대한다는 것은 때에 따라 장점으로 다가올 수도 있고, 낯선 작가를 대하는 것보다 못한 단점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이 책을 읽을 때는 전자에 속했는데 나의 기대를 뛰어넘어 대니얼 월리스란 작가를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된 작품이 되었다. 이야기의 힘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는 걸 넘치도록 보여준 작품이었다. 이야기 자체가 큰 힘이 되어 작품을 지배한다는 것을 느껴본 것이 얼마만이던가. 저자는 『미스터 세바스찬과 검둥이 마술사』를 통해 『큰 물고기』보다 더한 감동을 주었고, 자칫 복잡할 수도 있는 이야기의 흐름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것을 보며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설의 주인공은 검둥이 마술사 헨리 워커이다. 그가 몸담았던 서커스단의 동료이자 기인들이 기억하는 헨리 워커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검둥이 마술사란 특별한 이미지를 가지고도 제대로 마술을 하지 못해 늘 웃음거리가 되던 헨리 워커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사람들은 기억하고 것이 각자 달랐다. 그래서 그들이 알고 있는 헨리 워커에 대해서 얘기하게 되는데, 그것은 기이한 이야기일 수도 있고 슬픈 이야기일 수도 있으며 끝내 진실을 알 수 없는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마술쇼에서 동네 건달들을 창피 주었다는 이유로 린치를 당한 헨리 워커는 그들에 의해서 흑인이 아님이 밝혀진다. 지금껏 흑인이라고 믿어왔던 그는 왜 백인이면서 흑인 마술사로 살아가야 했던 것일까.
그가 흑인 마술사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가 펼쳐지고, 그가 어릴 적 잃어버린 여동생 해나의 이야기가 또 다른 중심축으로 펼쳐진다. 경제공항의 위기로 한순간에 몰락해 버린 아버지와 함께 호텔 쪽방에서 살아가던 헨리와 해나는 어느 날 702호에서 이상하고도 신기한 사람 미스터 세바스찬을 만나게 된다. 그의 이름이 미스터 세바스찬인지도 확실하지 않은 가운데 헨리는 그에게서 마술을 배우게 되고, 그가 부린 마술로 인해 여동생 해나와 영영 헤어지게 된다. 그가 평생 잊지 못하는 여동생 해나, 흑인 마술사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운명, 때로는 마술사로 명성을 얻긴 했지만 해나를 떠오르게 만드는 메리엔과 사랑에 빠지기도 하는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문 듯 쉼 없이 독자를 안내한다.
마치 양파껍질을 벗겨도 벗겨도 양파가 나오는 것처럼, 뫼비우스 띠처럼 돌고 돌아도 어디가 끝이고 시작인지 모르는 것처럼 헨리 워커의 이야기가 딱 그랬다. 헨리 워커의 인생의 정점도 아닌, 오히려 초라할 대로 초라한 검둥이 마술사의 끄트머리에서 이야기는 시작되어, 그의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 현실과 마술이 섞인 몽상적인 이야기로 향한다. 어떠한 이야기를 할 때 자신이 말하고 싶은 부분부터 시작해 하나하나 이야기를 완성해 가는 것처럼, 헨리 워커의 인생은 그렇게 미미한 곳에서 시작돼 거대하게 펼쳐졌다 날기 위한 발돋움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헨리 워커가 날 수 있는 현실은 해나와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일지도 모르나 그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녀가 살아있다는 보장도 없었고, 어릴 적 702호에서 사라져 버렸던 해나를 찾을 방법도 없었다. 그렇게 헨리 워커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여동생도 잃어버린 채, 자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모른 채, 미스터 세바스찬에게 배운 마술을 하면서도 그에게 복수를 꿈꾸었다.
때론 몽환적인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이것이 현실에서 일어난 일인지, 헨리 워커의 몽상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헨리 워커가 미스터 세바스찬을 찾아가 복수를 하는데, 일어나지도 않는 살인을 보며 괴로워하는 그의 모습이 나타나기도 한다. 미스터 세바스찬으로부터 마술을 배운 대가로 치르게 된 고통이 얼마나 그를 지배하고 있는지 여실히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반전은 전혀 다른 인물로부터 모든 이야기가 정리되는 부분이다. 헨리 워커가 해나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한 탐정의 등장으로 이 이야기의 숨겨진 진실이 비로소 독자에게 전달된다. 이야기 자체만으로 큰 흥미를 느끼면서도 헨리 워커의 인생에 대한 애잔함을 갖고 있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반전으로 이 모든 이야기가 비로소 완성 된 듯 했다.
하지만 그 이야기 앞에 헨리 워커만이 온 지구를 돌아 시작의 발단으로 돌아오지 못한 것 같아 마음이 쓸쓸하다. 세월이 흘러 진실은 드러났지만 그가 그토록 원하던 해나와의 해후도, 미스터 세바스찬에 대한 복수도 어느 것 하나 속 시원히 드러나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의 삶이 엇나가 버린 것에 702호에서 일어났던 그날의 일을 떠올리며 그는 복수를 꿈꾸었고, 그렇게 그의 삶이 조금씩 사그라들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사라져버린 헨리 워커 앞에서 나의 삶은 과연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현재의 나는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되뇌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이런 이야기를 읽을 수 있었다는 것에 독서의 묘미를 느낄 정도로 정말 오랜만에 굉장한 이야기를 읽은 것 같아 여운이 오래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