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리의 이야기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1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존 버거 할아버지 책은 무조건 구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빠와 함께 춤을! 스마트폰 사운드북 블루래빗 스마트폰 사운드북
미키빈 그림 / 블루래빗 / 201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아이가 좋아할 것 같네요! 요즘 자꾸 핸드폰을 만지려 해서 이거 사주려고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금 이 순간의 행운
매튜 퀵 지음, 이수영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4년 6월
평점 :
절판


10년이 넘도록 나는 서태지 골수팬이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팬레터를 보낸다거나 콘서트에 가 본적이 없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데뷔했을 때 난 초등학교 5학년이었고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를 통해 음악을 듣는 게 전부였다. 중학생이 되어 용돈이 생기면서 테이프를 구해 닳도록 듣고 고요한 시간에 기도를 하듯 내 모든 걸 털어놓는 대상이 되었으면서도 여태껏 먼발치에서나마 본 적이 없다. 이 책을 읽고 잠든 어느 날, 꿈에 서태지가 나왔다. 아직도 그런 꿈을 꾸냐는 핀잔이 들려올지 모르지만 수년 전부터 내 유년시절을 수놓았던 서태지란 인물에 무관심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 참으로 오랜만의 등장이었다. 내가 오랫동안 바래왔던 것처럼 꿈에서 서태지와 나는 단 둘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생뚱맞게도 종이에 쓰인 어떤 글에서 오탈자를 찾아보라는 말을 듣고 열심히 찾는 꿈이었지만(다행히 오탈자를 찾아냈다!) 아직도 꿈속에서나마 이런 애틋함이 남아 있었냐며 의아했다. 아마도 이 책을 읽으면서 잠재의식 속의 남아 있는 팬심이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것 같다.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배우 리처드 기어에게 쓴 편지로 채워져 있다. 39년 간 함께 했던 엄마가 돌아가시고 엄마의 유품을 정리하다 리처드 기어에게 붙이지 못한 편지를 보고 바솔로뮤는 대신 편지를 쓴다. 편지 속에는 지극히 개인적이지만 왜 이런 편지를 쓸 수밖에 없는지, 바솔로뮤가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모든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뚱뚱하고 못 생기고 직업도 없고 연애도 한 번도 못해보고 친구는 오로지 엄마뿐인 바솔로뮤가 엄마를 잃은 슬픔을 달래기 위해 이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뭔가 보통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 바솔로뮤는 엄마마저 돌아가시자 그야말로 혼자가 되었다. 엄마가 생전에 좋아했던 리처드 기어에게 편지라도 쓰지 않으면 그 슬픔은 온전히 바솔로뮤 내면에 고여 한 발짝도 앞으로 내디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무리 엄마가 좋아했던 배우라고 하더라도 왜 하필 리처드 기어에게 이런 편지를 쓰는 것일까? 그 이유는 소설의 말미에 드러나는데 편지 속에 쓰인 내용들은 너무나 사소하고 바솔로뮤를 드러내면 드러낼수록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묘한 감정이 들게 하는 내용들이었다. 지극히 수다스럽고 알고 싶지 않은 내용까지 시시콜콜 일러대는 모습을 보며 순간 거리감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리처드 기어에 대해 알아가면서 그가 티베트를 위해 여러 일들을 하고 달라이 라마의 사상을 수용하는 것을 보며 자연스레 바솔로뮤에게도 그런 영향력이 들어온다. 엄마와 함께 매주 성당에 나가 미사를 드리면서도 불교의 사상이, 어쩌면 달라이 라마라는 인물에서 나오는 영향력이 바솔로뮤에게 묘하게 얽혀들어 가고 있었다.

 

그나마 바솔로뮤가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해 준 인물은 맥내미 신부님이었다. 평소에도 자주 식사를 함께했고 집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많은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도 그랬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미사를 드리다 갑자기 신부직을 관두고 바솔로뮤 집으로 들어오고 거의 매일 술을 마시다시피 한 것만 빼면 바솔로뮤 곁에 맥내미 신부님이라도 있어서 조금 안심이 되었다. 바솔로뮤를 평범하게만 볼 수 없었던 것처럼 맥내미 신부님도 괴짜의 모습을 계속 보여주었지만 그래도 함께 있으면 그렇게 나쁜 일(엄마가 돌아가신 것만큼 나쁜 일은 더 생기지 않겠지만)이 생기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걱정도 잠시, 맥내미 신부님이 소개해 준 심리치료사를 역으로 폭력의 구렁텅이에서 빼내오는 시도를 하는가 하면, 심리치료 모임에서 고양이를 잃은 슬픔을 달래기 위해 나온 숫자 18을 입에 달고 다니는 맥스를 만나더니 평소에 마음에 두고 있던 도서관 사서녀의 오빠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그에게서 외계인 설을 듣는가 하면, 그의 생일에 고양이 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오타와까지 동행하면서도 그 모든 걸 칼 융의 동시성의 원리라고 읊어댄다.

 

세상에는 정상적이지 않은 우리 같은 사람도 필요한 것이 아닐까라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할 정도로 평범함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바솔로뮤, 맥내미 신부, 맥스, 사서녀이자 맥스의 여동생 엘리자베스의 등장. 맥스가 엄마를 그리워하면서 혹은 엄마를 잃은 상실감을 달래기 위해 쓰기 시작한 기묘한 편지는 지금껏 자신들에게 호락호락하지 않은 세상을 조금이나마 정상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발돋움으로 변모해 가고 있었다(정상의 기준을 누가 정하는지 모르겠지만). 때론 중언부언하는 이야기를 쏟아냄으로써 엄마를 잃은 슬픔을 이겨냈고 자신 안에 갇혀 있던 바솔로뮤 자신을 끄집어냈으며 상처받은 사람들을 껴안으며 비로소 엉켜가는 생활을 이어가게 되었다. 스스로를 잘난 것 하나 없는 사람이라고 칭했지만 위장 속에서 항상 나쁜 말만 하는 조그만 사람이 아닌 리처드 기어가 영화 속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따뜻하고 진솔하고 낭만적인 면모가 심심치 않게 드러났다. 그런 따뜻함이 바솔로뮤를 비로소 알에서 깨게 만들었고 때론 엄마와 리처드 기어의 환영을 보기도 하고 자신의 곁에 오래 있어주었던 사람이 아버지란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지만 그 모든 일을 이젠 혼자서 감당할 수 있게 되었다.

 

조금은 정상적이지 못한, 다 큰 어른들의 성장소설 같았다. 맥내미 신부님, 맥스, 엘리자베스와 함께 캐나다로 떠나는 여행이 그 모든 과정의 정점이었다. 자칫하다간 이상한 사람들의 이상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작가는 그 모든 이야기들을 감각적으로 잘 엮어냈다. 글을 쓴다면 이렇게 감각 돋게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작가 특유의 문체에 반해 다른 작품을 읽어보고 싶을 정도였다. 불편한 내용들이 종종 등장했음에도 전혀 불쾌해지지 않는 좀 특별한 성장 이야기. 오랜만에 좋은 소설을 읽은 기분이 들어 뭔가 마음이 뿌듯해지기까지 한다. 뿌듯함 가운데 하나는 나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 때마다 다른 사람에게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것이다. 그게 지금 이 순간의 행운이라고 믿으며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저지대
줌파 라히리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1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금껏 살아온 세월 중, 다시 돌아가 새롭게 살아보고 싶은 시절이 있다면 과연 언제일까? 결혼하기 전? 마지막 회사를 관두기 전? 아니면 중학교나 고등학교로 돌아가 다시 공부를 열심히 해 볼 수 있는 그 시절? 예전에는 어떤 순간이 또렷하게 떠올랐는데 지금은 모든 게 두루뭉술하다. 콕 집어서 말할 수 없고 그 시절로 돌아간들 내 삶이 과연 크게 변화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든 것이다. 나의 성정은 쉬이 바뀌지 않을 것이고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고 해도 과연 후회 없이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내 선택에 자신 있어 할 용기가 사라져 버렸다.

 

내가 이 작품 속의 주인공 수바시, 우다얀, 가우리라면 되돌리고 싶은 순간이 언제일까? 수바시라면 가우리와 결혼하고 그녀를 미국으로 데려오기 전, 우다얀이라면 폭발 사고가 일어난 후 집으로 숨어들기 전, 가우리라면 우다얀과 결혼하기 전이나 수바시와 벨라를 두고 집을 떠나오기 전이라고 해야 할까? 잠시 그들의 입장이 되어 되돌리고 싶은 순간을 떠올려 보았지만 그때로 돌아가 또 다른 선택을 한다고 해도 또 다른 문제가 불거지고 다른 갈등, 다른 고민, 그들이 살아온 삶과 크게 다른 내용들이 펼쳐졌을 것 같지 않다. 내 삶의 어느 순간으로 돌아가 선택을 바꾸려고 하는 시도가 열정적이지 않듯 그들도 당시에 나름대로 최선의 선택을 했기 때문에 반대의 선택을 했다 하더라도 더 나은 삶을 살게 될 거라 확신할 수 없었을 거란 뜻이다.

 

수바시는 홀로 남겨진 동생의 아내 가우리를 그대로 집에 두었다간 부모님의 구박을 견디지 못할 것임을 알았다. 또한 앞으로 창창한 그녀의 삶과 그녀 자체에 대한 호기심이 뒤섞인 애정을 떨쳐낼 수 없었다. 자신과 결혼하는 것만이 유일한 탈출구라 믿었다. 형제의 아내가 된 가우리가 어떤 식으로든 우다얀을 평생 떨쳐낼 수 없었대도 마음속으로 간직하고 살았으며 좋았을 것을. 그녀는 아주버니에서 남편이 된 수바시도, 유일한 우다얀의 흔적인 핏줄 벨라를 사랑하며 함께 살지 않았다. 자신의 시어머니가 내다보았듯이 그녀는 아이를 키울 수 없는 냉담함을 지니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과하지도 들끓지도 않는 저자의 문체 속에서 그 모든 사건들을 예감할 수 있었다. 좌익 운동에 가담한 우다얀의 죽음도, 수바시와 가우리의 결혼도, 비밀을 간직한 결혼 생활이 행복하지 않을 것이고 언젠가 가우리가 떠날 것이고 때가 되면 벨라가 그 사실을 알게 될 거라는 그 모든 걸 예감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사건 자체에만 매달려 대충 읽어 내려갈 수 없었던 이유는 저자 특유의 섬세한 문장 속에 담긴 그들의 내면과 그들이 당면하고 있는 현실과 그렇게 흘러갈 수밖에 없는 상황 들이었다. 그들이 그러한 선택을 하게 된 대에 대한 이해를 위한 내면 묘사가 아닌 한 사람 한 사람의 궤적을 남겼다고 해야 할까? 어느 정도 수긍은 하지만 온전히 동조할 수 없는 타인의 삶을 지켜본 느낌이라 더욱 더 왈가왈부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가장 아쉬움이 많이 남는 인물은 가우리다. 수바시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감으로써 인도를, 우다얀을, 가혹한 날들이 기다리고 있을 시댁에서 벗어났지만 그녀는 헌신적인 수바시에게 끝내 마음을 열지 않았다. 우다얀을 너무 사랑했다기보다 죽음으로 갑작스런 단절을 요한 우다얀의 그림자 속에 평생 살았다는 말이 더 맞을 정도로 자신의 삶에서도, 위태롭게 지어진 가정이라는 울타리 속에서도 어떤 위안을 얻어내지 못했다. 외로움을 달래 줄 안락함, 서로를 이어 주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그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듯했다. 어떠한 결과를 낳을지 뻔히 알면서도 극한 상황들을 선택했고 그 선택 때문에 오랜 시간 아파하고 힘들어했으면서도 그녀에 대한 깊은 공감과 안타까움을 드러낼 수 없었다. 자식을 버리고 떠난 여자, 자신에게 헌신적이었던 남자를 배신했다는 꼬리표가 아닌 그녀 자체를 인식했기 때문이다. 누군가와 끈끈하게 얽혀 살 수 없고 자유를 갈망하는 그녀의 본능을 어떤 식으로든, 어떤 누구든 막을 수 없고 자제시킬 수도 없었을 거란 깨달음 때문이다. 그녀도 사람인지라 후회도 하고 자신이 만들어 놓은 틀에서 빠져 나오려고도 하고 잘못된 행동에 대한 용서를 빌기도 하지만 이미 스스로 개척한 삶에서 무언가를 바로 잡는다는 건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살아갈 권리가 있는 한 사람이었고 그런 그녀를 비난하기보다 존중해야 하는 여러 이유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어떤 누구와 행복을 꾸리지 못하고 핏줄에게 외면당하고 우다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은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런 면에서 수바시도 마찬가지였다. 벨라를 사랑하고 자신의 딸이라고 여기는 마음을 가우리와의 결혼으로 인해 가질 수 있었음에도 행복하지 않은 긴 세월을 살아내야 하는 고통이 동반되었다. 다른 여자와 결혼했더라면, 지극히 현실적인 그의 성정을 보건대 그럭저럭 보기 좋은 가정을 이뤘을 거란 아쉬움이 일었다. 하지만 그 또한 자신의 선택으로 인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이기에 충실히 살아낸 그에게 보상이라고 하듯 노년에 찾아 온 행복이 그나마 그런 아쉬움을 달래주기도 했다. 잃을 수도 있었을 벨라를 다시 찾았고 손녀까지 만났다. 그가 말한 대로 더 젊었을 때 엘리스란 여자를 만났더라면 결혼하지 않았을 거란 말처럼 모든 일에는 시기가 있나보다. 그 시기란 것을 어떻게 기다리고 견디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는 걸까?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해야 했던 우다얀에게도 어쩔 수 없는 운명의 시기가 닥쳤다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옮긴이의 말처럼 이 작품은 주로 사적이고 가족적인 이야기를 다룬 그동안의 소설과 달리 1960년대 후반의 인도 좌익 운동을 배경으로 정치, 사회적인 내용을 중점으로 다뤘다는 점이 특기할만 하다. 또한 시간적 배경이 대하소설 급이라는 말에 동조하게 되는 게 우다얀과 수바시의 어린 시절부터 수바시가 할아버지가 되는 시기까지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세월을 뛰어 넘어야 하는 부분을 어떻게 써 내려갈까, 벨라에게 자신은 친아빠가 아니라는 고백을 어떻게 그려낼까란 궁금증에 어색함이 더하지 않는 자연스런 시간과 공간의 이동이, 저자의 문체와 잘 맞물려 책장을 덮을 땐 앞으로 살아내야 할 나의 미래를 이미 살아버린 기분이 들 정도였다.

 

초반 30페이지를 넘기지 못해 낑낑대다 쉼 없이 넘어가는 책장을 주체 못하고 결국엔 다 읽어 버리는 게 아까워 조금씩 읽어대던 날 들. 유일하게 좋아하는 여류작가인 줌파 라히리의 소설을 읽는다는 사실이 행복감으로 다가왔을 정도다. 책의 내용은 그다지 밝다고 할 수 없으나 인생은 결코 혼자 살아지는 게 아니며 마음속에 비밀과 피해왔던 일을 끝까지 외면할 수 없음을 낱낱이 목도했다. 마음속에 거리낌을 오래 간직하며 누군가를 미워하면서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것이야말로 인생을 낭비하는 지름길이라는 걸 깨닫기도 했다. 작품 속 인물들 중 누군가를 오랫동안 미워하거나 증오하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나와 맞지 않는 사람들과 살아가는 고충을 여실히 드러냈기에 되도록 긍정적인 사고로 타인에게도 너그러워 질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런 마음만 잘 지켜도 앞으로의 삶이 생각처럼 팍팍하지 않을 것 같은 이 느낌. 이 소설을 읽으면서 들었던 복잡다단한 마음을 이렇게 뻔하게 마무리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루키의 여행법 - 사진편 - <하루키의 여행법> 에세이편의 별책 사진집, 개정판 하루키의 여행법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진욱 옮김, 마스무라 에이조 사진 / 문학사상사 / 201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여행서를 글로 읽는 것과 사진과 함께 보며 읽는 건 분명한 차이가 있다. 글로 읽을 때는 묘사에 의지해 나름 상상하며 읽어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반대로 그 상상이 글을 읽는 풍미를 더해주기도 한다. 사진과 함께 읽는 글은 내가 상상할 틈도 없이 있는 그대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단점이 있는 반면 어떤 의문을 달 여지없이 정확하다. 그래서 이 책을 읽기 전,『하루키의 여행법』을 다 읽고 봐야 하는지 아니면 함께 봐야하는지 고민을 했었다. 그러다『하루키의 여행법』을 읽으면서 그곳이 궁금할 때 이 책을 펼쳐 현장감을 느끼도록 했다.

  사진이 떡하니 실려 있으니 글에 의지한 나의 상상력이 빈약했음이 단박에 드러났다. 그러나 그런 움츠러든 모습으로 글을 읽어나간다면 이도저도 아닌 소심한 접근법이 될 것이 뻔해 내가 상상한 것과 사진을 비교해갔다. 그랬더니 오히려 편안히 볼 수 있었고 글에서 보지 못한 생생함으로 저자의 여행지를 더 구석구석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저자와 함께 동행한(고베 도보 여행만 제외하고) 마쓰무라 에이조의 사진은 오글거리는 감성을 일깨울 정도로 멋을 부리지 않아 편안했다. 분명 보통 사람과 다른 시선을 가졌다는 것은 알겠지만 문외한인 나의 시선과 거리감이 깊지 않아서 느긋하게 볼 수 있었다. 어떤 생각을 하며 찍었을까 하는 사진도 많았고 저자가 묘사한 부분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부분도 있어 놀라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사진으로 보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거라 생각되어지는 장면들도 있었다. 전쟁의 상흔 때문인지 노몬한의 모습이 특히 그랬고 사살된 늑대의 모습은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정도로 마음이 찡했다. 새끼 호랑이를 안고 찍은 사진은 웃음을 자아냈지만 저자의 글과 사진이 크게 초점이 흔들리지 않아 이 책을 보는 재미도 나름 쏠쏠했다.

  글과 사진의 관계는 늘 결론이 나지 않는 것 같다. 아무리 묘사를 풍부하게 해도 한 장의 사진이 더 정확하게 보여줄 때도 있고 사진으로 볼 수 없는 부분을 글이 표현해내는 것도 있다. 글과 사진을 함께 보았지만 역시나 그런 느낌이 들었고 그런 괴리는 어떤 글과 사진이라도 완벽하게 차단할 수 없을 것 같다. 예를 들어 저자가 설명한 멕시코의 작은 마을은 대도시와는 또 다르다는 정도로만 받아들이고 말았는데 사진으로 만나니 쓸쓸함과 적막감, 시골이라는 특수함이 주는 짠한 마음이 단박에 드러났다. 거기다 시골에서 자란 나의 추억까지 더해져 부모님만 두고 자취방으로 홀로 돌아와야 했던 유년시절의 기억까지 떠올랐다. 사진이 아니었다면 그런 기억의 추적까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 때 사진이 잘 찍고 싶어 열심히 셔터를 누르다보면 나도 좀 나은 사진을 찍을 수 있겠지 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셔터를 눌러도 사진이 는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고 후에 마음가짐의 문제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가짐을 고쳐먹어도 사진은 나에게 어렵게만 느껴진다. 기술보다 사물을 보는 마음가짐. 그리고 뷰파인더 안을 넘어 그 이면까지 보려는 시도가 있을 때에 한발 더 나아지는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쉽지 않다. 그러다 내가 그런 사진을 찍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그런 사진을 자주 보는 게 더 빠르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조금씩 사진집을 들춰보고 있다. 그래서 콕 집어 이 사진은 이러이러하다 말은 못하지만 대강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찍었는지 짐작할 수는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시선이긴 하지만 이 사진집을 보면서 왜곡된 마음가짐과 시선으로 찍은 사진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제대로 설명할 능력이 없는 나는 편안하고 좋았다는 표현으로 자꾸 이렇게 다른 소리를 늘어놓는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