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케아 옷장에 갇힌 인도 고행자의 신기한 여행
로맹 퓌에르톨라 지음, 양영란 옮김 / 밝은세상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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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때 세계 곳곳을 여행하고 싶다는 열망을 품은 적이 있었다. 정작 국내 여행도 혼자 해 본적도 없으면서 야심차게 배낭여행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말이다. 그런 열망은 30대가 되고 결혼을 하고 애 엄마가 되어 한 줌의 먼지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지만, 인생은 알 수 없는 것! 좀 더 나이 들어서 남편과 함께 배낭 가방을 낑낑대며 여행할지 누가 알랴! 경험해보지도 않은 이야기, 경험할지 장담할 수도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은 내가 꿈꾸었던 여행(?)을 좀 특이하게 한 이 책의 주인공 파텔 때문이다. 아무리 여행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더라도 파텔처럼 하라고 한다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싶다. 파텔도 의도하지 않은 여행(이라고 하기엔 위험이 너무 많았지만.)이었지만 평범한 여행은 아니었기에 그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해외여행이라곤 20대 후반에 일본에 2박 3일 머문 것과 신혼여행으로 태국에 머물렀던 게 전부다. 그렇게 짧은 여행에서도 현지 사람들을 만난다거나 새로운 친구를 사귀었던 건 아니다. 목적이 분명한 일정이었고 여행 경비의 어려움이나 미지의 세계에 대한 불안감은 없었다. 그랬기에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만큼이나 여행 목적도 각양각색이라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더군다나 생존을 위한 탈출이라면 과연 그것을 여행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어떤 면에선 파텔 역시 생존을 위해 인도에서 힘겹게 파리로 건너온 셈이었다. 주민들이 십시일반 모아준 경비로 겨우 비행기 티켓을 구해서 파리에 도착했고 인도 고행자인 자신에게 꼭 필요한 이케아 못 침대를 사고 바로 돌아가야 했다. 실제로 못 침대에서 잠을 자진 않지만 사람들에게 그런 생활을 보여줘야 했기에 그에게도 나름의 생존을 위한 여행이었다.


  나이를 조금씩 먹고 삶을 앞으로 밀어낼수록 인생은 계획된 대로 살아지지 않는다는 걸 깨달아간다. 파텔 역시 이케아 못 침대를 구매하고(가짜 돈으로 구매할 계획이었지만) 계획대로 바로 고향으로 돌아갔다면 행복했을까? 그의 희한한 여행에 동행하고 나니 오히려 계획대로 되지 않았던 여행이 소중한 시간이었음을 깨달았다. 파리에 도착해 집시 출신의 택시기사에게 가짜 돈을 지불할 때부터 그의 여행은 꼬이기 시작했다. 땡전 한 푼 없던 그는 이케아 매장에서 잠을 자려다 옷장에 갇혀 영국으로 옮겨지고 그 이후로 여러 나라의 도시에 머물게 된다. 그때마다 기가 막히게 택시 기사와 마주치며 목숨을 위협받지만 그가 다른 나라로 옮겨지는 경로와 시간들이 어이가 없으면서도 뭔가 극적인 느낌이라 그의 여행이 흥미진진해졌다.


  옷장에 갇히고 가방에 갇히고 심지어 열기구 안에까지 갇힌 파텔의 이동 경로는 현실적으로 이뤄질 수 없다는 걸 알지만 그보다 더 심한 상태로 밀입국을 시도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오히려 파텔의 경험은 미미할 정도였다. 단순하게 파텔이 기막힌 우연을 만나 이 나라 저 나라로 여행하는 이야기로 끝나 버렸다면 제목처럼 ‘신기한 여행’에 그쳤을 것이다. 하지만 고향 사람들을 속여 고행자로 살아가면서 이기적인 목적으로 경비를 받아 침대를 사러 온 파텔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불우했던 어린 시절에 대한 상처를 치유 받고 타인을 도울 때 마음이 기쁘다는 사실도 알아간다. 또한 잘못 된 삶에 대한 반성의 계기가 되기도 하고 이케아 매장에서 요기를 할 요량으로 속인 여인 마리를 만나고, 목적지를 알 수 없는 여행을 할 때마다 마리를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러다 얼떨결에 밀입국자로 몰리면서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목숨 걸고 밀입국을 하는 사람들의 사연을 듣고 감명을 받으며 서서히 변해가는 자신을 느낀다.


  그럼에도 파텔은 이 여행의 의미가 무엇인지, 자신이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순간순간 목숨이 위태로울 때마다 하고 싶은 일을 떠올리고 다시 살아나면 그 일을 행하며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래서 그는 파리에서 만난 마리에게 전화도 하고 유명 여배우의 짐 가방 안에 갇혀 소설을 쓰기도 한다. 그러다 선인세로 10만 유로나 되는 돈 가방을 들고 택시기사의 하수인에게 쫓기면서부터 마음이 불안해졌다. 이 돈이 온전히 파텔에게 남아있을 것 같지 않았고, 갑자기 돈이 없던 사람에게 돈이 생겼으니 위험이 생길 거라는 불안감이었다. 결과적으로 어느 정도 예상이 적중하긴 했으나 파텔은 자신이 가진 돈으로 타인을 도우면서 오로지 돈 때문이 아닌 마음속에 남겨진 기쁨과 뭉클함을 맛보기도 한다.


  파텔이 위험에 빠지진 않을지, 빈털터리가 되진 않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을 모두 이겨내고 나니 그의 행복한 모습이 보였다. 파텔만큼이나 그가 여행하는 내내 만난 사람들, 특히 목숨 걸고 국경을 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내내 마음에 걸려(지금도 뉴스를 보면 그렇게 밀입국 하려다 목숨을 잃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편하진 않았지만 그런 사람들이 존재하고, 그런 사람들이 파텔의 여행으로 드러났다는 사실이 이 희한한 여행 이면에 남겨있는 또 다른 메시지로 다가왔다.


모  든 사람이 행복할 순 없다. 어른이 되면서 냉혹한 현실과 마주하면서부터 모두가 행복한 세상은 올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많이 씁쓸했다. 여전히 세상에는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고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모두 구제할 수도 없다. 하지만 파텔의 여행을 지켜보면서 오로지 물질로만 타인을 도울 수 있고 구제할 수 있다는 편견을 버렸다. 사람을 진실하게 대할 때 변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 파텔의 신기하고 기이한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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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가겠다 - 우리가 젊음이라 부르는 책들
김탁환 지음 / 다산책방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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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같은 책을 읽은 타인과 책에 대해서 이야기할 기회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다른 사람이 쓴 리뷰를 모두 다 들여다볼 수 없듯이 내가 읽은 책에 대한 느낌을 조금이나마 나눌 수 있을까 해서 블로그에 리뷰를 올리고 있지만 일방적으로 긴 수다를 떠는 느낌이라 부끄러울 때가 더 많다. 그러다 같은 책을 읽고 나와 비슷한 느낌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쉽게 흥분하고 만다. 나만 이렇게 읽은 게 아니라는 동질감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자신이 읽은 책에 대한 느낌이 이렇게 본격적으로 묶여져 나오면 긴장될 수밖에 없다. 저자는 이 책에 실린 책들을 적어도 여러 번 반복해서 읽었다는 것을 밝히고 있듯이 내가 한 번 밖에 읽지 않은 책들을 어떤 시선으로 들려줄지 궁금했다. 또한 내가 아직 읽지 않은 책들에 대해 어떤 흥미를 불러일으켜줄지 설렘으로 이 책을 펼쳤다.


 

  책을 펼치기 전 목차를 이토록 오랫동안 들여다본 적이 얼마만인지! 스물세 편의 소설 목록을 보면서 내가 읽은 책은 여덟 권, 읽다 만 책은 한 권, 읽진 않았지만 소장하고 있는 책은 세 권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내가 읽은 책들 이야기도 궁금했고 소장하고 있는 책 중에서 어떤 책을 먼저 꺼낼지도 궁금했다. 결과적으로 가장 마지막에 소개되었던 오에 겐자부로의『아름다운 애너밸 리 싸늘하게 죽다』를 꺼냈고, 다소 이야기의 중심을 못 잡아 집중력이 흩어질 수도 있었는데 줄거리를 먼저 알게 되어서 오히려 도움을 받았다. 내가 읽지 않은 책 내용을 먼저 알아버리는 걸 누구보다 싫어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내가 직접 읽지 않고는 그 느낌을 정확히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 개의치 않아 하면서도 맛깔난 소개글이 있으면 더 구미가 당기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분명 내가 읽은 책임에도 저자의 글을 읽고 있으면 새로운 책을 읽는 기분이 들었다. 마치 똑같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데 저자의 시선에서 좀 더 자세히, 그리고 다른 시각으로 듣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만큼 읽은 책에 대해서는 뭔가 친근했고, 읽지 않은 책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했다. 저자도 한 사람의 독자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듯 소개를 해주어서인지 편안하다 못해 내가 직접 읽은 것처럼 빨려 들어갔다(다만 ‘그녀’를 멋스럽게 표현한다는(주로 소설에서) ‘그미’라는 표현이 익숙지 않아서 계속 걸리긴 했다.). 그래서 책 속의 주인공들 이야기에 일희일비하고 아직도 내가 만나보지 못한 수많은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에 먹먹한 행복감과 동시에 부담감을 느끼기도 했다. 모든 이야기를 다 만날 수 없지만 나를 거쳐 가는 이야기는 앞으로 얼마나 될지를 가늠할 수도 없기에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로, 지금 이 세상 구석구석에 넘쳐나는 삶의 모습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슬픔은 단순히 멀리 두고 극복할 대상이 아닙니다. 슬픔보다 기쁨이 훨씬 좋다고 강조해서도 안 되고, 기쁨에 관한 밝은 책들만 읽혀서도 안 됩니다. (36쪽)


 

  그러다『플랜더스의 개』소개글을 읽다 이 문장 앞에서 한참을 멍하게 있었다.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현대문학이 아닌 고전을 읽는다고 공공연하게 말해왔던 나인데 ‘단순히 멀리 두고 극복할 대상이 아’니라니! 저자는 ‘슬픔’이라고 했지만 내가 피하려고 했던 것이 현실의 ‘슬픔’임을 알고 있었기에 도피행각을 하다 예기치 않게 그 대상과 맞닥트린 기분이었다. 그러면서 나의 ‘슬픔’은 과연 무엇인지, 왜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오랫동안 피하려고만 했는지에 대해 곰곰 생각해 보게 되었다. 어쩌면 내가 문학을 읽는 이유가 이것이 아닐까란 의문과 함께 몸의 긴장이 스르르 풀려버렸던 것 같다. 내 안에 무엇을 담고 있었기에 나는 피하고 있었고 문학을 방패삼아 우연히 혹은 서서히 극복하려고 했던 것일까? 조금이나마 내 안에 자리하고 있는 ‘슬픔’이라는 실체를 알게 되자 이 책을 만난 것이, 그리고 그동안 수많은 책들을 만나왔던 시간들이 참 고맙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을 풀어나가는 일이 내게 주어진 숙제 같았다.


 

  책을 좋아하던 초장기에는 책을 읽는 게 좋아서 다음에 나도 글을 써보고 싶단 생각을 했었다. 그러다 멋진 작품들을 만나면서 글은 아무나 쓰는 게 아니며, 책을 좋아하는 것과 글 쓰는 것은 별개다란 누군가의 말처럼 쉽게 품을 수 있는 꿈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그러면서도 10년 잡고 써보면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열리지 않을까하는 상상을 하기도 하지만, 이렇게 다양한 소설들을 만날 때마다 그리고 그런 소설을 재미나게 들을 수 있는 책을 만날 때마다 내 꿈과는 무관하게 그냥 고마움을 느낀다. 어쩌다 내가 책을 좋아하게 되고 책에 빠졌는지에 대해 명확하게 이야기할 순 없지만 책이 내 곁에 있어서 고맙다는 생각은 늘 하게 된다. 나의 모습이 어떻든지 간에, 내가 앞으로 어떻게 변해가던지 간에 문학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내가 읽어주길 기다리고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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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고은 2015-08-17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남의 책 이야기를 읽는 일을.. 이제껏 꽤 자주 했던 것 같아서, 무엇이든 이젠 남을 통해 읽지 않고 내가 직접 읽겠단 요상한 고집이 맘 속에 자리잡던 차에 안녕반짝님 리뷰를 보게 됐네요. 그리고 다시 한번 생각합니다. 남의 책 이야기도 결국은 책이구나 하구요. 읽어둘 만한 생각과 고민이 그 안에 있지, 그렇지.. 하고 갑니다.

안녕반짝 2015-08-17 22:52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저도 이 책을 읽고, 제가 읽은 책도 있었지만 결국은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예전에는 읽지 않은 책 이야기를 알아버리면 김이 새버리곤 했는데 요즘엔 결과를 알아도 내가 직접 읽고 느끼지 않으면 제대로 된 읽기가 아니다란 생각에 오히려 미리 아는 것도 꽤 흥미롭더라고요. 특히 애너밸 리~는 줄거리를 알려주어서 읽는 데 더 도움이 되었던 것 같아요.
 

제가 늘 애용하는 알라딘! 제가 책을 읽을 수 없을 때까지 오래오래 함께 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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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이해
존 버거 지음, 제프 다이어 엮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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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의 책은 무조건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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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베라는 남자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최민우 옮김 / 다산책방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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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많이 얽히는 것도 싫어한다. 하지만 사람이 아예 없는 것도 싫어한다. 늘 마음은 한적한 시골에서 유유자적하게 책이나 봤음 좋겠다고 말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적당히 느낄 수 있는 공간을 좋아한다. 이를테면 가끔 카페에서 책을 보는 것도 나 혼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 알 수 없는 안도감이 느껴져서 들르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나의 성향이 뚜렷함에도(최근에야 깨달은 거지만) 내 주변에는 적당히 얽히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부족한 것 같다. 완전히 얽혀있거나, 자주 부딪힘에도 전혀 얽히지 않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다.


 

  이렇듯 맨송맨송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내가, 표지 속의 좀 까칠해 보이는 저 아저씨의 이야기를 읽다 울고, 가슴이 먹먹해지고, 사람의 온기로 따뜻함을 느낄 줄 몰랐다. 책은 늘 곁에 두며 읽고 있지만 내 마음 속에 와 닿는 책을 만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무방비 상태로 오베라는 아저씨(호칭이 좀 애매하긴 하나 할아버지보다 아저씨가 나을 것 같아 그렇게 부르려고 한다.)의 이야기를 읽고 뭔가 정신이 똑바로 차려지고 자세까지 올곧아지는, 잔잔하면서도 포근한 마음을 느꼈다. 푸석푸석한 마음을 녹여 나를 좀 더 두루뭉술하고 여유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 것 같다.


 

  나이는 59세. 성격은 까칠하고 철저한 원칙주의자. 반 년 전에 아내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그런 아내를 따라가려고 늘 자살할 준비를 하고 있음.


 

  간단히 오베 아저씨를 소개하자면 이 정도다. 아내를 그리워하는 건 좀 짠하지만 그의 일상을 들여다봤을 때 딱히 정감이 간다거나 그의 삶을 들여다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내 주변에 저런 이웃이 있으면 피곤하다 싶을 정도로 이른 아침 동네를 시찰하고, 조금만 규칙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누구건 상관하지 않고 쏘아댄다. 그는 그렇게 모든 게 반듯(?)한 상태에서 아내 곁으로 가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런 그의 앞집에 한 가족이 이사를 오게 되면서 모든 계획이 틀어지기 시작한다.


 

  3살, 7살 딸아이와 운전부터 어떠한 손놀림에도 재능이 없는 멀대같은 남편과 이란 출신의 아내가 임신한 채 이사를 왔다. 오베 아저씨 입장에서 보자면 뭔가 신경 쓰이고 복잡한 가족임이 틀림없다. 번번이 아내 곁으로 가려는 행위를 방해하는 손재주 없는 인간들 때문에 골치가 더 아프다. 그런 골치 아픈 이야기들만 나열했다면 오베 아저씨에게 전혀 정을 붙일 수 없었을 게다. 하지만 그렇게 무뚝뚝한 원칙주의자였던 오베 아저씨의 지난 삶을 들여다보니 마음 찡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16살에 고아가 되었고, 직장에서 너무 과묵한 탓에 동료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아버지가 물려주신 낡은 집은 불타버렸다. 그는 ‘누군가 묻는다면, 그는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 자기는 결코 살아 있던 게 아니었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녀가 죽은 뒤에도.(189쪽)’ 말할 정도로 희망이 없는 삶이었다. 아름답고 현명하고 발랄한 아내 소냐와 결혼하면서 그는 새로운 삶을 사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행복도 잠시, 아내와 함께 버스 여행을 갔다 사고를 당해 뱃속의 아이를 잃고 소냐는 하반신 마비가 되어 버렸다. 


 

  오베 아저씨가 절망하고 분노해 있는 동안에도 소냐는 모든 걸 받아들이고 삶을 이전처럼 이어 나갔다. 그리고 문제아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었고 ‘하나님이 우리 아이를 데려갔어요, 사랑하는 오베. 하지만 수천의 다른 아이들을 주셨지요.(356쪽)’라고 말할 정도로 삶에 긍정적이다. 아이를 키우고 있는 입장이어서 그런지 아이를 잃고, 그럼에도 절망하지 않고, 그 아픔을 사랑으로 타인을 감싸는 소냐의 모습에 눈물이 참 많이 났다. 두 아이 모두 힘들 게 낳은 내 입장에서는 이런 그녀가 너무나 대단하고 멋지고 아름다워 보였다.


 

  이런 그녀였으니 오베 아저씨가 아내 곁으로 가려는 시도가 이해가 갈 정도였다. 그런데 과연 아내 곁으로 간다고 그녀가 좋아할까? 오베 아저씨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그녀 없는 삶을 견딜 수가 없다. 하지만 앞집의 새로운 가족 때문에 자신에게 서서히, 그렇지만 큰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는 걸 무시할 수 없었다. 누군가와 사귀고 그들과 가까이 하는 건 상상하기 힘들었던 오베 아저씨는 때론 뻔뻔하고 당당하고 자신의 손길이 닿지 않으면 부족한 그 가족의 부탁을 들어주면서 서서히 사람들과의 교류를 시작한다.


 

  ‘고양이, 과체중 알레르기 환자, 동성애자와’ 함께 아침 시찰을 하는가 하면, 앞집의 7살짜리 아이에게 선물할 비싼 아이패드를 사가지고 오면서 키보드도 공짜로 안준다고 투덜대기도 한다. 오베 아저씨에게 상상할 수 없었던 변화들이었다. 그리고 이런저런 마을의 일들을 합심해서 처리하다 보니 오래전에 잃어버렸던 가족이라는 따뜻함, 함께라는 기분 좋은 느낌들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물론 오베 아저씨는 직접적으로 표현한 적 없었지만 옆에서 지켜보는 내가 보기에도 그러할진대, 본인의 속내는 오죽할까 싶었다.


 

  원칙을 고수하는 고집불통으로 보이지만 자신의 색깔이 또렷해서인지 종종 타인의 모습을 보며 생각을 드러낼 때 빵 터지게 만들어주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방심하고 있다 그런 문장을 만나면 혼자서 낄낄대고 웃었다. 옆에서 잠자던 아이가 놀라서 팔을 휘저을 정도로 혼자서 웃다가 괜히 눈물을 훔쳤다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좋다, 따뜻하다’고 혼잣말을 하기도 했다.


 

우리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과 무언가 할 시간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말할 시간이 넘쳐난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무슨 일인가가 일어나고 나면, 우리는 그 자리에 서서 ‘만약’과 같은 말들을 곱씹는다. (380쪽)


 

  오베 아저씨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나 또한 이 말에 가장 큰 공감을 했다. 늘 내 곁에 있을 거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좀 더 표현하고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 것에 미안했고,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면서 어느새 행동으로 옮길 용기가 없음에 잠시 무기력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오베 아저씨를 만나고 나서 내 마음이 한없이 따뜻해짐을 느꼈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따뜻함과 가슴 먹먹한 찡함인지! 오베 아저씨와 이웃들이 함께 만들어갔던 이야기를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을 정도였다. 이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듯이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 위로받고 웃고 고마워하는 이 마음을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었다. 내 주변에 오베 아저씨 같은 사람도, 그를 변화시켰던 이웃들도 없지만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생각하면 설렌다. 그래서 타인과의 만남에 두려워하지 않고 좀 더 마음을 열기로 했다. 완전히 동떨어진 삶을 살 용기가 없다면 적당한 섞임을 즐기고 그들과 관계 맺는 것을 즐거워하기로 말이다. 오늘은 누구를 만날 수 있을까? 내 마음 먹기에 따라 그런 기회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에 괜히 가슴이 벅차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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