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5
시마자키 도손 지음, 노영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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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하지 않은데서 오는 감동은 일상 속에서 만나는 소소한 기쁨이다. 내가 맛볼 수 있는 일상 속의 사치는 책을 통해 맛보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소통도 잘 하지 못하고 여행을 좋아한다거나 타인에게 주저리주저리 떠들지도 못하는 나에게 책이란 매개물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상상만 해도 답답해진다. 그래서인지 전혀 기대하지 않은 책에서 진한 감동을 만났을 때의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뿌듯하다. 작가도 낯설고 책 제목도 들어본 적 없었던『파계』. 책을 읽어나가는 과정에서 맛본 충실함이 결말에선 조금 흐트러졌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이 소설이 내 마음속에 와 닿았는지 모르겠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 속 인물을 곰곰 생각해 보면 평범하고 실수도 하고 특별한 능력이 없다가도 어떤 신념을 향해 올곧은 길로 가려 하는 인물들이란 걸 알게 되었다. 그런 인물의 변화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한권의 소설을 읽는 내내 그 인물에 기대어 내면의 듬직함을 키워갈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의 주인공 우시마쓰는 그런 조건을 충분히 가진 인물이었다. 신분이 철폐되었음에도 여전히 신분 차별이 남아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그는 평민 칭호를 얻었지만 차별을 받고 있는 존재였다.

 

  사범대학을 나와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존경까지 받고 있는 그였지만 절대 신분을 밝히지 말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따랐기에 교사가 될 수 있었다. 신분이 들통 날까 늘 조심하고 조심한 터에 여전히 그가 어떤 신분을 가지고 있으며 어떻게 자라왔는지 모르지만 차별 받는 사람들을 보면 늘 마음이 무거웠다. 똑같이 그들을 차별하면서도 자신이 신분을 숨기고 있다는 것에 굉장한 고뇌와 스트레스를 갖고 있었다. 평생 그 사실을 감추자니 내면이 너무 괴로웠고 그것을 드러내자니 아버지가 살아내야 했던 신분제의 처절했던 시절의 고생과 자신은 그런 세상에서 살게 하지 않게 하려 했던 마음이 겹쳐 이것도 저것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우유부단하고 온통 신분이 들통 날까 겁내 하는 겁쟁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 비겁하다고 몰아붙일 수 없는 것이 그가 신분을 밝히는 순간 일어나게 될 일들이 너무 빤히 보였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유언도 유언이지만 그가 과연 그런 일들을 감당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를 지켜보는 내 마음도 그냥 그렇게 숨기고 살길 바랐다. 굳이 자신의 신분을 밝혀 삶을 뒤집을 필요가 없을 것 같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하지만 늘 무언가에 쫓기듯, 아버지의 유언에 억눌리듯 살아온 그는 진짜 자신을 못 만나고 있다는 게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이념의 아버지’ 이노코 렌타오의 사상에 조금씩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신분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히 맞섰으며 그런 모습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며 존경을 받고 있었다. 우시마쓰는 몰래 그의 저서를 읽다 용기를 얻어 자신을 짓눌렀던 신분에 대한 고민을 내려놓는다. 자신이 어떤 신분인지를 밝히면서 아버지의 유언을 못 지켰다는 무거움도 잠시, 그제야 자유를 얻게 된다. 자신을 가뒀던 틀 밖으로 나오자 더 나은 삶, 더 넓은 세상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의 결정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잘 이겨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응원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노코 렌타오까지는 아니더라도 소소한 인물로 주변의 감화가 될 수 있길 바랐다. 하지만 그가 신분을 밝히면서 주변의 시선이 따가워지고 예전처럼 지낼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떠남을 선택하게 되는데 그간 가졌던 신분에 대한 고민과 번뇌, 밝히기까지의 과정들을 생각하면 도피성으로 보여 조금 아쉬움이 남았다. 그럼에도 우시마쓰를 통해 당시 신분제도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그에 순응해가는 인간들, 비난하며 괴롭히는 인간들, 그에 맞서는 인간들을 다양하게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신념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메시지를 받은 것 같다. 타인의 비난을 극도로 싫어하며 두려워하기까지 하는 나에게 우시마쓰 같은 용기는 없겠지만 그를 지켜보면서 마음 한구석이 든든해지며 힘을 얻었던 것도 사실이다. 내게 주어진 인생이니 내 맘대로 살 것이 아니라 똑바로 살아야 한다는 울림이 다시 한 번 내면에 일렁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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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15-01-18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어보고 싶습니다. 멋진 서평 잘 읽고 갑니다.^^

안녕반짝 2015-01-19 14:17   좋아요 0 | URL
끝이 조금 허무하다고 느낄 수도 있는데 기대하지 않아서 그런지 전 좋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