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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의 집 1 - 큰 숲 속의 작은 집
로라 잉걸스 와일더 지음, 가스 윌리엄즈 그림, 김석희 옮김 / 비룡소 / 2005년 9월
평점 :
품절
자정이 넘은 시각. 눈이 몹시 아팠고 두통도 약간 있었다. 글씨가 매우 작은 책을 집중해서 보느라 눈의 피로가 절정에 달해 있었다. 잠자리에 들어야할 시간이지만 잠이 오질 않았다. 요 며칠사이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깨는 일이 잦았고 늦게까지 책을 보다 늦잠을 자기 일쑤였다. 책을 더 읽고 싶었지만 도저히 손에 잡히지 않아 언제든지 책 이야기를 편하게 할 수 있는 지인과 SNS로 대화를 시작했다. 그러다 지인이 결혼선물로 준 이 책이 언급 되었고 얘기가 나오자마자 책장에서 이 책을 꺼내 읽었다. 눈의 피로가 극심했던 터라 30분 정도 책을 읽고 잠이 들었다. 그리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이 책을 펼쳐들었다. 뭐랄까. 이 책을 읽고 있으면 꼭 겨울방학을 맞아 신나게 뛰어노는 기분이 들었다.
지인은 이 책속의 잉걸스 가족처럼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책 속의 당찬 딸들처럼 달달한 시간을 보내길 바란다며 결혼선물로 주었다. 당시에는 고맙다는 인사만 하고 언제 읽을지 알 수 없어 책장 높은 곳에 올려두었다. 그러다 태중에 아기와 함께 읽으면 더 좋을 거라고 언급해 주어서 꺼내들게 되었다. 내가 품고 있는 아이도 딸이고 이 책 속에 사랑스런 딸들이 나온다고 하니 지금이 적정하다 싶어 얼른 꺼내들었는데 기대이상으로 행복한 기분을 맛보고 말았다. 나의 어린 시절 생각도 많이 났고 나의 아이들이 자라나서 이렇게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다면 좋겠다는 희망이 샘솟았다.
저자는 65세의 나이에 딸의 권유로 이 책을 쓰게 되었고 1932년에 출판되자마자 반응이 좋아 총 9권의 책(마지막 책은 사후에 출간되었다고 한다.)을 집필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TV로 방영되어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이 연작은 저자의 자서전이자 19세기 후반의 미국 사회사가 풍부하게 담겨 있을 뿐 아니라 남북전쟁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 개척지에서 벌어지는 일상생활의 갖가지 모습들이 어린 소녀의 순수한 눈을 통해 아기자기하게 그려졌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시대적인 배경은 옮긴이의 설명으로 자세하게 알게 되었지만 그런 사실을 차지하고라도 로라가 경험하고 보는 모든 것들이 무척이나 사랑스럽게 다가온다. 얌전한 언니, 갓난쟁이 귀여운 동생, 다정한 아빠, 가족을 위해 많은 집안일을 하면서도 늘 사랑으로 대하는 엄마의 틈바구니에서 한 가정의 행복을 낱낱이 보여주고 있다.
로라가 사는 곳은 위스콘신 주의 큰 숲 속 통나무집으로 온통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는 곳이다. 겨울을 준비하는 로라네 가족이 안락한 통나무 집 안팎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일들을 그려내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모든 것을 자급자족해야 했던 척박한 시대였지만 삶에 찌든 모습은 로라네 가족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고 필요한 만큼 욕심 부리지 않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비춰졌다. 아빠는 겨울을 준비하기 위해 사냥을 하고, 엄마는 아빠가 준비한 식량을 비축하고 언니 메리와 로라는 엄마의 일을 거들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겨울이 되어 아빠가 사냥을 하지 못하고 아이들도 밖에 나가서 놀 수 없을 때면 늘 난롯가에서 아빠는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바이올린을 켰다. 아빠가 들려주는 다양한 이야기를 들으며 아이들은 잠이 들었고, 숲 근처에 살고 있는 할아버지, 삼촌, 이모네를 방문하면서 경험한 많은 이야기도 들려준다. 로라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상들은 특별할 것 없어 보이지만 당시의 생활상이나 문화를 잘 알 수 있었고 소박하면서도 정이 살아있는 가족들의 우애를 살펴볼 수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로라네 가족이 오순도순 살아가는 모습에서 내가 꾸려가고 싶은 행복을 맛보았고 그 행복감이 흘러넘쳐 책을 마주하고 있는 시간을 풍요롭게 느껴졌다.
9남매의 막내로 자란 나는 막내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기보다 늘 치열함 속에 살았다. 어릴 때 시골에서 자라 들판을 마구 쏘다니며 말썽도 부리고 신나게 뛰어 논 기억은 있지만, 워낙 식구가 많아 살림이 팍팍하다 보니 로라네 가족 같은 안락함은 거의 없었다. 부모님이 나이가 들고 우리들이 다 자란 뒤에야 조금 살만해졌다는 되새김을 할 정도로 당시에는 생활을 한다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자 시간을 견디는 힘을 주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로라가 경험한 자잘한 추억들을 듣고 있노라면 시골집 마당에서 보았던 수많은 별들, 겨울이면 비료포대로 눈썰매를 타고 스케이트를 만들어 손이 얼얼해질 때까지 빙판위에서 미끄럼을 타고, 정월대보름이면 직접 구멍을 뚫은 깡통으로 쥐불놀이를 했던 수많은 추억들이 떠올랐다. 로라가 태어나고 자란 곳과 시대적 배경은 판이하게 다르지만 자연 속에서 자랐던 공통점 때문에 이 책을 읽으면서 더 행복감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로라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내가 경험한 비슷한 경험이 떠올라 주절주절 떠들고 싶은 마음이 앞선다. 하지만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느낌은 그런 수다스런 추억담을 쏟아내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 옮긴이가 말한 것처럼 가족 간의 우애, 자연의 축복, 노동의 즐거움, 고난을 이겨내고 진보를 이룩해내는 인간의 존엄성이 평화롭고 소소하게 전달되었다는 점이다. 현재 내가 살고 있는 도시의 편리함의 이면에 있는 온갖 소음과 공해들을 말끔히 잊어버릴 수 있는 청량감이 내 안으로 들어와 위스콘신 주의 숲 속을 거닐고 있는 기분이었다. 마치 초등학생 시절로 돌아가 탐구생활을 풀다 잠시 펼친 책에서 만난 다른 세계의 이야기처럼 나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거듭나게 해 준 것 같다. 이 행복감이 앞으로 남은 8권의 연작 소설에서도 이어질 거라 생각하고 태중의 아기에게도 전해졌음 하는 바람이다. 내가 꾸린 가정이 이렇게 행복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작품을 만난 것이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