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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취도시, 서울 - 당신이 모르는 도시의 미궁에 대한 탐색
이혜미 지음 / 글항아리 / 2020년 2월
평점 :
2019년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극단적 빈민이 최저 실존을 위해 몸 누일 공간 ‘한 쪽’을 얻으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들의 ‘가난해서’ ‘괴로운’ 상황을 이용해 폭리를 취하고, 착취에 가까운 임대업으로 부의 첨탑을 쌓아가고 있다. 이른바 ‘빈곤 비즈니스’다. 19쪽
외면하고 싶었다. 분명 책을 읽는 내내 암울할 것 같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좌절할 게 뻔했다. 예상대로 얇은 책임에도 읽는데 긴 호흡이 필요했다. 자주 멈췄고,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다잡으며 읽었다. 사람들의 이기심이 만들어낸 현실이 너무나 처참했다. 쪽방촌에 관한 이야기는 사회면 기사로 접했지만 자세히 아는 게 없었다. 그럼에도 쪽방촌의 행태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사람들이 머물 수밖에 없는 이유, 어떤 구조로 여전히 쪽방촌이 횡행하는지, 쪽방촌이 사라지면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알아야 할 것 같았다.
쪽방: 방을 여러 개의 작은 크기로 나누어서 한두 사람이 들어갈 크기로 만들어놓는 방. 보통 3제곱미터 전후의 작은 방으로 보증금 없이 월세로 운영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35쪽
난방도 되지 않고, 취사, 세면, 화장실 등이 적절하게 갖추어지지 않은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이런 쪽방은 보증금이 없다는 이유로 월 20~25만원이다. 실체가 불분명한 쪽방은 숙박업도 임대업도 아니라 온갖 법망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이런 쪽방을 과연 누가 운영을 하고 있는 걸까? 저자는 주민들의 인터뷰를 토대로 종로구 창신동의 쪽방촌의 건축물대장과 등기부등본을 모두 떼어서 추적해가다 보니 ‘쪽방 주민의 고혈을 쌓아 올린 빌딩’은 ‘가족 비즈니스’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섯 채의 건물에서 어림잡아 1400만원의 현금 소득을(세금은 내지 않는다) 올리고 그 소득으로 역세권에 건물을 세운 것이다.
우리 사회에 침투한 친자본주의는 쪽방마저 재테크의 수단으로 변질시킨 비정한 형태였지만, 감히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의 천박함이어서 기사화되지 못했던 것이었다. 83쪽
쪽방촌의 소유주를 추적해 나가다보니 재테크로 여기는 사람들이 소유를 했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비인간적인 공간을 내어주고 부를 쌓는 대상으로만 본다는 사실이 더 충격적이고 씁쓸했다. 쪽방촌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 그곳을 떠나라고, 시청에 쪽방촌을 없애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보증금 없이 일세로도 살 수 있는 쪽방은 동시에 거리 노숙을 막는 자원으로 활동되는 게 사실’이고, 쪽방촌을 변화시키려 해도 소유주들의 횡포에 맞서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었다. 이런 행태는 대학가 쪽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9가구 거주 공간으로 허가를 받아놓고 더 많은 임대수익을 올리기 위해 34가구로 쪼갠 신쪽방촌. 신축, 리모델링, 풀옵션의 가면을 쓴 이런 신쪽방촌은 학업을 위해 서울로 올라온 ‘뜨내기 손님들에겐 허울 좋은 곳’일 뿐이다.
세상이 얼마나 청년들을 가혹하게 청년들을 각자도생과 자력구제로 내모는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착취해 피라미드 한 층을 올라가는 누군가에 대해 얼마나 윤리적으로 무딘지를. 191쪽
잠입취재를 한 저자가 둘러 본 신쪽방촌은 공간에 사람을 가눠놓고 보증금 500에 관리비 포함 50만원이 기본이었다. 너무 좁아서 월세가 센 다른 방을 아무리 봐도 ‘좁다’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 상황. ‘막말로 요즘 대학생들 공부한다고 바빠서 집에 잘 있지도 않는데, 넓은 건 그렇게 대수가 아니에요.’ 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중개사의 생각이 섬뜩했다. 저자 말대로 당신이라면 이런 곳에 월 50만원이 넘는 돈을 주고 살 수 있을까?
세상 사람들은 쪽방 사람들이 그곳에 살아야 할 이유가 있기 때문에 가난을 견뎌야만 한다고 말하죠. 그 한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67쪽
이른바 빈곤 비즈니스는 “빈곤층을 대상으로 하되, 빈곤으로 벗어나는 데 기여하는 것이 아닌, ‘빈곤을 고착화’하는 산업”이다. 나에게 수익이 생긴다는 이유로 누군가의 삶을 빨아먹는 쪽방 투자. 기숙사를 지으려고 해도 임대업자들의 반대로 주거 난민이 되어가는 대학가. 비단 이 둘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누군가가 이익을 본다는 것은 누군가는 그 대가를 지불하고 있다는 의미이고, ‘가지지 못한 자는 애면글면하며 계단 하나를 올라서지 못하고 가진 자는 가지지 못한 자를 착취하는 비정한 도시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는 게 현실이다. 내가 계단을 오르기 위해서 다른 이가 힘겹게 올린 계단을 밀어버리는 행위는 언제까지 행해져야 하는 걸까? 이런 물음을 자체가, 이런 물음에 대답할 수 없는 사실이 그저 답답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