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 작가라면 다 산다!' 1순위는 단연 권교정에게로 돌아가야 옳다. 물론, 이 리스트에 올라갈 작가들은 앞으로도 무궁무진하다. 이미 소개했던 작가들 이외에도 이마 이치코, 이츠키 나쯔미, 라가와 마리모... 그런데 지금 언급한 작가들에 대해선 어느 정도 이성적 판단이 가능하다. 그러나 권교정이라는 작가에 대해선 이성이 작동하질 않는다. 그냥, 무조건, 맹목적으로 그녀의 작품을 사랑한다.
사랑하는 데 이유를 붙이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고 했던가. 그래도 내가 그녀의 작품을 이토록 사랑하게 된 계기를 회상해보자.
어느날, 동생은 낯선 작가의 <붕우(朋友)>라는 단편집을 빌려왔다. 대단히 우울해뵈는 표정으로 무장을 갖춰 입은 남자의 얼굴이 그려진 표지였는데, 느슨한 마음으로 동생 방 벽에 기대어 책을 보던 나는 맨 처음에 실린 표제작 '붕우'의 마지막 장을 읽으며 어느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마, 단 하나의 단편을 보고 이토록 한 작가를 좋아하게 된 건 정말이지 처음있는 일이었다. 내 딴엔 그건 운명과도 같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녀의 작품들을 향한 나의 집요한 짝사랑이 시작되었다.
이 작가의 만화는 이렇게 내 마음을 깊이 울렸음에도 불구하고, 연재를 시작한 잡지마다 폐간 혹은 휴간되는 바람에 완결시킨 만화도 변변히 몇 편 없고, 자신의 이름도 잘 알리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 내 수중에 있는 <헬무트> <제멋대로 함선 디오티마> <GYO의 리얼토크> <적월전기> 등의 작품들은 생각보다 귀한 것들로, 현재 시중에서 구하기가 어렵다. (심지어 <헬무트>엔 권교정의 사인이!!! -> 이것은 자랑) 서점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면서 수집벽은 활활 불타올라, 대여점까지 뒤진 끝에 대화미디어판을 제외하곤 거의 완벽한 권교정 컬렉션을 완성하게 되었다.
만약 유려한 그림체를 좋아하는 이라면, 권교정의 만화에는 손길이 선뜻 가지 않을 것이다. 작가 자신도 자학하고 있지만-이 작가는 끊임없는 자학개그로 독자들의 가슴을 후벼판다-, 솔직히 데뷔 때나 지금이나 이 작가의 그림체는 크게 달라진 게 없다. 좀 더 세련되고 힘있는 선을 긋게 되었다는 것 외엔. 그러나 그러한 그녀의 그림체는 자신이 만들어낸 스토리에 아주 잘 어울린다. 그녀의 그림체와 내러티브 모두는 이 세상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기묘한 슬픔과 안타까움, 우아함을 갖추고 있다. <제멋대로 함선 디오티마>에 나오는 대사 한 대목이야말로 그녀의 만화가 갖고 있는 미(美)에 적절한 표현을 들려준다.
어쩌면 그녀에겐
아름답다는 표현보단
묘하게 사람을 끄는
그 무언가가 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게다-.
거역할 수 없을 정도의 호감.
압도적인 안타까움.
그런 류의 사람을 끄는 무언가가-.
다행스럽게도, 이러한 감정을 갖고 있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자칫 세월 속으로 잊혀져 버릴 뻔 했던 권교정은 팬덤의 힘으로 다시 부활하게 된다. 자신이 직접 운영하는 홈페이지 '교월드(www.gyoworld.com)'의 지지자들을 기반으로 해 다시 힘을 얻은 그녀는 <붕우>와 <피리부는 사나이> <정말로 진짜!> 등을 재판하고, 새로운 연재 <마담베리의 살롱>과 단행본 <매지션> 등을 출간하게 된다.
개인적인 생각으론, 활동의 공백기 동안 권교정의 정신세계는 미묘하게 달라진 듯 하다. 이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작품을 읽다보면 '압도적인 안타까움' 뒤엔 낙천적이고 따뜻한 느낌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는데, 최근작인 <마담 베리의 살롱>이나 <매지션>에서는 '안타까움'이라는 감정과 함께 '단호함' 혹은 우울한 오오라 같은 것이 느껴진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푸른 빛을 발하는 바짝 선 칼날과 같은 그녀의 화면과 대사는 읽는 사람의 마음을 에인다. 하지만 읽는 이가 느끼는 것은 아픔이나 고통이 아니라 '안타까움'이다. 어딘지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자의 시선, 그리고 '아, 그렇구나'라는 비명같은 탄식.
아마 만화를 모으게 되지 않는 날이 오더라도-그런 날이 올려나-, 모든 책을 다 포기해야 하는 순간이 오더라도 권교정의 책만은 포기할 수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