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포리스트 카터 지음, 조경숙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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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건 무척이나 힘든 투쟁이었다. 모두들 녹초가 될 만큼 지쳐갔다. 그러던 어느 날 벌목꾼들이 길을 고치고 있을 때, 커다란 흰참나무 한 그루가 마차 위로 넘어졌다. 노새 두마리가 깔려 죽고 마차는 박살이 났다. 할머니 말로는 튼튼하고 잘 뻗은 나무여서 넘어질 이유가 하나도 없었는데 그렇게 넘어졌다고 한다.  

드디어 벌목꾼들은 길닦기를 포기했다. 곧이어 봄비가 내리는 우기가 시작되었고... 그후 그들은 두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보름달이 꽉 찼을 때 체로키들은 흰참나무 숲에서 잔치를 벌였다. 모두들 둥글고 노란 달님 아래서 춤을 추었다. 그랬더니 흰참나무들도 가지를 서로 스치거나, 가지로 체로키들을 건드리면서 함께 춤추고 노래불렀다. 또 다른 나무들들 구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내던진 그 참나무를 애도하는 노래도 불렀다. 그 느낌이 워낙 강해서 할머니는 공중으로 붕 떠오르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고 하셨다. 

"작은 나무야, 이런 이야기는 절대 하면 안된다. 백인들의 세상에서 그런 이야기를 해봤자 아무 쓸모도 없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넌 반드시 이 이야기를 알아두어야 해. 그 때문에 내가 너한테 이야기해주는 거란다." 

그제서야 나는 영혼이 빠져나간 마른 통나무만을 땔감으로 쓰는 이유를 알았다. 또 그때서야 비로소 숲과 산에도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지은이 포리스터 카터의 자서전적 소설이라는 이 책, 그래서인지 픽션과 실화의 경계를 종잡을 수 없이 읽었다. 그 전에도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삶의 방식은 여러 권의 책을 통해서 너무나 특별하게 다가왔다. 우리에게는 픽션일 수밖에 없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그들의 삶에서는 실제로 그들 삶의 자연스러운 한 부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들 삶의 방식을 경외감으로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그러한 삶의 기회는 결코 오지 않겠지만... 다른 삶의 양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살아가는 것만도 다르다는 생각이었다.  

"자연의 비밀은 이미 다 밝혀졌고, 자연에 영혼 따위는 없다고 하면서 자연을 비웃는 사람들은 아마 산속의 봄태풍을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일 것이다. 자연이 봄을 낳을 때는 마치 산모가 이불을 쥐어뜯듯 온 산을 발기발기 찢어놓곤 한다. 

겨울 찬바람을 악착같이 버티고 살아남은 나무가 있는데, 자연이 그걸 없애버리려고 마음먹었다고 하자. 자연은 그 나무를 땅에서 뿌리째 뽑아 산 아래로 굴려버린다. 온갖 관목과 나뭇가지들 사이를 훑고 지나가다가 약하다고 느끼는 것이있으면 그 바람 손가락으로 말끔히 없애버리는 게 바로 자연이다.  

자연이 보기에 없애버려야 하는데 바람의 힘으로 쓰러뜨릴 수 없을 때는, 그저 꽝! 하고 내리치면 된다. 그러면 그 자리에는 불타오르는 거대한 횃불만이 남게 된다. 자연은 살아있고 출산의 진통을 겪는다. 산에서 봄을 맞아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것을 알 수 있다. 할아버지는 작년에 남겨둔 모든 찌꺼기들을 자연이 깨끗이 쓸어없애는 중이라고 표현하셨다. 그래야 자연의 새로운 출산이 정갈하고 튼튼한 것으로 될 수 있다고 하시면서. 

태풍이 지나고 나면 작고 밝은 연초록빛의 새로운 생명들이 덤불이나 나뭇가지에서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다. 그러면 자연은 4월의 비를 내려준다. 부드럽고 촉촉한 비에 젖은 산골짜기가 안개로 뿌예지면 나뭇가지에 매달린 물방울들이 길 위로 똑똑 떨어졌다. 

4월의 비에는 상쾌하고 들뜬 기분과 왠지 모를서글픔이 함께 배어있다. 할아버지도 항상 그런 감정들이 뒤범벅된 느낌을 받는다고 하셨다. 그 비는 서글픈 기분을 갖게 한다. 아무도 그걸 붙잡아둘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건 눈 깜짝할 새에 스러져가는 그리움 같은 것이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가졌던 또다른 즐거움 하나가 바로 이것, 자연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제 아무래도 자연의 소리를 듣지 못한 채 살아간다. 삶은 자연이 아니라 콘크리트와 아스팔트에 갇혀 버렸다. 아니 갇힌 게 아니라 스스로를 거기 가두고 안심하고 살아가는 것이리라.. 자연은 때로 두렵고 때로 얕잡아보이고, 대부분은 생소한 것이다. 그런 우리에게도 자연과의 소통을 희구하는 본능이란 게 아직은 남아있는가. 이 책을 읽는 내내 자연의 소리를 듣는 일이 마음을 울렸다. 마치 새로운 탄생을 위해 남아있는 모든 찌꺼기들을 자연이 쓸어내려고 할 때 모든 것을 산 아래로 굴려가듯, 마음에 돌들이, 또  부러진 나무들이 굴러가는 우릉우릉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커다란 울림으로 자연의 이야기가 다가왔다. 아직은 우리 몸 일부에, 우리가 그저 자연의 일부이며 아무리 아닌 듯 살아도 본능은 남아 때로 이렇게 울리기도 한다는 것, 그걸 느낄 때 신비로왔다.  

다섯 살 여섯 살의 작은 나무는 체로키 인디언인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산에서 생활하며 말 그대로 자연 그대로 살아간다. 산은 한없이 정답고 때로 한없이 크고 강하다. 산의 힘있는 부드러움, 그 산의 품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물과 무생물들의 존재를 함께 사는 동반자로서 느끼고 살아가는 것이다. 두 분 어른들이 오랜 경험과 지혜로 작은 나무를 받쳐준다. 아니, 산과 산속 생물들의 사랑에 눈뜨게 해준다. 다들 그런 존재로 살아가면서 우호의 팔을 벌릴 때, 그때 자신의 손을 뻗어 스치기만 해도 되는 것이다. 공존의 아름다운 삶이다. 지은이가 작은 나무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별빛과 같이 반짝인다. 이렇게 아름다운 이야기를. 자전적 소설이라는 형태로 우리에게 들려주는 포리스트 카터의 삶에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비극적인 이야기. 이 이야기의 작가는, 믿을 수 없게도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였다는 것.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흑백분리주의자의 단체인 KKK단원이었으며, 그 지도자의 연설문을 작성한 사람이었다는 것, 믿을 수 없었다. 백인우월주의 어디에 이 책 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석류알같은 영혼의 이야기가 깃들 수 있단 말인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책을 다 읽고서야 그 사실을 인터넷에서 보게 되었다. 책 자체에서 오는 감동은 그대로 누린 터이니 다행이라 해야 할까. 그 뒤에 느낀 배신감, 당혹감은? 결국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 맘껏 비난하기도 아직 석연치 않다. 아니었으면, 하는 바램이 한자락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보석과도 같은 한 권의 책이 삶과 철저히 분리된 작가적 재능의 산물이라는 것을 어떻게 쉽게 믿을 수 있겠는가? 지은이가 스스로 믿지 않는 것을 독자인 우리는 또한 믿을 수 없다... 결국 섣불리 단정지을 수 없는 채로 마음을 닫아둔다. 어리석게도, 시간이 그 이유를 들려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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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토끼가 도망친다 ㅣ 미도리의 책장 1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김선영 옮김 / 시작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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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작가 아리스가와 아리스와의 첫 만남.  

우리나라와는 달리 일본은 추리라는 장르가 오래전부터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아주 인기있는 분야라고 한다. 작가층도 두텁고, 작품 수도 많은 만큼 인기 있는 작품도 셀 수 없이 많고, 열성적인 독자층도 탄탄하다고 한다. 지적인 유희라든가, 몇 번이고 계산된 속임수-트릭-라든가, 이런 속성으로 하여 우리나라에서는 작품성과 별개로 생각해 온 분야인데 말이다. 그런 구분은 점차 엷어지고, 우리나라에서도 추리소설의 작가나 독자층이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하니 언젠가는 우리도 폭넓은 작가- 독자층을 확보할 지도 모르겠다. 그런 날이 오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래도 그건 우리 식의 추리소설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아리스가와 아리스라는 이름이 눈에 띄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따온 스스로의 작명이라는 이야기도. 역자인 김선영씨에 따르면 그 스스로 택한 '앨리스' 라는 이름에서 보듯 환상주의, 초현실주의, 은유를 좋아하는 취향이라고 하는데, 확실히 뭔가 스타일이 느껴지는 작가다. 스스로 추리작가로 소설 안에 1인칭으로 자주 등장하는데, 실제로는 언제나 문제를 풀어가는 건 히무라이니까, 홈즈- 왓슨 구도로 가기로 작정한 거다. 그러나 왓슨은 또한 작가 코난 도일의 창작 인물로 설정되는데 비해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스스로 작가이면서 작품에 등장하는, 작가와 결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게 만드는 장치를 쓰는 게 다르다. 그게 유머러스하다. 스스로를 희화적으로 표현하기로 작정한 작가의 장난기랄까, 그런 데서 왠지 '추리소설'을 대하는 작가의 애정이 느껴진다.  

이 책에 나오는 네 편의 작품을 작가 스스로 짧게 해설한 것을 보면 더 그런 느낌이 든다. '부재의 증명'은 조금 색다른 알리바이 트릭 작품이고, '지하실의 처형'의 테마는 말할 것도 없이 범행의 '뜻밖의 동기'이며, '비할 바 없이 성스러운 순간'은 다잉 메시지, '하얀 토끼가 달아난다'에서는 철도 트릭이라는 것과 잘 보이지 않는 범행 동기가 작품의 구성 요소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게 마치 종합세트처럼, 각각 다른 유형의 추리를 펼쳐보이려 노력한 것도 아리스 라는 작가의 열정의 산물로 보이지만, 어쩐지 코믹하게 느껴진다. 추리는 일종의 심리적 동기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밀실 트릭이라든가 철도 트릭이라든가 하는 유형 안에 심리의 요소가 살짝 가려지는 것이다. 도대체 범죄의 방식과 동기라는 것이, 그런 특정 유형 안에 갇힐 수 있는 것일까? 나로서는 그게 의문이다. 그런데 일본 작품에서는 그렇게나 많이 그런 유형들을 다루고 있는 것을 보면, 그게 또 추리의 기본 코드인가? 싶기도 하다. 그래도 나는 그렇게 많은 일본 작가들이  밀실 트릭을 창조해내고 또 그걸 풀어가는 걸 지적인 유희로 느낀다는 사실이 여전히 신기하다.

이 작품집에서는 히무라도 아리스도 크게 존재감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어쨌거나 뒤에 붙은 '타잎' 을 분류 해설해놓은 것과는 별개로, 하나하나의 작품들이 다 탄탄하고 재미있는 작품들이었다. 좀더 많은, 특히 긴 작품을 한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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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디자인 산책 ㅣ 디자인 산책 시리즈 1
안애경 지음 / 나무수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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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손에서 놓아 옆에 자리하고 있는 책 한 권을 보며, 또다시 마음이 두근두근한다. 책에서 오는 좋은 기운 탓일게다... 표지의 자작나무 무리가 더할나위없이 디자인적(? 이런 표현 가능한지? 아름다운 북디자인이란 뜻이다)인데, 그 사진의 자작나무가 바로 핀란드를 상징하며 혹독한 추위와 그 속의 고요를, 자연에 순응하는 삶과 조화로운 생활을 생각하게 한다. <핀란드 디자인 산책>, 이 책에 첫 리뷰를 달게 된 것이 더없이 즐겁다. 

핀란드. 

내게는 자작나무 숲, 수많은 호수, 백야, 산타클로스, 노키아 휴대폰, 고르게 우수한 성과를 내는 이상적인 교육, 사우나, 시벨리우스,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유리공예품, 들의 이미지였다. 본 적이 없는 노키아를 빼고는, 모두 아름다운 이미지들이다.

디자인. 

나는 생활 속의 디자인에 특히 공감한다. 일상의 삶과 유리되지 않는, 일상의 삶 자체를 아름답게 느낄 수 있게 만드는 디자인의 힘에 주목한다. 더 나아가 일상의 삶과 유리되어 박제화된, 전시장에서만 빛을 발하는 작품은 내 관심의 영역에서 별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다. 일상의 공간에서 일상적인 도구와 재료를 써서 삶을 디자인하는 작업-혹은 놀이-을 즐긴다. 필요에 의해 공간을 살려내고 빛나게 하는 일이 내겐 흥미롭다. 평범 소박한 삶이지만 그것으로 재미있어지는 삶이다. 디자인은 여러가지로 내게 중요한 의미가 있다.  

산책. 

늘, 마음에 담아두는 아름다운 언어다. 보통의 인간이 구가하고자 하는 '1/3의 일하는 시간, 1/3의 잠-휴식의 시간, 1/3의 놀이하는 시간'의 원칙에서 볼 때, 산책은 그 어디에도 쉽게 들어가지 않는 시간이다. 그것은 놀이라고 하기에는 관조적이며, 휴식이라고 하기에는 적극적이다. 물론 일이라고 하기에는 여유롭고 평화롭다. 그것은 24시간 중의 어느 틈새의 시간에 존재하는 특별한 무엇이리라. 산책은 명상과 관조를, 때로는 편안하고 무심한 관찰을 동반한다. 산책은, 자연의 그늘을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행위이다. 

그래서, <핀란드 디자인 산책>이라는 책, 덥석 집어들어야 했다. 내게는 이 아름다운 단어들의 조합이 얼마나 매력적으로 들렸는지 모른다. 지은이도, 내용도 모르는 채 먼저 보고 싶었다. 

핀란드에서 아티스트로 살아가는 안애경 씨가 감성적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1, 핀란드는 일상이 디자인이다: 핀란드 사람들의 일상에 스며들어 있는 디자인의 감수성을 작품들의 사진을 중심으로 이야기한다. 이야기는 짧고 툭툭 끊어진다. 마치 우연히 접하는 일상의 자잘한 것들을 붙들고 이야기하다가 길을 나서면 그곳에서 눈에 띄는 것들을 다시 붙들고 이야기하는 식으로. 그녀는 마치 핀란드를 가이드하듯 여기저기 우리를 데리고 다니며 눈에 띄는 것마다 이야기를 풀어놓기를 즐기는 것 같다. 이 장의 소제목들은 '겨울 산책길에서', '커피 한 잔의 여유', '봄의 문턱에서'... 이런 것들이다.  

2. 핀란드 공공디자인의 의미: 인솔자가 그에게 이끌려 다니는 한 무리들을 아예 자리에 앉혀놓고 조금 정색을 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도시 계획과 공공 건축, 전통을 허물지 않고 자연스럽게 보완하며 이어가는 핀란드식 삶의 모습들에 대해 길게 이야기한다. 그 속에 많은 사진들.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놀라울만큼 아름다운 건물들 몇과 옛 주거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 도심의 휴식 공간, 교통 체계과 같은 인프라에 담긴 정신을 보여준다. 이야기가 안정을 찾고 점점 흥미로와진다. 내가 공공 디자인과 건축에 조금은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2장 전체를 보고 나니 더 많이 보고 싶어졌다. 책의 분량과 배분이 그러하겠지만, 시작했으니 좀더 본론으로 깊이 들어가고 싶은데 끝나니 아쉬운 지경이었다.

3.핀란드 사람, 그리고 디자인 철학: 핀란드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의 모습도 슬쩍 보여주고, 그들의 문화와 디자인을 받아들이는 그들의 철학도 잠깐 소개한다. 지은이는 이미 핀란드 현지의 여러 지인과 오래간 교류한 터이니, 그들의 생활을 옆에서 지켜보는 관찰자이다가 때론 함께 누리는 생활자이기도 하다. 그것은 여행자의 시선이 아니어서 좀더 침착하고 편안하다.  

대체로, 글을 전문으로 쓰는 사람의 체계 같은 것은 그리 느껴지지 않는다. 예술가적인 감성이 지은이의 목소리 곳곳에서 분출하듯 튀어나온다. 1장에서는 그게 약간 어수선한 느낌을 주어서 오히려 책에 몰입하기 어려웠다. 약간은 거리를 두고 관찰하면서 읽게 되었다. 그렇게 들쭉날쭉하는 이야기에 약간 적응도 되고 싫증도 날 무렵, 2장이 다가왔다. 꾸준하고, 안정적으로. 이 한 권의 책은 그런 식으로 내게 나름의 균형을 요구했다. 곧 즐거운 균형이 되었다. 지은이의 예민한 감성이 묻어나는 발언 곳곳에 핀란드적인 사고에 대한 깊은 공감이 느껴진다. 실은, 관심을 갖고 이 책을 집어든 독자라면 누구나 공감하게 될 내용들이지 않을까.  

'다이내믹 코리아'가 한국의 힘이라고들 한다. 정말로 그건 뭘까, 라는 생각이 이 책을 보는 동안 불쑥 떠오른다. 어쩐지 너무나 쉽게 바꿔치워 과거를 잃어버린다는 것, 뒤돌아봄 없이 앞으로만 달려나가야 하니까 멈춰 설 틈도 없다는 것, 함께 한 발을 딛기 보다는 나 혼자 앞으로 튀어나가는 것이 더 나은 생존의 기술이라고 가르치고 배우면서 살아간다는 것, 이런 얄팍한 생존의 기술을 살짝 컬러풀하게 포장해버리는 단어의 기술은 아닐까? 하는 생각. 그럴지도 모른다는 의혹은 책갈피 곳곳의 담담한 서술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현재라는 시간을 살아가는 건 이곳이나 저곳이나 마찬가지일지언정,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은 확실히 달라보인다. 일단 가고있는 길은 차이가 있다. 때로는 잠시 멈춰서서,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타인을 지켜보는 일이 필요하다.

'바다와 인접해 있는 헬싱키 시는 100년 전후를 생각하며 도시계획을 세워나가고 있다. 도시 마스터 플랜을 재정비하는 데만 30년이 걸렸다. 계획을 실행하기 전에도 참으로 오랜 시간에 걸쳐 시민들의 의견을 듣고 계획을 재검토한다. 마스터 플랜을 시각적인 그림으로 확인하게 되면 사람들은 앞으로의 변화를 실감한다. 계획이 실현되려면 지금까지 진행된 시간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그 어떤 변화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도시의 변화는 사람들 개인의 이익과는 무관한 일이며 다음 세대를 위한 변화임에 남다른 관심을 가질 뿐이다.' -144쪽 

'핀란드는 사실 소비성 물질이 풍부하지 않다. 화학 섬유를 생산하는 공장도 없다. 자연환경과 사람의 건강을 해치는 일은 국가가 우선적으로 제한하며, 엄격한 원칙 적용에 의해 편법이 통하지 않는 곳이다. 사람들이 환경을 생각하고 새로 만들어 내는 자원이 아니라 자연에서 그리고 넘치는 쓰레기를 보고 발상의 전환을 통해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는 사회 분위기를 갖추었다. 사실은 까다로운 제한 때문이라기보다 사람들 스스로 자연 그 자체에 이미 많은 자원이 있다는 점을 깨닫고 있다. ' -78쪽 

'곳곳에 사람들이 쉬어갈 만한 벤치들이 공간에 따라 다른 형태로 놓여 있다. 간결하고 기능적인 디자인은 모두를 배려한 디자인이다. 공공장소에 놓이는 벤치들은 도시계획에 포함되며 디자인을 하기 전 담당 공무원은 현장 조사를 수없이 많이 한다. 어떤 연령의 사람들이 사용하는지 반복해서 관찰한 후에 디자인을 생각한다. 한번 디자인이 결정되면 다시 바꾸기 어려우니 그 전에 철저하게 계획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디자인이 결정되더라도 바꾸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여전히 도시 공원의 여기저기서 낡고 오래된 벤치들을 그대로 사용한다. 새것보다는 있는 것을 어떻게 활용할지 더 많이 고민한다.' -157쪽  

'예술은 일상의 연속이라는 것을 살아갈수록 점점 더 느낀다. 핀란드 사람들은 예술과 디자인에도 실용성이라는 리얼리티가 담겨 있어야 한다는 걸 중요하게 생각한다. 난 이런 삶의 배경에서 사람들 누구나 예술가이고 디자이너이며 철학자임을 서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280쪽 

이렇게 인식하고 사유하는 지은이는 마지막으로 '나 홀로 벤치'에서 에필로그를 쓴다. 한 권의 책에서 지은이의 감성과 사유를 공감하며 그가 보여주고 소개하는 것들을 사진으로 글로 보고 읽으며 나 또한 지나왔다. ... 산책해 왔다. 안애경씨가 나에게 보여준 핀란드의 느리고 정직하고 조화로운 호흡을 내 삶 속에서도 공유하고 싶다. 언젠가 나 또한 직접 핀란드를 체험하고 싶다는 꿈도 생겼다. 에필로그에 공감한다.  지은이가 사유한 핀란드의 한 단면일지언정, 아래의 말들을 천천히 음미하고 싶다. 

'난 핀란드 사람들에게서 그 고독의 그림자를 보게 된다. 인간은 고독한 존재다. 말 없이 인간 내면으로 고독을 받아들인다. 고독 속으로 철저하게 빠져들며 고독과 친구가 되어 고독을 즐긴다. 그래서 핀란드 사람들은 혼자만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  고독은 다른 한편으로 긍정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공간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공간은 사람 사이를 더욱 안전한 거리감으로 지켜준다는 생각을 한다.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공간은 신뢰의 공간이고 정신적 안정을 갖는 공간이며, 마음을 담은 공간이다.  ... 적어도 내가 공감하는 핀란드 사람들의 공간 개념은 그래서 서로 침묵하는 시간을 유지한다. 사람들이 침묵의 공간을 두고 그 안에 자신을 자유롭게 내버려 두는 시간을 서로 인정한다.  

난 핀란드에서 채우는 공간보다는 비우는 공간 디자인에 대한 철학을 더욱 심도 있게 보게 된다. 섣불리 채우는 공간보다 비워 두는 공간에 대한 디자인 생각을 한다. 고독한 사람들에게서 보는 공간 개념이다.' 

 

한 가지 개인적인 견해를 덧붙이자면, 본문의 활자체가 계속 내용에서 도드라져 보였다는 것이다. 자꾸만 내용을 규정짓고자 하는 활자체라고 해야할까, 한 권의 책을 편안히 길게 읽게하기보다는 짧은 단문을 여러 편 붙여놓은 느낌으로 읽게해서, 그게 내게는 글읽기에 약간 방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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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디자인 산책 ㅣ 디자인 산책 시리즈 1
안애경 지음 / 나무수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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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만이 아니다. 건축과 삶과 거리까지. 마음으로 가까와지는 핀란드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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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로잉 일본 철도 여행 - 스케치북과 카메라로 기록한 ㅣ 드로잉 여행 1
김혜원 글.그림 / 씨네21북스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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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여행을 계획하면서 도서관에서 책을 하나씩 구해보던 중에, 이 책이 출판되었다기에 덥석 사버렸다. 도서관에는 씨네21에서 만드는 어른들의 만화 잡지인 <팦툰>이 잡지실에 비치되어 있는데, 한 번씩 가서 보곤 했다. 거기 김혜원씨가 그리고 쓴 이 만화가 연재가 되었던 걸 몇 번 보았다. 보면서, 아, 일본은 꼭 철도 여행으로 할거야! 다짐을 했던 것. 한 편 씩 볼 때도 슬쩍 흥분되곤 했는데. 몽땅 묶어 책으로 나온 걸 손에 들고, 곧, (실은 언젠가) 하게 될 일본 철도 여행을 하고 있는 나를 상상하며 기분 좋은 떨림을 맛보았다.  

좀더 오래 전, '한겨레 21'이라는 주간지에서 일본 전 구간을 JR 패스로 여행하는 방식을 소개한 적이 있었다. 규슈부터 홋카이도까지 기차로 올라가면서 군데군데 내려 옆으로 빠지면서 여행을 하는 방식인데 보자마자 꽂혔다. 아니, "바로 이거야!" 하면서 그순간 바로 마음 먹어버린 것이다. 그 이후로 언제나 일본 여행은 철도로, 맛있는 것 먹으며 온천 하면서 사람들 만나면서.. 언제나 그렇게 생각했다. 뭔가가 결정되니까 마음도 얼마나 느긋해지던지.  그러던 차에 그저 시간은 흘렀지만, 결심은 변함이 없이 일편단심, 결국 이 책도 만나게 되었다. 이제 든든한 뒷심을 비축해 둔 심정이다. 

여러가지 여행서가 있겠지만, 이 책은 내가 마음 먹고 있는 여행에 불을 지핀 격이니, 책이 도착하자마자 후루룩- 마치 맛좋은 라면을 한입에 먹듯- 맛보았고, 그 뒤로도 물론 옆에 끼고 틈나는 대로 보고있다. 책값이 꽤 묵직한 편이지만... 그러니까 내 경우는 본전을 뽑고야 말 책이다. ^^  

하루차씩 아무 데나 들춰봐도 자주 새롭게 보인다. 군데군데 일본의 다양한 철도 도시락인 에키벤이라든가, 이곳저곳 유명하고 맛있다는 라멘이라든가, 온천에 대한 것, 또는 철도에 대한 정보도 짭짤하다. 일본의 오래된 유명 작가를 오마주하기도 하고, 김혜원 작가 자신의 경험과 인식에 맞춰 하나씩 풀어가는 이야기는 허락된 지면이 짧아서 그리 유장할 수는 없지만 통통 튀어서 인상적이다.  

사진 찍으며 여행 다니는 걸로 부족해 글 쓰고 사진 찍으며 여행 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등장하더만, 이젠 사진 찍고 글 쓰고 그림까지 그리는 사람이 등장해 책을 만든다. 김혜원씨는 다정다감하게 조곤조곤 이야기를 한다. 혼자 여행하는 여자가 누릴 재미랄까, 묘미랄까 그런 걸 쏙쏙 누리는그이의 일본 철도 여행에는 '김혜원 스타일'이라는 말이 어울리겠다.  

여러 사람들이 각각 인상적인 여행을 하고 또 인상적인 여행기를 남긴다. 자신에게 꼭 필요했던 여행, 자신이 너무나 하고 싶었던 방식의 여행을 한 사람들이 자신만의 스타일로 기록을 남기고 그 기록을 책으로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다는 것, 정말 부러운 일이다. 모두들 나만의 여행을 하고 돌아오지만, 아무나 나만의 여행기를 내 스타일로 써낼 수는 없다...  게으르고 또 실제로 다녀오고 나면 시간도 없고, 게다가 맛깔지게 만들어내는 것은 더더욱 어려우니까. 그래도 마아, 너무 아쉬워 하지는 말 일이다. 이렇게 스타일 되는 여행기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것을 들추며 내 여행을 꿈꾸거나 혹은 이미 다녀온 여행을 반추하는 것도 나름의 맛이 있으니 그것으로라도 한동안은 충분히 즐겨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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