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광수커피 케냐 AA 100g - 원두(빈)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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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케냐AA커피는 기본을 느끼게 하는 맛. 익숙하고 편안한 '일상의 커피'의 중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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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광수커피 이디오피아 이가체프 100g - 원두(빈)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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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체프는 확실히 다르다. 발랄 상큼하게 살짝 띄우고 싶을 때 골라 마시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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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슬픈 아시안
이시이 코타 지음, 노희운 옮김 / 도솔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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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렇게까지.. 

지은이를 따라 아시아 여덟 나라의 어두운 이면을 다니다가 마지막 다다른 인도에서는 정말 아찔했다. 도저히 책을 계속 읽어나갈 수가 없었다. 더욱 대책없는 사실은 이 책의 내용은 픽션이 아니라 고스란히 현실이라는 것,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실은, 지구상 어디서나 일어나고 있는 그 숱한 어이없는 끔찍한 일들 중 하나일 뿐이고, 우리 중 누구도 그런 무서운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 투명 에머랄드빛 아름다운 지구같은 건 그저 이상의 개념일 뿐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정도의 어둠, 저 산 너머의 아득한 폭발 소리 정도, 내 눈 앞의 일이 아니니 모르는 체 하면서 살아야지 하는 정도가 아니었을까. 이 책의 어떤 부분은, 읽는다는 것 자체가 내 눈 앞에서 마치 폭탄이 터지고 살이 찢기는 걸 보는 것만큼이나 끔찍한 일이었기도 하다. 인도가 그랬다.   

전쟁, 가난, 계급 구조 등으로 하여 어느 나라나 어두운 그늘을 품고 있다. 딱히 아시아만의 이야기는 아닌 것이다. 아시아도 나뉜다. 동아시아, 남아시아, 서아시아, 중동, 유라시아 등등, 아시아를 지칭하는 단어는 얼마나 다양하고 다른 느낌을 주는가 말이다.  하지만, 유독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아시아 국가들은 어떤 공통점이 내포되어 있는 것같다. 대부분의 나라들이 식민지였고, 제국과의 전쟁을 경험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건, 내부의 요인 말고 분명히 어떤 외부적인 요인이 작용했다는 것, 그걸 지켜보는데 한숨이 나왔다. 우린들, 그런 상황에서 자유로우랴. 

이 책의 지은이는 일본인이다. 일본인은 위의 여러 아시아 나라들과는 사실 정반대의 역사를 갖고 있는 나라이니, 그들에게는 이런 뒷골목 아시아(혹은 아시아의 뒷골목)가 대체 무엇이었을까? 다 읽을 때까지 그 생각이 지워지질 않았다. 지은이는 썩 친절하게 연유를 설명하는 것도 아니다. 대체로 지은이는 아주 솔직하게 자신을 노출시키지만, 그런 순간은 기대하지 않고 있을 때 갑작스럽게 왔다가 다시 사라진다. 이 책이 탄생된 전후 사정에 대해서는 다소 필연적인 계기 같은 게 있어야 마땅할 것 같은데, 그런 특별한 것, 없다. 그래서 다 보고 난 뒤에도 지은이의 행로는 여전히 약간은 오리무중이다. 어디서 나타난 건지도, 다음에는 어디로 튈 지도 알 수 없다. 존재 자체가 다소 신기하다.  

지은이는 자주, 이 아시아 나라들의 빈민- 거지- 장애인 들에 대해 연민을 내비치지만,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있으니 실은 조사 이상은 나아가지 않는다, 라고 고백하면서 한계를 인정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런 객관적인 불행 속에 깃들어있는 평온함, 혹은 주관적인 평화 -실은 평화, 평온함이란 주관적인 것 아닐까- 에 주목하기도 한다. 자기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을 이해하려 애쓰며 그는 다닌다. 미얀마 중부의 타웅지 부근, '거룩한 아기 예수의 집'에서 만난 봉사자 도미니코의 맑은 행동을 보면서 그는 '매일같이 침대에서 누워 지내야만 하는 장애인은 혼자서는 웃고 싶어도 웃을 수조차 없다. 그럴 때 단 한 마디라도 누군가가 농담을 던져주면 그들은 미소를 지으며 명랑한 기분을 되찾는다. 만약 하루에 한 번씩이라도 그런 일이 생긴다면 얼마나 큰 도움이 될까.' 이런 생각을 한다. 그런 생각은 이 책을 보고 있는 내게도 전파된다.

마찬가지로, 이 책 또한 내가 여태껏 읽은 책들 중에서 정말 생경스런, 특이한 소재를 다룬 책이다. 뭉뚱그려 아시아라고는 하지만 일본 중국 한국은 분명히 처지가 다르다. 세 나라에서는 거지, 특히나 장애인 거지가 특별한 그룹을 이루며 하나의 커다란 사회 현상을 일으키고 있는 정도는 아니다. 당연히 그런 문제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말이다. 물론 국가의 경제력하고도 깊은 상관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책을 읽다 보면 꼭 경제력 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오랜 세월 살아온 방식과도 상관이 있고, 그건 종교나 기후, 이런 것과도 맞물려있는 것이다. 베트남,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또 미얀마, 스리랑카, 네팔, 인도를 지은이는 돌아다닌다. 작금 우리가 익숙해졌듯 유명 관광지를 다니는 것이 아니라,  여행자라면 어찌하든 피하고 싶은 뒷골목, 빈민가, 마피아의 본거지, 첩첩 산골 외딴 마을의 장애인 시설, 이런 곳으로 다닌다. 그건 사실,역자인 노희운씨의 말마따나 아시아가 감추고 있는 또 하나의 세상인 거다. 이런 데 관심 있는 일본인 작가가 있었고, 넘치는 여행 정보 책들 사이에 이런 책이 있었다는 게 놀라웠다.  

좀더 생각해보면, <나의 슬픈 아시안>이라는 표제를 달고 나온 이 책이 내게 주는 생경스런 느낌은 한국어판 제목에 따른 것이 아닐까 싶다. 원제는 <구걸하는 부처>, 지은이는 선진국 일본이 아니라 아직은 경제적으로 어려워 미약한 나라들을 다니며 사회-국가적 복지의 혜택은 꿈도 꾸지 못하는 사람들을 찾아 다닌다. 그들이 어떻게 해서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으며, 현재 그들은 자신의 처지를 어떻게 여기고 있으며, 그들에게는 어떤 희망이 있는가, 이런 것들을 묻고 답을 들으며 다닌다. 그러니 그걸 알게 된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한다는 주장도 없지만, 프롤로그 중에서 '그것을 부유한 나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고 밝힌다. 기록자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싶었다는 것일까.  

어쨌든, <구걸하는 부처>라고 하면 이 책의 생경스러움은 상당히 사라진다. 그의 여행지는 아시아 몇몇 나라였고 거기에는 상당한 공통점이 있었으니 이렇게 묶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분명 딱히 아시아에만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니며, 제목 또한 가뿐히 아시아를 넘어서고 있다. 가난과 질병과 장애로 인해 스스로 원치않는 삶을 살고 있는 약자들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거니까. 험난한 생 자체가 어떤 이유로든 불성의 존재를 오히려 두드러지게 하기도 하는 것이니까. 하지만 <나의 슬픈 아시안>이라고 하면, 상당히 느낌이 달라진다. 지은이가 속한 아시아, 한국인 독자가 속한 아시아, 또 책의 무대인 아시아, 이런 이질적인 아시아가 어떤 끈으로 엮이면서 마치 '우리' 아시아라는 어떤 호소가 느껴지는 것이다. 이건 지은이의 의도일까? (한국어 번역판 제목이 지은이의 의사와 무관하게 만들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출판계의 사정도 고려되겠지만..) 책을 읽는 내내 느껴졌던 어떤 모호함이 원제를 보는 순간 걷히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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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워
배명훈 지음 / 오멜라스(웅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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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훈이 창조한 타워 빈스토크는, 예리하면서도 푸근하다. 여러 주변국에 둘러싸여 그들 주변국들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이질적인 존재지만, 내부에서는 또 삶이 일어나고 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주변국 사람들은 끊임없이 타워를 선망하고 들어가려 하지만, 또한  바벨탑이라고 부르며 경원시하기도 한다. 선망과 질시와 무시, 그것이 주변국 사람들의 시선이고, 그것과는 상관없이 타워 안의 사람들은 주변국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다. 그러나 그 안에서는 그래도 또 생명을 유지하는 혈관처럼, 따뜻함이 존재하기도 한다.

마치, 가깝게는 대한민국 안의 서울과도 같이. 타워 빈스토크는 거칠게 말하면 서울의 알레고리다. 가령, 이런 일이 일어난다. 책의 부록으로 붙은 흥미로운 <520층 연구> 서문 중에서 '카페 빈스토킹'에 관한 것이다. 

수직-수평의 큐빅 공간 안에서 520층은 수평의 공간이다. 거기에는 520층 주민 모두의 안식처인 '카페 빈스토킹'이 있다. 그곳은 조합원 모두의 사교 공간이자 여가 생활의 중심지였다. 맛없는 커피였지만 값이 쌌고, 아무리 오래 있어도 상관하는 사람도 없어 말할수 없이 편안했고, 가면 누구든 만나 한담을 나눌 수 있는 아날로그적인 공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세련된 커피 전문 체인점 '퀸즈 테라스'가 519, 520, 521층에 세 개나 동시에 들어선다. 커피는 맛있고 비쌌지만 특별 이벤트 기간에는 빈스토킹의 맛없는 커피에 비해 반값이었다. 특별 이벤트 기간은 무려 6개월.. 520층 주민들은 퀸즈 테라스에 열광한다. 왜 6개월 동안이나 출혈 경쟁을 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알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원두는 깊고 진한 맛을 냈고, 종류도 다양했다. 아가씨들이 먼저 빈스토킹을 떠났고, 곧 젊은 남자들이 떠났다. 그곳에는 머무를 공간이 없는 테이크아웃 점포였기 때문에 그들은 퀸즈 테라스의 맛있는 커피를 사들고 '각자의 공간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주고받던 한담과 입소문 대신 매스미디어의 맛에 길들여졌다. 카페 빈스토킹은 결국 문을 닫았고, 520층의 사람들은 더이상 한담의 공간을 갖지 못했다... 그들은 이제 520층 사람들이 아니라 빈스토크 사람이 되었다. 

그해 선거에서 520층에서는 사상 최초로 '수직주의' 후보가 '수평주의'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그러나 그 일의 의미를 깨닫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그들이 깨달음을 얻기까지 1년이 걸렸다. 카페 빈스토킹이 사라지면서 520층 사람들의 삶 또한 각박해졌고, 그들은 서로의 개인사에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았다. 면대면 네트워크가 영향력을 상실하면서 매스미디어가 그 자리를 대신한 것, 그것이 520층을 각박한 곳으로 변화시킨 원인이었다, 
 

고 보고서는 이야기하고 있다.
 
따로 떼어놓고 보면, 너무나 익숙한 이야기. 어느 샌가 골목길 만남에서 안방의 TV 앞으로 변해버린 우리 삶의 모습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변해버린 삶의 방식이 아닌가. 그 익숙한 이야기를, 배명훈은 생경한 것으로 돌아보게 만든다. 그 낯섬 앞에서 우리의 삶은 다시 돌아보인다. 그럴 때 삶은 숨었던 자신의 모습을 오롯하게 보여준다. 익숙해서 잊고 있는 것들, 편하다고 받아들여버린 것들, 달라졌다는 것조차 잊어버린 사실들... 마치 어느 날 사막에서 문득 발견한 노란 보름달의 아름다움이 평소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듯, 문득 거울에서 발견한 회색의 귀밑머리가 그전까지는 검은머리이기라도 했다는 듯, 그저 느끼지 않았을 뿐이지 없었던 적이 없는 일들을 살려낸다. 그렇게 낯설게 바라보는 것은 대체로 날카롭게 꽂힌다. 이 책의 이야기들은, 그런 날카로움으로 생살을 스쳐서 나에게 각인시킨다. 흥미롭다.  

몇 편의 창조적인 이야기들은 재미있다.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사실들을 패러디하면서 펼치는 이야기보따리들은 숨은 이면과 드러나는 표면이 아구가 맞아 떨어지면서 순수한 즐거움을 준다. '타클라마칸 배달 사고'는 감동적이었다. 그런 감동적인 이야기를, 작가가 들뜨지 않고 덤덤하게 무덤덤하게-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으니 더 감동적이었다. 정말, 가능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 위성사진을 구해서 그 사람을 찾고 있어요. 비행기가 격추당한 잔해를요. 그 사람은 사막에 혼자 버려져 있고, 저는 그 사람을 찾아 사막을 혼자 헤매요. 그 사람은 대단히 위독한 상태일 수도 있고, 이미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어요. 오늘이 지나면 그럴 가능성이 더 높아진대요. 모래사막에 바람이 불면 잔해가 묻혀버릴 수도 있대요. 

이 주소로 들어가셔서 저를 도와주세요. 사진에 구역을 나눠놨어요. 제가 이미 확인한 칸은 푸른색으로 표시가 돼요. 확인 중인 칸은 녹색일 거예요. 아무 표시도 없는 칸을 골라서 비행기 잔해를 찾아주세요.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만, 한두 칸만이라도, 딱 한 칸만이라도." 

빈스토크의 자발적 우편배달 시스템인 파란 우체통을 통해 메일을 받은 사람은 또 메일을 써서 파란 우체통에 넣고, 이어 스스로 한 구역이라도 찾기 시작한다. 처음에 그저 모래사막이었던 그 지도는, 몇 시간 후에는 접속자가 27,470 명이 되고 또 한 시간 뒤에는 40,000 명이 되고, 이어 동틀 무렵에는 이미 22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 사막 색깔의 지도를 파랗게 변하게 만든다. 한 번의 확인 작업에도 실종당한 민소를 찾을 수 없자 다른 누군가가 새로운 방식, 확인을 많이 할수록 그 구역의 색깔이 점점 짙어지는 방식의 웹사이트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곧 접속자는 34만 명, 뒤이어 50만 명... 지도는 순식간에  마치 타클라마칸 사막 전체가 서서히 하늘로 들려 올라가듯 짙은 파란 색으로 변한다. 그리고 마침내, 빨간 점 하나. 민소를 찾았다. 접속자는 2,774,867 명.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죽음을 기다리던 민소는, 정신을 잃던 중에 누군가가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을 느낀다... 영혼을 가득 채우는 뜨거운 시선.  

마치 컴퓨터로 구글 지도에 들어가듯, 점점 더 점점 더 크게 확대해 들어가 마침내 내집 지붕을 보고 거기 마당에서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의 형체를 내려다보듯 하다.  내 모니터 안에 갇혀있는 그 형체는 시선을 느낀다. 컴퓨터로 지도 찾기를 할 때마다 느껴지던 전지적인 시점의 기분이 너무나 생생하게 느껴져서 기시감마저 든다. 배명훈은, 아마도 수없이 지도찾기로 독수리의 시점을 느껴보았을 그는(순전히 내 추측이지만), 거기서 이런 이야기를 상상해낸다. 그가 뽑아낸 이야기는 멋지다. 게다가 인터넷 공간에서 촛불의 순식간적인 힘을 느껴본 우리에게 이 이야기는 절대 가상으로만 느껴지지 않는다. 촛불의 감동과 구글 어쓰의 신비감을 아울러 빚어낸 이야기. 그것이 674층 마천루 빈스토크에서 일어나면? 차가운 외피 안에 반짝이는 따뜻한 노란 별빛같이 느껴진다. 희망이, 아직 손끝에 걸려있는 것이다. 

밖에서 보기에 바벨탑이기만 한 타워도, 그 안에 정작 갖고 있는 것은 무모함 만이 아니고 예견되는 미래는 곤두박질 뿐만은 아닐 것이라고 작가는 이야기하는 걸까. '엘리베이터 기동 연습'도 희망이고 '자연 예찬'도 '샤리아에 부합하는'도 타워 안에 깃든 노란 별빛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역시 그 빛은 거대한 타워의 어둠 속에서 그저 노랗게 깜빡일 뿐. 독자인 나는 어둠에 싸인 타워를 위에서, 옆에서 앞에서 바라다본다. 그 속에 꼬물거리는 내가 있다. 

기발하고 유쾌하며 날카롭다. 곁에 두면 사람을 긴장하게 만들 책이다. 그런데 기꺼이 긴장하고 싶게 만드는, 멋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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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저드 베이커리 - 제2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16
구병모 지음 / 창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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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대적인 광고 탓인지, 지난 창비 청소년문학 수상작이었던 <완득이>의 여파였는지, 기대를 했는데 구성도 그렇고 캐릭터도 그렇고, 기대만큼은 아니었다. 

제일 거북했던 건 구박하는 계모와, 의붓딸을 성폭행하는 아버지라는 설정이었다. 어째서 지금, 새어머니는 남편의 아들을 이렇게나 말도 안되게 구박하는가. 그 아들은 그저, 살갑지 않을 따름이다. 요즘 세상에 이혼하거나 사별한 두 남녀가 각자 자신의 아이들을 데리고 함께 살기로 작정하고 결합하는 것이 그리 엽기적인 일이어야 하는가? 마치 백설공주나 신데렐라의 계모를 연상시키듯 사악한 새어머니의 존재, 공감이 가지 않고 생뚱맞다. 게다가 못된 새어머니를 어쩔 수 없이 맞게 되어 무기력하게 희생만 당하는 아이는, 다소 어처구니없이 고등학생이다. 물론, 나름의 상처를 갖고 있고 물론, 가능하겠지만, 꼭 그런 설정이어야 하는 걸까?  

더 억지스러운 것은 그렇게 몰아간 상황을 수습하려고 내놓은 마지막 반전이다. 어이없게도 알고보니 새 동생 무희를 오랫동안 성폭행 한 사람은 바로 아버지. 여덟 살의 무희는 자신을 성폭행한 사람으로 처음에는 학원 선생을 지목해서 법정까지 가게 되었는데, 그다음에는 서로 거의 상관조차 없이 살아가던 새 오빠를 지목해서 조용한 그 오빠로 하여금 집을 뛰쳐나가게 만든다. 그런데 막판에 알고 보니 나쁜 짓을 일삼고도 의심 한 번 받지 않은 사람은 바로 곁의 아버지. 어째서? 독자인 나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그것도 아주 불쾌하게 재수없이. 아버지가 성폭행범일 수도 있다는 사실은 거의 사전 포석이 없었다. 그저 무희의 엄마가 학원장에게 악의에 찬 독설을 퍼붓고 있을 때 이렇게 말했던 게 포석이라면 포석이랄까. 

"그러게 내가 진작 뭐라고 했어. 그런 불편한 일 겪을 거 다 알고도 당신이 선택한 거 아냐. 이제라도 그만두고 학원 옮기는 걸로 끝내. 합의금이고 뭐고 더러워서 그딴 건 안 받는다고 학원장 얼굴에 던져주고." 

이게, 그렇게 사건을 유야무야 덮으려 했다는 것이 아버지 자신이 범인이었으니까 조용히 넘어가려고 했다는 상황 설정이라는 걸까. 이런 말을 했기 때문에 아버지는 여덟 살 의붓딸을, 시퍼런 부인과 소심하고 유약한 아들 몰래 성폭행할 수도 있다는 개연성이라도 부여되는 것일까. 나는 작가가 너무나 안일하다고 생각된다. 아버지는 너무나 밋밋한 존재로 그려졌을 뿐이다. 그의 특이한 성정체성- 소아성애자인가?-은 어디서 연유되었는지, 그가 가정 혹은 사회에서 겪은 심각한 정신적 갈등이 어떻게 그의 성정체성과 연관이 되는지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가 난데없이 반전의 다크호스로 등장한다. 우롱당한 기분이었다. 뭐랄까, 이 소설이 부조리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거라면 유별스레 이런 리뷰 쓰고 있지도 않을 거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면, 그래도 개연성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불가능한 상황은 아니다. 지금 이 시대에, 아들이 있는 남자와 딸이 있던 여자가 서로 결합해서 새로운 가정을 만들었는데 하필 그게 잘 안 되려하니 새어머니는 남편의 전처의 아들을 엄청나게 구박하고, 새아버지는 부인의 전남편의 어린 딸을 성폭행하는 일그러진 결합이었다...는 것도. 그런데, 이 소설이 그런 재혼 가정이 가질 수도 있는 문제점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 것인지? 아무래도 이런 위험성이 존재하니까 ... 그리 알라고? 물론 아니겠지만, 결과적으로 진부하게도 그리 되어버린다. 넘어야 할 산이 얼마나 많은 새로운 결합 앞에다가 작가는 편안하게 예전의 콤플렉스를 끌어와서 그 산 앞에다가 바위를 턱 갖다 놓는가 말이다. 구태의연하고 보수적이다. 시대의 첨병에 선 작가가 그런 걸 무시할 수는 있어도, 몰랐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위저드 베이커리의 존재도 모호하다. 마법사와 파랑새도 그저 그렇다. 내게 상상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새로운 아이디어 몇 개로 끌어가기에는 위저드 베이커리는 그저 그렇게 보였다. 확실히 '악마의 시나몬 쿠키'라든가, '브로큰 하트 파인애플 마들렌' 이라든가, 참신하고 매력 넘치는 소재이긴 하다. 그러나 그런 소재들이 아무리 참신해도 그런 것들은 그저  새로운 소재에 불과하게 느껴졌다. 탄탄한 이야기 구조 속에서 그런 소재들은 힘을 얻어 빛을 발하는 법인데, 그들은 그저 맥없이 등장했다가 희미하게 사라져가는 소품들에 불과했다.   

(이것저것 불만을 토로하게 되었지만, 사실 광고 문구가 너무 현란했던 탓도 크겠다. 읽고보니 광고에서 본 것 말고 별로 더 새로울 것도 없었다는 게 마치 손해본 듯 느껴졌던가?)   

작품 안에서 자주 굵은 글씨체로 작가는 강조한다. "나는 단지 거기 존재했을 뿐인데."  "나는 단지 이 자리에 있었을 뿐인데." 그저 우연히 거기 있었다는 것으로 너무 큰 것들이 결정되는 것에 대한 대책없음과 허망함을 지은이는 아프게 느꼈던가? 작가의 말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저 선택에 관한 이야기다. 틀릴 확률이 어쩌면 더 많은, 때로는 어이없는 주사위 놀음에 지배받기도 하는, 그래도 그 결과는 온전히 자신의 몫이다." 

"상처가 나면 난 대로, 돌아갈 곳이 없으면 없는대로, 사이가 틀어지면 틀어진 대로, 그렇게 흘러가는 삶을, 단지 견디며 살아가는 사람이 실은 더 많을 터다. 그러다 보니 귀향이나 회복, 치유와 화해를 넘어 미래에의 전망에 이르는 성장의 문법을 무의식적으로 배제했다." 

그런, 삶의 다소 폭력적인 우연성에도 불구하고 그저 살아가는 일의 엄정함에 대한 언급인가? 하여간, 청소년을 위한 것이라기에는 성급해서 위험하고 어른을 위한 것이라기에는 세부나 구성이 너무 안일해서 뭔가 많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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