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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워
배명훈 지음 / 오멜라스(웅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배명훈이 창조한 타워 빈스토크는, 예리하면서도 푸근하다. 여러 주변국에 둘러싸여 그들 주변국들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이질적인 존재지만, 내부에서는 또 삶이 일어나고 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주변국 사람들은 끊임없이 타워를 선망하고 들어가려 하지만, 또한 바벨탑이라고 부르며 경원시하기도 한다. 선망과 질시와 무시, 그것이 주변국 사람들의 시선이고, 그것과는 상관없이 타워 안의 사람들은 주변국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다. 그러나 그 안에서는 그래도 또 생명을 유지하는 혈관처럼, 따뜻함이 존재하기도 한다.
마치, 가깝게는 대한민국 안의 서울과도 같이. 타워 빈스토크는 거칠게 말하면 서울의 알레고리다. 가령, 이런 일이 일어난다. 책의 부록으로 붙은 흥미로운 <520층 연구> 서문 중에서 '카페 빈스토킹'에 관한 것이다.
수직-수평의 큐빅 공간 안에서 520층은 수평의 공간이다. 거기에는 520층 주민 모두의 안식처인 '카페 빈스토킹'이 있다. 그곳은 조합원 모두의 사교 공간이자 여가 생활의 중심지였다. 맛없는 커피였지만 값이 쌌고, 아무리 오래 있어도 상관하는 사람도 없어 말할수 없이 편안했고, 가면 누구든 만나 한담을 나눌 수 있는 아날로그적인 공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세련된 커피 전문 체인점 '퀸즈 테라스'가 519, 520, 521층에 세 개나 동시에 들어선다. 커피는 맛있고 비쌌지만 특별 이벤트 기간에는 빈스토킹의 맛없는 커피에 비해 반값이었다. 특별 이벤트 기간은 무려 6개월.. 520층 주민들은 퀸즈 테라스에 열광한다. 왜 6개월 동안이나 출혈 경쟁을 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알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원두는 깊고 진한 맛을 냈고, 종류도 다양했다. 아가씨들이 먼저 빈스토킹을 떠났고, 곧 젊은 남자들이 떠났다. 그곳에는 머무를 공간이 없는 테이크아웃 점포였기 때문에 그들은 퀸즈 테라스의 맛있는 커피를 사들고 '각자의 공간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주고받던 한담과 입소문 대신 매스미디어의 맛에 길들여졌다. 카페 빈스토킹은 결국 문을 닫았고, 520층의 사람들은 더이상 한담의 공간을 갖지 못했다... 그들은 이제 520층 사람들이 아니라 빈스토크 사람이 되었다.
그해 선거에서 520층에서는 사상 최초로 '수직주의' 후보가 '수평주의'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그러나 그 일의 의미를 깨닫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그들이 깨달음을 얻기까지 1년이 걸렸다. 카페 빈스토킹이 사라지면서 520층 사람들의 삶 또한 각박해졌고, 그들은 서로의 개인사에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았다. 면대면 네트워크가 영향력을 상실하면서 매스미디어가 그 자리를 대신한 것, 그것이 520층을 각박한 곳으로 변화시킨 원인이었다,
고 보고서는 이야기하고 있다.
따로 떼어놓고 보면, 너무나 익숙한 이야기. 어느 샌가 골목길 만남에서 안방의 TV 앞으로 변해버린 우리 삶의 모습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변해버린 삶의 방식이 아닌가. 그 익숙한 이야기를, 배명훈은 생경한 것으로 돌아보게 만든다. 그 낯섬 앞에서 우리의 삶은 다시 돌아보인다. 그럴 때 삶은 숨었던 자신의 모습을 오롯하게 보여준다. 익숙해서 잊고 있는 것들, 편하다고 받아들여버린 것들, 달라졌다는 것조차 잊어버린 사실들... 마치 어느 날 사막에서 문득 발견한 노란 보름달의 아름다움이 평소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듯, 문득 거울에서 발견한 회색의 귀밑머리가 그전까지는 검은머리이기라도 했다는 듯, 그저 느끼지 않았을 뿐이지 없었던 적이 없는 일들을 살려낸다. 그렇게 낯설게 바라보는 것은 대체로 날카롭게 꽂힌다. 이 책의 이야기들은, 그런 날카로움으로 생살을 스쳐서 나에게 각인시킨다. 흥미롭다.
몇 편의 창조적인 이야기들은 재미있다.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사실들을 패러디하면서 펼치는 이야기보따리들은 숨은 이면과 드러나는 표면이 아구가 맞아 떨어지면서 순수한 즐거움을 준다. '타클라마칸 배달 사고'는 감동적이었다. 그런 감동적인 이야기를, 작가가 들뜨지 않고 덤덤하게 무덤덤하게-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으니 더 감동적이었다. 정말, 가능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 위성사진을 구해서 그 사람을 찾고 있어요. 비행기가 격추당한 잔해를요. 그 사람은 사막에 혼자 버려져 있고, 저는 그 사람을 찾아 사막을 혼자 헤매요. 그 사람은 대단히 위독한 상태일 수도 있고, 이미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어요. 오늘이 지나면 그럴 가능성이 더 높아진대요. 모래사막에 바람이 불면 잔해가 묻혀버릴 수도 있대요.
이 주소로 들어가셔서 저를 도와주세요. 사진에 구역을 나눠놨어요. 제가 이미 확인한 칸은 푸른색으로 표시가 돼요. 확인 중인 칸은 녹색일 거예요. 아무 표시도 없는 칸을 골라서 비행기 잔해를 찾아주세요.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만, 한두 칸만이라도, 딱 한 칸만이라도."
빈스토크의 자발적 우편배달 시스템인 파란 우체통을 통해 메일을 받은 사람은 또 메일을 써서 파란 우체통에 넣고, 이어 스스로 한 구역이라도 찾기 시작한다. 처음에 그저 모래사막이었던 그 지도는, 몇 시간 후에는 접속자가 27,470 명이 되고 또 한 시간 뒤에는 40,000 명이 되고, 이어 동틀 무렵에는 이미 22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 사막 색깔의 지도를 파랗게 변하게 만든다. 한 번의 확인 작업에도 실종당한 민소를 찾을 수 없자 다른 누군가가 새로운 방식, 확인을 많이 할수록 그 구역의 색깔이 점점 짙어지는 방식의 웹사이트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곧 접속자는 34만 명, 뒤이어 50만 명... 지도는 순식간에 마치 타클라마칸 사막 전체가 서서히 하늘로 들려 올라가듯 짙은 파란 색으로 변한다. 그리고 마침내, 빨간 점 하나. 민소를 찾았다. 접속자는 2,774,867 명.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죽음을 기다리던 민소는, 정신을 잃던 중에 누군가가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을 느낀다... 영혼을 가득 채우는 뜨거운 시선.
마치 컴퓨터로 구글 지도에 들어가듯, 점점 더 점점 더 크게 확대해 들어가 마침내 내집 지붕을 보고 거기 마당에서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의 형체를 내려다보듯 하다. 내 모니터 안에 갇혀있는 그 형체는 시선을 느낀다. 컴퓨터로 지도 찾기를 할 때마다 느껴지던 전지적인 시점의 기분이 너무나 생생하게 느껴져서 기시감마저 든다. 배명훈은, 아마도 수없이 지도찾기로 독수리의 시점을 느껴보았을 그는(순전히 내 추측이지만), 거기서 이런 이야기를 상상해낸다. 그가 뽑아낸 이야기는 멋지다. 게다가 인터넷 공간에서 촛불의 순식간적인 힘을 느껴본 우리에게 이 이야기는 절대 가상으로만 느껴지지 않는다. 촛불의 감동과 구글 어쓰의 신비감을 아울러 빚어낸 이야기. 그것이 674층 마천루 빈스토크에서 일어나면? 차가운 외피 안에 반짝이는 따뜻한 노란 별빛같이 느껴진다. 희망이, 아직 손끝에 걸려있는 것이다.
밖에서 보기에 바벨탑이기만 한 타워도, 그 안에 정작 갖고 있는 것은 무모함 만이 아니고 예견되는 미래는 곤두박질 뿐만은 아닐 것이라고 작가는 이야기하는 걸까. '엘리베이터 기동 연습'도 희망이고 '자연 예찬'도 '샤리아에 부합하는'도 타워 안에 깃든 노란 별빛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역시 그 빛은 거대한 타워의 어둠 속에서 그저 노랗게 깜빡일 뿐. 독자인 나는 어둠에 싸인 타워를 위에서, 옆에서 앞에서 바라다본다. 그 속에 꼬물거리는 내가 있다.
기발하고 유쾌하며 날카롭다. 곁에 두면 사람을 긴장하게 만들 책이다. 그런데 기꺼이 긴장하고 싶게 만드는, 멋진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