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저드 베이커리 - 제2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16
구병모 지음 / 창비 / 200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대대적인 광고 탓인지, 지난 창비 청소년문학 수상작이었던 <완득이>의 여파였는지, 기대를 했는데 구성도 그렇고 캐릭터도 그렇고, 기대만큼은 아니었다. 

제일 거북했던 건 구박하는 계모와, 의붓딸을 성폭행하는 아버지라는 설정이었다. 어째서 지금, 새어머니는 남편의 아들을 이렇게나 말도 안되게 구박하는가. 그 아들은 그저, 살갑지 않을 따름이다. 요즘 세상에 이혼하거나 사별한 두 남녀가 각자 자신의 아이들을 데리고 함께 살기로 작정하고 결합하는 것이 그리 엽기적인 일이어야 하는가? 마치 백설공주나 신데렐라의 계모를 연상시키듯 사악한 새어머니의 존재, 공감이 가지 않고 생뚱맞다. 게다가 못된 새어머니를 어쩔 수 없이 맞게 되어 무기력하게 희생만 당하는 아이는, 다소 어처구니없이 고등학생이다. 물론, 나름의 상처를 갖고 있고 물론, 가능하겠지만, 꼭 그런 설정이어야 하는 걸까?  

더 억지스러운 것은 그렇게 몰아간 상황을 수습하려고 내놓은 마지막 반전이다. 어이없게도 알고보니 새 동생 무희를 오랫동안 성폭행 한 사람은 바로 아버지. 여덟 살의 무희는 자신을 성폭행한 사람으로 처음에는 학원 선생을 지목해서 법정까지 가게 되었는데, 그다음에는 서로 거의 상관조차 없이 살아가던 새 오빠를 지목해서 조용한 그 오빠로 하여금 집을 뛰쳐나가게 만든다. 그런데 막판에 알고 보니 나쁜 짓을 일삼고도 의심 한 번 받지 않은 사람은 바로 곁의 아버지. 어째서? 독자인 나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그것도 아주 불쾌하게 재수없이. 아버지가 성폭행범일 수도 있다는 사실은 거의 사전 포석이 없었다. 그저 무희의 엄마가 학원장에게 악의에 찬 독설을 퍼붓고 있을 때 이렇게 말했던 게 포석이라면 포석이랄까. 

"그러게 내가 진작 뭐라고 했어. 그런 불편한 일 겪을 거 다 알고도 당신이 선택한 거 아냐. 이제라도 그만두고 학원 옮기는 걸로 끝내. 합의금이고 뭐고 더러워서 그딴 건 안 받는다고 학원장 얼굴에 던져주고." 

이게, 그렇게 사건을 유야무야 덮으려 했다는 것이 아버지 자신이 범인이었으니까 조용히 넘어가려고 했다는 상황 설정이라는 걸까. 이런 말을 했기 때문에 아버지는 여덟 살 의붓딸을, 시퍼런 부인과 소심하고 유약한 아들 몰래 성폭행할 수도 있다는 개연성이라도 부여되는 것일까. 나는 작가가 너무나 안일하다고 생각된다. 아버지는 너무나 밋밋한 존재로 그려졌을 뿐이다. 그의 특이한 성정체성- 소아성애자인가?-은 어디서 연유되었는지, 그가 가정 혹은 사회에서 겪은 심각한 정신적 갈등이 어떻게 그의 성정체성과 연관이 되는지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가 난데없이 반전의 다크호스로 등장한다. 우롱당한 기분이었다. 뭐랄까, 이 소설이 부조리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거라면 유별스레 이런 리뷰 쓰고 있지도 않을 거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면, 그래도 개연성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불가능한 상황은 아니다. 지금 이 시대에, 아들이 있는 남자와 딸이 있던 여자가 서로 결합해서 새로운 가정을 만들었는데 하필 그게 잘 안 되려하니 새어머니는 남편의 전처의 아들을 엄청나게 구박하고, 새아버지는 부인의 전남편의 어린 딸을 성폭행하는 일그러진 결합이었다...는 것도. 그런데, 이 소설이 그런 재혼 가정이 가질 수도 있는 문제점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 것인지? 아무래도 이런 위험성이 존재하니까 ... 그리 알라고? 물론 아니겠지만, 결과적으로 진부하게도 그리 되어버린다. 넘어야 할 산이 얼마나 많은 새로운 결합 앞에다가 작가는 편안하게 예전의 콤플렉스를 끌어와서 그 산 앞에다가 바위를 턱 갖다 놓는가 말이다. 구태의연하고 보수적이다. 시대의 첨병에 선 작가가 그런 걸 무시할 수는 있어도, 몰랐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위저드 베이커리의 존재도 모호하다. 마법사와 파랑새도 그저 그렇다. 내게 상상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새로운 아이디어 몇 개로 끌어가기에는 위저드 베이커리는 그저 그렇게 보였다. 확실히 '악마의 시나몬 쿠키'라든가, '브로큰 하트 파인애플 마들렌' 이라든가, 참신하고 매력 넘치는 소재이긴 하다. 그러나 그런 소재들이 아무리 참신해도 그런 것들은 그저  새로운 소재에 불과하게 느껴졌다. 탄탄한 이야기 구조 속에서 그런 소재들은 힘을 얻어 빛을 발하는 법인데, 그들은 그저 맥없이 등장했다가 희미하게 사라져가는 소품들에 불과했다.   

(이것저것 불만을 토로하게 되었지만, 사실 광고 문구가 너무 현란했던 탓도 크겠다. 읽고보니 광고에서 본 것 말고 별로 더 새로울 것도 없었다는 게 마치 손해본 듯 느껴졌던가?)   

작품 안에서 자주 굵은 글씨체로 작가는 강조한다. "나는 단지 거기 존재했을 뿐인데."  "나는 단지 이 자리에 있었을 뿐인데." 그저 우연히 거기 있었다는 것으로 너무 큰 것들이 결정되는 것에 대한 대책없음과 허망함을 지은이는 아프게 느꼈던가? 작가의 말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저 선택에 관한 이야기다. 틀릴 확률이 어쩌면 더 많은, 때로는 어이없는 주사위 놀음에 지배받기도 하는, 그래도 그 결과는 온전히 자신의 몫이다." 

"상처가 나면 난 대로, 돌아갈 곳이 없으면 없는대로, 사이가 틀어지면 틀어진 대로, 그렇게 흘러가는 삶을, 단지 견디며 살아가는 사람이 실은 더 많을 터다. 그러다 보니 귀향이나 회복, 치유와 화해를 넘어 미래에의 전망에 이르는 성장의 문법을 무의식적으로 배제했다." 

그런, 삶의 다소 폭력적인 우연성에도 불구하고 그저 살아가는 일의 엄정함에 대한 언급인가? 하여간, 청소년을 위한 것이라기에는 성급해서 위험하고 어른을 위한 것이라기에는 세부나 구성이 너무 안일해서 뭔가 많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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