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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슬픈 아시안
이시이 코타 지음, 노희운 옮김 / 도솔 / 2006년 4월
평점 :
절판
아- 이렇게까지..
지은이를 따라 아시아 여덟 나라의 어두운 이면을 다니다가 마지막 다다른 인도에서는 정말 아찔했다. 도저히 책을 계속 읽어나갈 수가 없었다. 더욱 대책없는 사실은 이 책의 내용은 픽션이 아니라 고스란히 현실이라는 것,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실은, 지구상 어디서나 일어나고 있는 그 숱한 어이없는 끔찍한 일들 중 하나일 뿐이고, 우리 중 누구도 그런 무서운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 투명 에머랄드빛 아름다운 지구같은 건 그저 이상의 개념일 뿐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정도의 어둠, 저 산 너머의 아득한 폭발 소리 정도, 내 눈 앞의 일이 아니니 모르는 체 하면서 살아야지 하는 정도가 아니었을까. 이 책의 어떤 부분은, 읽는다는 것 자체가 내 눈 앞에서 마치 폭탄이 터지고 살이 찢기는 걸 보는 것만큼이나 끔찍한 일이었기도 하다. 인도가 그랬다.
전쟁, 가난, 계급 구조 등으로 하여 어느 나라나 어두운 그늘을 품고 있다. 딱히 아시아만의 이야기는 아닌 것이다. 아시아도 나뉜다. 동아시아, 남아시아, 서아시아, 중동, 유라시아 등등, 아시아를 지칭하는 단어는 얼마나 다양하고 다른 느낌을 주는가 말이다. 하지만, 유독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아시아 국가들은 어떤 공통점이 내포되어 있는 것같다. 대부분의 나라들이 식민지였고, 제국과의 전쟁을 경험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건, 내부의 요인 말고 분명히 어떤 외부적인 요인이 작용했다는 것, 그걸 지켜보는데 한숨이 나왔다. 우린들, 그런 상황에서 자유로우랴.
이 책의 지은이는 일본인이다. 일본인은 위의 여러 아시아 나라들과는 사실 정반대의 역사를 갖고 있는 나라이니, 그들에게는 이런 뒷골목 아시아(혹은 아시아의 뒷골목)가 대체 무엇이었을까? 다 읽을 때까지 그 생각이 지워지질 않았다. 지은이는 썩 친절하게 연유를 설명하는 것도 아니다. 대체로 지은이는 아주 솔직하게 자신을 노출시키지만, 그런 순간은 기대하지 않고 있을 때 갑작스럽게 왔다가 다시 사라진다. 이 책이 탄생된 전후 사정에 대해서는 다소 필연적인 계기 같은 게 있어야 마땅할 것 같은데, 그런 특별한 것, 없다. 그래서 다 보고 난 뒤에도 지은이의 행로는 여전히 약간은 오리무중이다. 어디서 나타난 건지도, 다음에는 어디로 튈 지도 알 수 없다. 존재 자체가 다소 신기하다.
지은이는 자주, 이 아시아 나라들의 빈민- 거지- 장애인 들에 대해 연민을 내비치지만,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있으니 실은 조사 이상은 나아가지 않는다, 라고 고백하면서 한계를 인정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런 객관적인 불행 속에 깃들어있는 평온함, 혹은 주관적인 평화 -실은 평화, 평온함이란 주관적인 것 아닐까- 에 주목하기도 한다. 자기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을 이해하려 애쓰며 그는 다닌다. 미얀마 중부의 타웅지 부근, '거룩한 아기 예수의 집'에서 만난 봉사자 도미니코의 맑은 행동을 보면서 그는 '매일같이 침대에서 누워 지내야만 하는 장애인은 혼자서는 웃고 싶어도 웃을 수조차 없다. 그럴 때 단 한 마디라도 누군가가 농담을 던져주면 그들은 미소를 지으며 명랑한 기분을 되찾는다. 만약 하루에 한 번씩이라도 그런 일이 생긴다면 얼마나 큰 도움이 될까.' 이런 생각을 한다. 그런 생각은 이 책을 보고 있는 내게도 전파된다.
마찬가지로, 이 책 또한 내가 여태껏 읽은 책들 중에서 정말 생경스런, 특이한 소재를 다룬 책이다. 뭉뚱그려 아시아라고는 하지만 일본 중국 한국은 분명히 처지가 다르다. 세 나라에서는 거지, 특히나 장애인 거지가 특별한 그룹을 이루며 하나의 커다란 사회 현상을 일으키고 있는 정도는 아니다. 당연히 그런 문제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말이다. 물론 국가의 경제력하고도 깊은 상관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책을 읽다 보면 꼭 경제력 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오랜 세월 살아온 방식과도 상관이 있고, 그건 종교나 기후, 이런 것과도 맞물려있는 것이다. 베트남,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또 미얀마, 스리랑카, 네팔, 인도를 지은이는 돌아다닌다. 작금 우리가 익숙해졌듯 유명 관광지를 다니는 것이 아니라, 여행자라면 어찌하든 피하고 싶은 뒷골목, 빈민가, 마피아의 본거지, 첩첩 산골 외딴 마을의 장애인 시설, 이런 곳으로 다닌다. 그건 사실,역자인 노희운씨의 말마따나 아시아가 감추고 있는 또 하나의 세상인 거다. 이런 데 관심 있는 일본인 작가가 있었고, 넘치는 여행 정보 책들 사이에 이런 책이 있었다는 게 놀라웠다.
좀더 생각해보면, <나의 슬픈 아시안>이라는 표제를 달고 나온 이 책이 내게 주는 생경스런 느낌은 한국어판 제목에 따른 것이 아닐까 싶다. 원제는 <구걸하는 부처>, 지은이는 선진국 일본이 아니라 아직은 경제적으로 어려워 미약한 나라들을 다니며 사회-국가적 복지의 혜택은 꿈도 꾸지 못하는 사람들을 찾아 다닌다. 그들이 어떻게 해서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으며, 현재 그들은 자신의 처지를 어떻게 여기고 있으며, 그들에게는 어떤 희망이 있는가, 이런 것들을 묻고 답을 들으며 다닌다. 그러니 그걸 알게 된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한다는 주장도 없지만, 프롤로그 중에서 '그것을 부유한 나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고 밝힌다. 기록자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싶었다는 것일까.
어쨌든, <구걸하는 부처>라고 하면 이 책의 생경스러움은 상당히 사라진다. 그의 여행지는 아시아 몇몇 나라였고 거기에는 상당한 공통점이 있었으니 이렇게 묶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분명 딱히 아시아에만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니며, 제목 또한 가뿐히 아시아를 넘어서고 있다. 가난과 질병과 장애로 인해 스스로 원치않는 삶을 살고 있는 약자들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거니까. 험난한 생 자체가 어떤 이유로든 불성의 존재를 오히려 두드러지게 하기도 하는 것이니까. 하지만 <나의 슬픈 아시안>이라고 하면, 상당히 느낌이 달라진다. 지은이가 속한 아시아, 한국인 독자가 속한 아시아, 또 책의 무대인 아시아, 이런 이질적인 아시아가 어떤 끈으로 엮이면서 마치 '우리' 아시아라는 어떤 호소가 느껴지는 것이다. 이건 지은이의 의도일까? (한국어 번역판 제목이 지은이의 의사와 무관하게 만들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출판계의 사정도 고려되겠지만..) 책을 읽는 내내 느껴졌던 어떤 모호함이 원제를 보는 순간 걷히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