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군화 잭 런던 걸작선 3
잭 런던 지음, 곽영미 옮김 / 궁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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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런던이 1908년에 통찰해버린 '강철군화', 언제 과거형으로 읽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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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
공지영 지음 / 황금나침반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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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야 했다구, 알아들었어?
물론 너나 나나 도대체 어디에 쓸모가 있었겠니?
그래도 살아야 할 걸 그랬다구.
뭣 때문이냐구? 아무것 때문에도 아니지
그냥 여기 있기 위해서라도
파도처럼 자갈돌처럼
파도와 함께 자갈돌과 함께
빛과 함께
모든 것과 다 함께

-「인생의 어떤 노래」앙드레 도텔

 

바로 이 시와 함께 작가는 두어 장 분량의 짧은 생각을 펼치고 이 책을 마무리한다. 그 짧은 생각 중에 이런 내용.    

 

이제 아이들의 엄마로서, 사회의 중년으로서 내 아이들뻘 되는 젊은이들에게 말해주고 싶어요. 괜찮다고, 그래도 괜찮다고, 어떻게든 살아 있으면 감정은 마치 절망처럼 우리를 속이던 시간들을 다시 걷어가고, 기어이 그러고야 만다고, 그러면 다시 눈부신 햇살이 비치기도 한다고, 그 후 다시 먹구름이 끼고, 소낙비 난데없이 쏟아지고 그러고는 결국 또 해 비친다고. 그러니 부디 소중한 생을, 이 우주를 다 준대도 대신해줄 수 없는 지금 이 시간을, 그 시간의 주인인 그대를 제발 죽이지는 말아달라고.

 

이 책 전체에서 그는 이와 같이 한 편의 시를 고르고 그 시와 함께 인생을 이야기한다. 대체로 그녀 자신의 인생에 연관된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펼쳐지는 자신의 삶은 날것 그대로 드러나지 않고 온갖 다른 삶의 모습들과 어우러져 종횡무진의 사유를 넘나든다. 때로는 소개된 바로 그 시인의 삶이기도 하고 때로 작가와 가까운 지인들의 삶, 때로 맹렬한 독서가로서의 작가에게 축적된 타인의 경험들이 그 사유를 이루는 질료들이다. 그것들이 작가 자신의 인생에 드리운 빛과 그늘을 공유한다. 빛과 그늘을 공유하면서 작가는 어느새 듬직해졌다.

 

이미 공지영 작가의 책 여러 권을 읽은 이래 그에게 여러 번의 큰 시련이 있었음을,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지나칠 만큼 예민한 감성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 반면 ‘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와 같은 생의 순간들도 허투루 놓치지 않는다는 것도. 그의 책을 읽는 권수가 늘어날수록 나는 그에게 점점 더 공감하게 된다. 무엇보다 그가 썩 훌륭한 작가이기 이전에 아주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 느끼게 되어서일 거다. 소설에 이어 <수도원 기행>이라든가, 이 책 <빗방울...>을 읽으면서도 그런 느낌이 더 깊어졌다. 그러니까 어쩌다보니, 어느새  공지영 작가의 팬이 되어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처음 보는 시들을 여럿 만났다. 체 게바라가 쓴 <나의 삶> 중의 짧은 발췌문은, 오래 전 읽었던 체 게바라 평전 전체의 느낌보다 더 강렬했다. 여러 편 등장하는 자끄 프레베르의 시편들은 시집 전체에서보다 이 책에서 더 빛나는 것처럼 느껴져서 잠깐 얼떨떨했다. 이 책이 아니었으면 만나기 어려웠을 압둘 와합 알바야티의 시들에도 마음이 머물렀다. 어느새 나는 지은이가 소개하는 시를 마치 나의 책장에서 즐겨 꺼내 읽듯 깊이 음미하고 있었다. 그렇게 향기롭게 책을 읽었다. 읽던 중에 서울 여행길에 나서게 되어 가방에 챙겨 갔더니, 기차에서도 아무 데나 펼쳐 읽었고 숙소에서도 보고 지하철에서 이십분 남짓 읽기도 했다. 여행 내내 비가 왔고, 차창을 긋는 빗줄기를 보며 그래서 나도 가끔은, ‘빗방울처럼 혼자다’ 고 생각했다. 
 

비교적 최근작인 <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를 읽을 때는 너무나 자주 유쾌했다. 신문의 목요섹션에 실릴 때는 한 주일을 기다렸다 먼저 읽곤 했는데 나중에 단행본으로 출판되어 그때의 유쾌함을 가끔 누리고 싶어 책을 샀다. 그의 이야기 중에는 어쩌면 희비극이고 어쩌면 블랙 코미디 같은 상황도 꽤 있었지만, 그래도 그런 상황조차도 유쾌했다. 마치 슬픔을 참으려 이를 꽉 깨물어도 스멀스멀 웃음이 피어나오고는 결국 그 슬픔이 펑 터지듯 날아가버리는 그런 상황 말이다. 하여간 그 책을 읽으며 이 작가의 멀쩡함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어쩐지 그 유쾌함 속에 치열함이 느껴지는 게 의아했다. 그게,

먼저 씌어진 책 두 권, <수도원 기행>과 <빗방울...>을 읽고 난 나중에야 <깃털>의 치열함이 쓱 이해가 되었다. <깃털>은 결코 앞서 써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는, 아직은 생의 슬픔을 이해하고 바라보아야 할 시간이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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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자전거 길을 만들다
박남정 글, 이형진 그림 / 소나무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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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여서 더욱 값진 이야기, 아이들이 울린 희망의 종소리가 널리 퍼져나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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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11-07 1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
 
초딩, 자전거 길을 만들다
박남정 글, 이형진 그림 / 소나무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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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쪽 정도의 분량.. 그러나 그 짧은 책이 가지는 파급력은 참 크다. 서울 당산초등학교 아이들이 촉구하여 학교 앞 통학길에 자전거도로를 만들었다는 소식이 텔레비전 뉴스에 나오고 잡지에도 기사가 되면서 널리 알려지자 박남정 작가가 관심을 갖게 되면서 이 책은 쓰여졌다. 거의 논픽션에 가까운 이 책은 픽션 이상으로 흥미진진하다. 책을 읽는 동안 내내 당산초등학교 5학년 2반 아이들의 말, 편지글, 행동들이 생생하게 다가왔다.  

학교 앞 통학길은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기에 안전하지가 못했지만 걷기에 꽤 먼 거리에 살던 아이들은 위험을 감수하고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다닌다. 학교 안에는 자전거를 주차할 곳도 없는지 아이들은 학교 앞 빌라나 아파트 안에 자전거를 세워둔다. 그런 어느 날, 자전거 주차에 대한 인근 주민들의 불평 민원이 학교로 접수되고, 학교의 관리자들은 당장 손쉽게, 자전거 통학 금지! 를 선포한다. (이 부분, 학교 쪽에서 이렇게 결정해야만 하는가, 하는 문제는 역시나 답답하다) 학교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자전거로 통학하고 있는 학생들의 고충은 안중에 없다. 그저 주차 문제로 민원이 생기는 게 번거롭고 혹시나 아이들이 사고라도 나면 더 곤란해질테니, 아예 자전거로 다니지 말라고 하면 그만이다. 그럼 어떻게 다니느냐고? "그거야 각자 알아서! 내 알 바 아니지", 라는 게 학교가 아이들에게 기껏 할 수 있는 소리다.  

아이들은 불만이지만 또 대체로 순종할 수밖에 없다. 어디 혼자 불만을 가진다고 뭐가 달라지는 걸 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그런데 5학년 2반은 좀 달랐다. 선생님도 좀 달랐나보다. 아이들에게 틀에 박힌 관습을 벗어나 사고하기를 가르치려는 분이다.  몇몇 아이들이 자전거 통학 금지에 대해 불만이 있다는 걸 알고는 학급에서 이 문제를 토론하도록 유도한다. 물론 이미 정해진 결론으로 가라고 이끄는 게 아니라 자유로운 토론을 통해 각각 주장의 장점과 단점, 타당성을 아이들 스스로 깨치도록 하는 거다. 그리고는 그게 바로, "음... 이게 바로 국어 수업 '주장과 근거 찾기'입니다. "라고 짐짓 근엄하게 말한다. 맞다.  

또 있다. 선생님은 한 발 더 나아가 아이들에게 그림책 한 권을 읽어준다. <놀이터를 만들어 주세요>라는, 베네수엘라의 가난한 달동네 카라카스에서 있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책이다. 놀 곳이 없어 이리저리 천덕꾸러기처럼 쫒겨다니던 아이들이 어느 순간, 시장님을 만나 놀이터를 만들어 달라고 하기 위해 시청으로 몰려 간다. 그러나 물론 경비원은 "유치장에 넣겠다"라며 으름장을 놓는다. 그러다 아이들을 찾아 나선 엄마들이 시청으로 몰려와 경비원과 맞서 싸우고, 결국은 우여곡절 끝에 아이들과 마을 어른들이 힘을 합쳐 놀이터를 만들어내는 이야기이다.  

아이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 "짱 용감해요! 솔직히 우리는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만 하잖아요. 그런 점에서 얘네는 우리랑 많이 다른 것 같아요. 더 주체적이라 해야 하나."라고 스스로를 짚어낸다.  

그러자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과제를 낸다. "우리 마을에서 꼭 필요한 것은 뭘까? 그것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우리도 한 번 생각해 볼까요? 이것이 이번 주 숙제입니다." 

이렇게 해서 아이들은 여러 가지를 생각해오고, 그중 자전거 통학을 포기할 수 없어 학교의 금지를 어겨가면서 몰래 자전거를 타고다니면서도 고민하던 민우는, "우리 마을에 자전거 도로를 만들면 좋겠다"고 제안한다. 그리고 아이들은 와글와글, 그게 시작이었다.  

아이들은 인터넷 카페를 만들어 자전거에 대해 조사한 결과를 올려 서로 나누기 시작한다. "자전거가 교통 수단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일본은 25%, 독일은 26%, 네덜란드는 43%인데, 우리나라는 몇 %게요?" 라고 묻고 "... 놀라지 마세요, 3%입니다." 라고 답한다. 그렇게 아이들은 자신들의 상황을 전체 속에서 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5학년 2반 32명 아이들은 오세훈 서울 시장에게 편지를 쓴다. '시장님께 감히' 그런 편지를 써도 되는지, 바쁜 시장님이 읽어주기나 할지는 반신반의하면서, 그러나 처음 해보는 그런 일의 결과에 대해 두근두근하면서. 그러나 이미 아이들은 시작했고, 그건 이미 절반의 성공은 거두었다는 거다. 화이팅! 

기다리는 답장은, 바로 오지 않는다. 몇몇 어른들은 "니들이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겠어?"라면서 다가오는 시험 공부나 하고 정신차리라고 하고, 한참 후에 시청에서는 사람을 보내 좀 기다리라는 말을 하고 간다. 그리고 여름 방학. 아이들의 들뜬 분위기는 가라앉았다. 그리고 2학기. 

아이들은 지지부진한 자전거도로 만들기를 마무리해버릴지 계속할지를 의논하고, 의논 결과 동아리를 만들어 더 집중적으로 해나가기로 한다. 동아리 아이들은 동영상도 만들고 소식지도 만들고, 학교 앞과 집 주변 도로 답사 지도도 그리는 등, 점점 스스로의 활동을 키워가고 방향을 잡아나간다. 동아리 회장 민우는 다시 오세훈 시장에게 편지를 쓴다. 그리고 이번에도 답장이 안 오면 1인시위라도 하자는 의견도 나오고, 시장에게는 자료, 사진, 그림, 지도 동영상 등을 파워포인트로 정리해서 함께 보내기로 한다. 아이들은 이렇게 스스로 한 걸음씩 앞으로 나간다.  

10월 초 편지를 보내고, 10월 16일에 서울시에서 답장이 오고, 그리고 11월 18일, 드디어, 자전거도로를 만들겠다고 약속하는 답장이 온다. 아이들의 환호!!  

모두가 서로의 등을 두드려 주며 어깨를 감싸안았다. 선생님도 말없이 아이들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서로 부둥켜안은 아이들의 가슴과 가슴으로 뜨거운 물결 같은 것이 흐르는 듯했다. 성적이 오르거나, 갖고 싶은 선물을 받았을 때와는 다른, 벅차고도 가슴 뭉클한 기쁨이었다. 

어쩌면, 그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었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랬다고 누가 다친 사람도 없고, 심각한 의견 대립으로 서로 등돌리는 일도 없었고, 자금이 필요한 일도 아니었고.. 등등 이런 이유로 뭐, 누구나 시작만 하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렇게, 

다해놓고 보면 그리 어렵지 않았어, 하는 수많은 일들도 실은 시작하기는 얼마나 어렵던가. 가장 큰 어려움은 사실 "가능할 지 불가능할 지 알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시작한다"는 것이 아닐까. 물론 그렇게 시작해도 일이 저절로 풀리지도 않는다. 지지부진하지만 초심을 잃지 않고 계속 밀고 나가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의 아이들은 가능성으로 뭉쳐 있을 뿐이다. 그 가능성을 믿어주고 지지해줄 그들의 멘토가 존재할 때, 그것은 활짝 개화할 수도 있다는 것도 중요하다.  

당산 초등학교 5학년 2반 아이들, 그들의 경험은 '납득할 순 없지만 그저 불편함을 감수하는 걸 미덕으로 삼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의 종소리가 되었으면 한다. 내가 살고 있는 작은 시골 소읍에도 자전거 통학로가 갖추어져 있지 않아 수많은 아이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학교에 다닌다. 심지어 대중교통 수단인 버스조차 구간이 한정되어있어 아이들은 자전거를 타지 않을 수도 없지만, 누구도 그 아이들을 위해 안전한 자전거 길이 급히 필요하다는 절박한 문제 제기도 하지 않은 채 방치되어왔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하는 일이 으례 그러려니 할 것이다. 사례를 찾다가 이 책을 찾아서, 나도 정말 이 문제를 제기하려고 한다. 지역 환경단체와 함께 의논해서 이 문제를 공론에 붙이려고 하면서 이 글을 쓰니 사뭇 엄숙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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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srud8557 2011-09-04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전 이거 재미있을것 같은뎅 내용죰 알려주셔요
 
예수전
김규항 지음 / 돌베개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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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만' 알고 있었다. 난 어릴 때부터 예수와 하등 상관없이 살았는데, 어른이 되어서는 예수가(실은 '교회'가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인류사에 너무나 지대한 영향을 끼친 걸 보고 알고 싶었다. 성경은 잘 다가오지 않았고 내게는 혁명가 예수가 더 쉽고 가깝게 다가왔다. 그러나 자발적으로 찾아갔던 교회도 성당도, 혁명가 예수의 이야기는 금기였고 그 예수는 오직 책에서만 만날 수 있었다(물론 내가 갔던 곳이 몇 군데일 뿐이지만... 책에서 보면 많은 다른 교회들도 거의 마찬가지 상황인 듯하다). 내가 어느 정도 알고 있던 예수는 그렇게 세상이 분열시킨 예수다. 그런 내게 기독교의 교리는 듣기 거북한 이야기들이다. 자기 몸집을 불리고 키를 높이는데 그렇게 열성인 수많은 교회들이 정작 '불우한 이웃'들에게 얼마나 인색한지를 보고 또 보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한국 교회들은 자기만족을 추구하느라 정작 예수를 잊었다고 생각한지 오래다. 그런 고로, 교회에 대한 존중을 접은 지 오래다.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을 읽으며, 구절구절 그렇게 무신론은 항변하는 도킨스의 목소리가 참 성의 있지만 귀찮을 정도라고 느꼈을 만큼, 교회의 하고많은 엉터리 수작들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고싶지 않았던 상태였다.

 

 김규항도 실은 '어느 정도만' 알고 있었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신문 칼럼에서 김규항의 글을 만나면, 적어도 며칠간은 그걸, 오려서 들고다니면서 다시 한번씩 보곤 했다. 절대로 끓어 넘치지 않으면서도 굳고 강하게 그는 말한다. 그의 글에서 그는 일관성이 있다. 그의 개인적 삶은 잘 알지 못하지만, 글에서 만나는 그는 신뢰를 주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가 버겁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자신 혹은 소수의 완벽한 실천가, 그리고 정치적으로 혹은 경제적으로 불우한 약자들, '그외'는 모두 적으로 간주되는 것 같아서였다. 불편했던 거다. 나는 어느샌가 그가 비난하고 있는 그룹에 속한 나약한 이상주의자, 낭만적 자기만족적 실천가 쯤 되는 삶을 살고 있어서였을 것이다. 내 안의 허를 계속 찌르는 그가, 편할 수만은 없었겠지만, 그 불편함 속엔 아마도 아주 작은 억울함도 들었던 것 같다. '그외'도 다양하지 않던가 말이다. 까만 것 흰 것 말고도 회색은 얼마나 다양한가, 너무 짙으면 그 속이 안 보이고 아주 옅으면 그 속이 보이기도 하는 다양한 회색 식구들. 그 모든 식구들한테 "너희들은 안 희어!" 라고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김규항도 신문의 칼럼에서 말고는 잘 읽지 않았다. 그는 논리정연하고 단단하다. 온전히 받아들이기에도, '무찌르기'에도 버거운 상대다. (이런 말을 하고 있자니 왠지 웃음이  ^^)  

 

 

김규항이 예수에 대해 말한다니, 그래도 궁금했다. 관심 가는 두 남자가 아니었던가 말이다. ㅎㅎ

 

김규항이 마르코 복음을 읽는다. 주로 복음 기자 마르코- 김규항은 '작가'라고 말한다-의 시각에서 쓰인 예수를 해석한다. 수없이 해석된 예수겠지만, 게다가 그중에 내가 읽고 알거나 잊어버린 해석들이야 몇 되지도 않지만, 김규항의 예수 읽기는 내게는 다시 새롭게 다가왔다. 무엇보다 예수의 행동들을, 철저히 예수 당시 팔레스타인 상황에서 해석하고 있는 게 공정하고 당연하게 느껴졌다. 실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또 너무나 자주 깜빡깜빡 잊혀지는 일이어서 그럴 것이다. 이 책의 전 과정에서 그는 그 당시의 갈릴래아, 사마리아와 유다 지방의 정치적 상황을 중요한 전제로 삼는다. 공부하지 않고 그냥은 알 수 없을 '바리사이파'와 '성전'과 열혈 '젤롯당'의 관계들, 지금과는 다른 병자들과 여자들과 아이들에 대한 인식,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정치적 변혁이었나 혹은 종교적 해탈이었나 하는 문제, 마르코 복음이 지어진 AD70년경의 로마의 상황과 같은 것들이 상투적인 해석을 뒤집고 새뜻을 부여할 재료로 쓰인다. 너무 자주 편파적으로 또 아전인수격으로 해석되는 한국식 기독교 해석에도 자주 쐐기를 박는다.

  

 

개신교가 타락한 가톨릭 교회에 대항하여 일어난 종교개혁으로 만들어진 걸로 알려져 있는 것에 대해서도 부연 설명한다. 그것도 물론 사실이지만, 좀더 중요한 본질은 부르주아들이 자신들의 이해와 정체성에 맞는 교회를 세운 사건이라고 보는 것이다. 
 

부르주아들의 이념과 정체성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개신교가 가톨릭과 비교하여 가장 주요한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역시 ‘돈’이다. 중세 교회는 실제로는 매우 타락했지만 공식적으로는 돈과 물질적인 부를 영혼을 더럽히는 것이라 여겨 경계하고 죄악시했다. 그러나 개신교는 그런 종래의 관점을 완전히 뒤집어 ‘돈과 물질도 하느님의 축복’이라 주장했다. ...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당한 방법’으로 쌓은 부는 사회적으로도 존경받고 교회에서도 하느님의 축복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 빈부 격차는 그 자체로 악이다. 빈부 격차란 왜 생기는가? 고루 나눠 갖지 않기 때문에, 남들보다 많이 가진 사람들 때문에 생긴다. 그러므로 하느님 앞에서 부는 능력과 노력의 결과인가 정당한 방법으로 쌓은 것인가와 상관없이 ‘가난한 사람이 존재하는 한’ 부끄러운 것이다. 부자들의 재산은 하느님의 축복이 아니라 탐욕의 결과일 뿐이다. 하느님은 그들이 재산을 모두 나누어 자발적으로 가난해지지 않는 한 하느님 나라에 들이시지 않는다. 
 

사업가의 이윤이 그 자신의 근면과 성실에서 오는 것이라며 최초의 자본가 정신을 설파한 종교개혁가 칼뱅의 논리에 반박한다. 물론 오늘날, ‘근면과 성실에서 오는 것이 이윤’이라는 건 교과서에서조차도 주장하지 못하는 이야기가 되었다.

 

예수의 선언과는 아랑곳없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한 사람에 대한 저주는 지속되거나 오히려 강화되어 왔다. 물론 앞서 말한 대로 ‘부자는 절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예수의 말은 개신교 교회, 특히 예수를 팔아 번창하는 보수적인 개신교 교회들을 얼마간 곤혹스럽게 만들어 왔다. ‘예수 믿으면 부자 된다’고 떠들어 대는 그들 뒤에서 예수가 씁쓸히 웃으며 ‘아니다, 부자는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라고 말하는 꼴인 것이다.

 

김규항은 바리사이인들에 대한 비판에도 여러 번 집중한다. 복음서에서 예수가 사두가이파나 헤로데 괴뢰 세력보다 바리사이인들에 대해 더욱 분노하는 것에 대해 해명하고 해석한다. 그 당시 ‘가장 나쁜 놈들’은 분명 전자였고, 바리사이인들은 오히려 그 사회의 양식으로 통했다는 것이다. 가장 악한 세력에 대한 비판은 너무나 지당하니 그럴 필요조차 없는 일이고, 오히려 사회적 비판이란 ‘그 사회의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주요한 세력’에 집중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리사이파, 그들은 적당한 열정과 적당한 순수로 무장하고, 삶의 안정과 사회적 존경을 동시에 확보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어지간한 사회 개혁의 실천으로, 지배세력의 폭압이 혁명의 불길로 번지는 걸 차단하고 인민들의 변혁 의지를 중화하는 체제의 안전판이었고, 예수는 놀라운 통찰로 그들의 정체를 꿰뚫어 본다, 고 한다.

예수가 바리사이들에 대해 엄정했듯, 김규항은 오늘날의 바리사이인들에 대해 혹독하다. 
 

그들은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며, 안정된, 그러나 거부감이 들 만큼은 아닌 경제력을 가진 사람들이며, 상당한 사회의식을 가진 ‘양심적인 시민들’이다. 그들은 탐욕스럽고 불의한 지배세력과 짐짓 긴장과 갈등을 벌이며, 늘 먹고사는 일에 매달려야만 하는 대다수 인민들과는 달리 시민으로서 양식을 충분히 유지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언제나 현실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말하며 스스로 그런 변화를 위한 노력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그 노력은 대개 현실의 근본적인 변화가 아니라 현실의 외피를 덜 추악하게 만드는 일에 머문다. 그들은 오히려 현실의 근본적인 변화를 좇는 모든 노력들을 ‘비현실적’이라도 냉소한다. 그들은 ‘NGO', '시민운동‘, ’개혁 운동‘, 그리고 ’실현 가능한 진보‘, ’최소한의 상식의 회복‘ 따위 간판과 표어를 걸고 활동한다. 인민들은 탐욕스럽고 불의한 지배세력을 혐오하지만 양식과 윤리로 무장한 그들을 신뢰하고 존경한다. 그래서 그들, 오늘의 바리사이인들은 사회적으로 강력한 영향력과 설득력을 가지며, ’진정한 변화를 막기 위한 변화‘라는 그들 본연의 임무를 지속하게 된다.

 

바로 얼마전 어느 진보적인 주간지에서 조사한 한국의 여론주도층 52명의 정치 성향 조사에서 ‘가장 자유주의 좌파’적이었던 김규항답다. 그는 홍세화보다도, 진중권보다도 더 좌파적이고 더 자유주의적이다. 그런 그에게 대부분의 ‘시민운동가’들은 바리사이들인가... 아무래도 그런 그의 시각은 자못 부담스럽다.

 

역시나 나는 역사에 ‘평화보다는 전쟁의 시간을 더 많이 남긴’ 기독교라는 종교, 지금도 상생보다는 그들만의 안식을 추구하기에 여념 없는 한국의 기독교에 대해 부정적이지만, 예수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김규항을 통해 관심이 더 커졌다. 그동안 내가 알던 피상적인 부분들에 대해서 그는 사고의 전환을 요구하고 섬세한 설명을 보태 자주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김규항의 <예수전>은 그러나, 이 책이 인식의 텍스트가 아니라 실천의 텍스트라야 한다는 역시나 무거운 과제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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