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전
김규항 지음 / 돌베개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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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만' 알고 있었다. 난 어릴 때부터 예수와 하등 상관없이 살았는데, 어른이 되어서는 예수가(실은 '교회'가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인류사에 너무나 지대한 영향을 끼친 걸 보고 알고 싶었다. 성경은 잘 다가오지 않았고 내게는 혁명가 예수가 더 쉽고 가깝게 다가왔다. 그러나 자발적으로 찾아갔던 교회도 성당도, 혁명가 예수의 이야기는 금기였고 그 예수는 오직 책에서만 만날 수 있었다(물론 내가 갔던 곳이 몇 군데일 뿐이지만... 책에서 보면 많은 다른 교회들도 거의 마찬가지 상황인 듯하다). 내가 어느 정도 알고 있던 예수는 그렇게 세상이 분열시킨 예수다. 그런 내게 기독교의 교리는 듣기 거북한 이야기들이다. 자기 몸집을 불리고 키를 높이는데 그렇게 열성인 수많은 교회들이 정작 '불우한 이웃'들에게 얼마나 인색한지를 보고 또 보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한국 교회들은 자기만족을 추구하느라 정작 예수를 잊었다고 생각한지 오래다. 그런 고로, 교회에 대한 존중을 접은 지 오래다.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을 읽으며, 구절구절 그렇게 무신론은 항변하는 도킨스의 목소리가 참 성의 있지만 귀찮을 정도라고 느꼈을 만큼, 교회의 하고많은 엉터리 수작들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고싶지 않았던 상태였다.

 

 김규항도 실은 '어느 정도만' 알고 있었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신문 칼럼에서 김규항의 글을 만나면, 적어도 며칠간은 그걸, 오려서 들고다니면서 다시 한번씩 보곤 했다. 절대로 끓어 넘치지 않으면서도 굳고 강하게 그는 말한다. 그의 글에서 그는 일관성이 있다. 그의 개인적 삶은 잘 알지 못하지만, 글에서 만나는 그는 신뢰를 주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가 버겁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자신 혹은 소수의 완벽한 실천가, 그리고 정치적으로 혹은 경제적으로 불우한 약자들, '그외'는 모두 적으로 간주되는 것 같아서였다. 불편했던 거다. 나는 어느샌가 그가 비난하고 있는 그룹에 속한 나약한 이상주의자, 낭만적 자기만족적 실천가 쯤 되는 삶을 살고 있어서였을 것이다. 내 안의 허를 계속 찌르는 그가, 편할 수만은 없었겠지만, 그 불편함 속엔 아마도 아주 작은 억울함도 들었던 것 같다. '그외'도 다양하지 않던가 말이다. 까만 것 흰 것 말고도 회색은 얼마나 다양한가, 너무 짙으면 그 속이 안 보이고 아주 옅으면 그 속이 보이기도 하는 다양한 회색 식구들. 그 모든 식구들한테 "너희들은 안 희어!" 라고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김규항도 신문의 칼럼에서 말고는 잘 읽지 않았다. 그는 논리정연하고 단단하다. 온전히 받아들이기에도, '무찌르기'에도 버거운 상대다. (이런 말을 하고 있자니 왠지 웃음이  ^^)  

 

 

김규항이 예수에 대해 말한다니, 그래도 궁금했다. 관심 가는 두 남자가 아니었던가 말이다. ㅎㅎ

 

김규항이 마르코 복음을 읽는다. 주로 복음 기자 마르코- 김규항은 '작가'라고 말한다-의 시각에서 쓰인 예수를 해석한다. 수없이 해석된 예수겠지만, 게다가 그중에 내가 읽고 알거나 잊어버린 해석들이야 몇 되지도 않지만, 김규항의 예수 읽기는 내게는 다시 새롭게 다가왔다. 무엇보다 예수의 행동들을, 철저히 예수 당시 팔레스타인 상황에서 해석하고 있는 게 공정하고 당연하게 느껴졌다. 실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또 너무나 자주 깜빡깜빡 잊혀지는 일이어서 그럴 것이다. 이 책의 전 과정에서 그는 그 당시의 갈릴래아, 사마리아와 유다 지방의 정치적 상황을 중요한 전제로 삼는다. 공부하지 않고 그냥은 알 수 없을 '바리사이파'와 '성전'과 열혈 '젤롯당'의 관계들, 지금과는 다른 병자들과 여자들과 아이들에 대한 인식,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정치적 변혁이었나 혹은 종교적 해탈이었나 하는 문제, 마르코 복음이 지어진 AD70년경의 로마의 상황과 같은 것들이 상투적인 해석을 뒤집고 새뜻을 부여할 재료로 쓰인다. 너무 자주 편파적으로 또 아전인수격으로 해석되는 한국식 기독교 해석에도 자주 쐐기를 박는다.

  

 

개신교가 타락한 가톨릭 교회에 대항하여 일어난 종교개혁으로 만들어진 걸로 알려져 있는 것에 대해서도 부연 설명한다. 그것도 물론 사실이지만, 좀더 중요한 본질은 부르주아들이 자신들의 이해와 정체성에 맞는 교회를 세운 사건이라고 보는 것이다. 
 

부르주아들의 이념과 정체성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개신교가 가톨릭과 비교하여 가장 주요한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역시 ‘돈’이다. 중세 교회는 실제로는 매우 타락했지만 공식적으로는 돈과 물질적인 부를 영혼을 더럽히는 것이라 여겨 경계하고 죄악시했다. 그러나 개신교는 그런 종래의 관점을 완전히 뒤집어 ‘돈과 물질도 하느님의 축복’이라 주장했다. ...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당한 방법’으로 쌓은 부는 사회적으로도 존경받고 교회에서도 하느님의 축복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 빈부 격차는 그 자체로 악이다. 빈부 격차란 왜 생기는가? 고루 나눠 갖지 않기 때문에, 남들보다 많이 가진 사람들 때문에 생긴다. 그러므로 하느님 앞에서 부는 능력과 노력의 결과인가 정당한 방법으로 쌓은 것인가와 상관없이 ‘가난한 사람이 존재하는 한’ 부끄러운 것이다. 부자들의 재산은 하느님의 축복이 아니라 탐욕의 결과일 뿐이다. 하느님은 그들이 재산을 모두 나누어 자발적으로 가난해지지 않는 한 하느님 나라에 들이시지 않는다. 
 

사업가의 이윤이 그 자신의 근면과 성실에서 오는 것이라며 최초의 자본가 정신을 설파한 종교개혁가 칼뱅의 논리에 반박한다. 물론 오늘날, ‘근면과 성실에서 오는 것이 이윤’이라는 건 교과서에서조차도 주장하지 못하는 이야기가 되었다.

 

예수의 선언과는 아랑곳없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한 사람에 대한 저주는 지속되거나 오히려 강화되어 왔다. 물론 앞서 말한 대로 ‘부자는 절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예수의 말은 개신교 교회, 특히 예수를 팔아 번창하는 보수적인 개신교 교회들을 얼마간 곤혹스럽게 만들어 왔다. ‘예수 믿으면 부자 된다’고 떠들어 대는 그들 뒤에서 예수가 씁쓸히 웃으며 ‘아니다, 부자는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라고 말하는 꼴인 것이다.

 

김규항은 바리사이인들에 대한 비판에도 여러 번 집중한다. 복음서에서 예수가 사두가이파나 헤로데 괴뢰 세력보다 바리사이인들에 대해 더욱 분노하는 것에 대해 해명하고 해석한다. 그 당시 ‘가장 나쁜 놈들’은 분명 전자였고, 바리사이인들은 오히려 그 사회의 양식으로 통했다는 것이다. 가장 악한 세력에 대한 비판은 너무나 지당하니 그럴 필요조차 없는 일이고, 오히려 사회적 비판이란 ‘그 사회의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주요한 세력’에 집중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리사이파, 그들은 적당한 열정과 적당한 순수로 무장하고, 삶의 안정과 사회적 존경을 동시에 확보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어지간한 사회 개혁의 실천으로, 지배세력의 폭압이 혁명의 불길로 번지는 걸 차단하고 인민들의 변혁 의지를 중화하는 체제의 안전판이었고, 예수는 놀라운 통찰로 그들의 정체를 꿰뚫어 본다, 고 한다.

예수가 바리사이들에 대해 엄정했듯, 김규항은 오늘날의 바리사이인들에 대해 혹독하다. 
 

그들은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며, 안정된, 그러나 거부감이 들 만큼은 아닌 경제력을 가진 사람들이며, 상당한 사회의식을 가진 ‘양심적인 시민들’이다. 그들은 탐욕스럽고 불의한 지배세력과 짐짓 긴장과 갈등을 벌이며, 늘 먹고사는 일에 매달려야만 하는 대다수 인민들과는 달리 시민으로서 양식을 충분히 유지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언제나 현실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말하며 스스로 그런 변화를 위한 노력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그 노력은 대개 현실의 근본적인 변화가 아니라 현실의 외피를 덜 추악하게 만드는 일에 머문다. 그들은 오히려 현실의 근본적인 변화를 좇는 모든 노력들을 ‘비현실적’이라도 냉소한다. 그들은 ‘NGO', '시민운동‘, ’개혁 운동‘, 그리고 ’실현 가능한 진보‘, ’최소한의 상식의 회복‘ 따위 간판과 표어를 걸고 활동한다. 인민들은 탐욕스럽고 불의한 지배세력을 혐오하지만 양식과 윤리로 무장한 그들을 신뢰하고 존경한다. 그래서 그들, 오늘의 바리사이인들은 사회적으로 강력한 영향력과 설득력을 가지며, ’진정한 변화를 막기 위한 변화‘라는 그들 본연의 임무를 지속하게 된다.

 

바로 얼마전 어느 진보적인 주간지에서 조사한 한국의 여론주도층 52명의 정치 성향 조사에서 ‘가장 자유주의 좌파’적이었던 김규항답다. 그는 홍세화보다도, 진중권보다도 더 좌파적이고 더 자유주의적이다. 그런 그에게 대부분의 ‘시민운동가’들은 바리사이들인가... 아무래도 그런 그의 시각은 자못 부담스럽다.

 

역시나 나는 역사에 ‘평화보다는 전쟁의 시간을 더 많이 남긴’ 기독교라는 종교, 지금도 상생보다는 그들만의 안식을 추구하기에 여념 없는 한국의 기독교에 대해 부정적이지만, 예수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김규항을 통해 관심이 더 커졌다. 그동안 내가 알던 피상적인 부분들에 대해서 그는 사고의 전환을 요구하고 섬세한 설명을 보태 자주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김규항의 <예수전>은 그러나, 이 책이 인식의 텍스트가 아니라 실천의 텍스트라야 한다는 역시나 무거운 과제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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