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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마중 - 유년동화
김동성 그림, 이태준 글 / 한길사 / 200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추워서 코가 새빨간 아가가 아장아장 전차 정류장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그리고 '낑' 하고 안전 지대에 올라섰습니다. 이내 전차가 왔습니다. 아가는 갸웃하고 차장더러 물었습니다. "우리 엄마 안 와요?" "너희 엄마를 내가 아니?" 하고 차장은 '땡땡' 하면서 지나갔습니다. 또 전차가 왔습니다. 아가는 또 갸웃하고 차장더러 물었습니다. "우리 엄마 안 와요?" "너희 엄마를 내가 아니?" 하고 이 차장도 '땡땡' 하면서 지나갔습니다. 그 다음 전차가 또 왔습니다. 아가는 또 갸웃하고 차장더러 물었습니다. "우리 엄마 안 와요?" "오! 엄마를 기다리는 아가구나." 하고 이번 차장은 내려와서, "다칠라. 너희 엄마 오시도록 한군데만 가만히 섰거라, 응?" 하고 갔습니다. 아가는 바람이 불어도 꼼짝 안 하고, 전차가 와도 다시는 묻지도 않고, 코만 새빨개서 가만히 서 있습니다.
이태준 글, 김동성 그림이라고 되어있는 이 그림책의 '글' 부분이다. 글로만 보아도 영 마음이 짠해진다. 정말 군더더기 없는 글, 그런데 그렇게 간결하면서도 아가의 모습이 생생하게 잡힌다. '낑' 하고 안전지대에 올라서는 모습, 갸웃하고 차장에게 묻는 모습, 코만 새빨개서 가만히 서 있는 모습... 마지막 차장이 아가를 걱정하여 꼼짝말고 한군데만 서 있으라는 말투도 참 생생하다. 한마디 더 뺄 것도 더 보탤 것도 없는, 아름다운 함축이다. 짧은 글 안에 섬세한 아름다움, 따뜻한 시선, 생생한 사실감들을 살려내는 이태준님의 글힘이 돋보인다. 하나를 덧붙이자면, 언제부터인가 우리에게서 멀어져버린 '아가'라는 말, 이제는 거의 아기로 대체되어버린 이 말이 주는 옛스러운 정다움도 한몫을 하는 듯하다. 지은이가 아가, 라고 부를 때 그 대상에 대한 애틋한 정다움이 찰랑거린다.
이런 글에, 김동성님이 그림을 그렸다. <삼촌과 함께 자전거 여행>이라는 그림동화로 우연히 어린이 책 일러스트의 세계로 들어섰다는 김동성님은, 그래서 더 많은 어린이와 어른들에게 그의 그림을 보는 즐거움을 주고 있다. 첫 작품부터 정말로 예사롭지 않았다. 그때부터 김동성 그림, 이라고 되어있으면 언제나 주의깊게 보았다. 아마도 많은 이들에게 그러리라고 생각한다. <메아리>, <하늘길> 등에서 언제나 그의 그림은 글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글을 보여주는 그림으로써만 아니라, 그림 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 잘 그린 그의 그림들을 보고 있으면, 김동성이라는 화가의 존재에 감사하게 된다.
이 책, <엄마 마중>에서 그의 그림은 한층 더 깊고 자유롭다. 글만큼이나 그의 그림도 간결해져 있다. <메아리> 들에서 보던 멋스런 사실화보다 이 글에는 훨씬 더 잘 어울리게끔 선들은 검소하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래서 더 아름답다. 전차 정류장 앞의 모습들이 이런 간결한 선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마치 박수근의 그림을 보는 듯, 나는 수십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정교하고, 군더더기란 하나도 없는데 한없이 풍부하다. 정류장의 풍경은 아마 더도 덜도 없이 그러했을 것이다. 아기를 업은 아낙, 두루막 차림으로 손을 잡고 이야기를 나누는 모녀, 머리에 짐보따리를 이고는 전차 오기만을 기다리는 여자, 혼자 남자라서인지 외돌아 근엄하게 서 있는 할아버지... 전차가 들어오면 길게 펼친 그림책 한 장에는 그냥 긴 모습 그대로 전차가 가득하다. 광주리를 들고 아이의 손을 잡고 내리고 타는 사람들, 책보따리를 메고 달음질치는 학생들... 기다리며 정류장 표지판 기둥을 잡고는 빙빙 맴을 도는 아가 모습이나 전차가 올 방향을 바라보며 오두마니 앉은 하염없는 모습들에 내 눈이 사로잡힌다.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제 모습으로 있다. 제 모습으로 모두가 아름답다.
한 장씩 건너뛰며 그림은 기다림을 형상화한다. 아가의 기다림은 저 먼 곳에서 땡땡 소리를 내며 다가오고 있는 전차로 환상적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한 순간은 전차길 앞쪽의 거리 풍경으로 스산하게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마치 존 버닝햄이 자주 쓰는 기법, 현실과 마음 속 상상의 세계가 교차되며 나타나는 기법이 연상된다. 존 버닝햄이 너무나 적절히 마음 속 희망의 세계와 건조한 현실을 풍부하고 환상적인 색채그림과 간결하고 어눌한 듯한 선그림으로 교차시켰듯, 이 그림책의 작가도 아가의 현실적인 시간과 어디선가 엄마를 태우고 씽씽 달려오고 있을 전차에 대한 기다림을 교차시킨다. 간결한 선그림과 환상적이고 풍부한 색채의 세계로, 그림책을 보는 우리의 마음은 넘나든다. 당연히, 존 버닝햄의 그림에 비해 김동성의 그림은 훨씬 나에게 정답다. 익숙한 것들을 새롭게 보는 이 즐거운 발견의 느낌은, 보고 또 보아도 여전히 가슴 가득 차오르는 기쁨이다. 정말로, 좋다.
위에서 일부러 이태준 님의 글을 옮겨 써보았다. 그림이 없는 글은 어떤 느낌인가, 궁금해서였다. 그렇게 보고 다시 그림과 함께 보고, 다시 글만 본다. 글에서는 아가가 '코만 새빨개서 가만히 서 있습니다.' 로 끝이다. 그림은 거기서 안타까운 끝을 맺지 못하고, 좀더 많은 이야기를 잇는다. 하늘색이 깊어지며 눈이 내리고, 온갖 것들이 정지하는 듯한 순간이 온다. 그 속에 아가는 오두마니, 혼자 서 있다. ... 그러다 마지막 장을 펼치면 펑펑 눈내리는 동네, 작은 골목길, 그 골목길을 정답게 걸어가는 엄마와 아가... 아아, 다행이다. 아가의 손에는 빨간 막대사탕이 쥐어져있고 아가와 엄마는 서로 바라보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듯, 따뜻하다. 아가 혼자 기다릴 때 안스럽게 차갑던 눈발마저 갑자기 포근해진다. 글이 끝나고 세 장면, 이 부분은 순전히 그림작가의 몫인데, 그이가 보탠 따뜻한 손길이 내 마음을 어루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