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이레 / 2004년 11월
평점 :
절판


인간이란 정녕 복잡한 존재다. 명예가 실존에 우선할 수 있는가... 

부도덕하고 광기에 찬 전쟁을 일으킨 독일이라는 나라와 국민들, 그들에 의해 홀로코스트를 겪은 수많은 무죄한 유태인들. 이제 누구도 떠올리고 싶지 않지만 떠올리지 않고 넘어서서도 안되는 중압감으로 존재하는 그 일들은 그 핵심에서 뿐 아니라 그 언저리에서도 너무나 깊은 상처를 남겼다. 이 책은 홀로코스트의 아비규환에서 많은 것을 가져오는 듯 하지만 실은 그 언저리에서 이야기를 건져 올린다.  

한나는 아름답고 성실하고 섬세한 여자다. 그런 여자에 대해 당연히 주어지는 보너스와도 같은 기대는, 그러나 그녀에게는 덥석 받아 즐기면 되는 상찬이 아니라 도저히 받을 수 없는 짐이다. 그녀가 문맹이라는 사실은, 세상의 모든 기대를 업고 그녀에게 더 큰 형벌이 된다. 그녀는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생활을 교묘하게 이어가야 한다. 승진의 기회도 마다하고 자신을 숨길 수 있는 다른 곳으로 달아나 버린다. 열다섯의 이른 나이에 한나로 인해 성과 사랑에 눈떠버린 미하엘과의 관계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달콤하고도 열에 들뜬 열다섯 소년에게 한나는 '먼저 책을 읽어줄 것을' 요구해왔다. 미하엘에게 그것은 더 신비롭고도 더 흥미로운 일이었다. 한나가 애써 지키고자 했던 비밀은 그녀 스스로를 베일에 싸인 존재로 만들고 말았다. 물론 그녀는 그저 비밀을 지키고 싶었을 뿐이었지만. 

미하엘과의 관계도, 승진의 기회도 결코 사소한 일일 수는 없다. 그러나 그로 인해 한나는 자신이 지키고 있는 비밀을 드러낼 수 없다. 그녀는 달아난다. 갑자기 첫 연인을 잃어버린 미하엘은 황망하다. 그러나 황망한 중에도 세월이 가고, 나이를 먹고, 할 일을 하면서 미하엘은 어느덧 법과 대학의 학생이 되어 겉으로는 그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다 돌연, 한나를 만난다.  

한나는 법정에 섰다. 수용소를 관리했던 직원으로서 전범이 되어서. 실상 문맹인 한나의 역사 인식은 그때나 지금이나, 그것을 일과 인생의 한 경로 이상으로는 생각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모두들 그 사실을 모르고, 한나의 무지와 백치와 같은 무구한 역사 인식은 부정된다. 누군가는 상식에 기대어 또 누군가는 영리한 생존력에 기대어 한나를 죄인으로 떠민다. 물론 한나는 그 시대의 부역자로서 벌을 받아야 할 처지이지만, 같은 처지의 다른 모든 죄인들은 한나에게 그들 모두의 죄를 뒤집어 씌운다. 그녀가 무지하고 둔감한 먹잇감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본 것이다. 한나의 문맹은 그러나, 이 모든 혐의를 번복할 알리바이가 될 수 있다. 한나는 자신의 생존과 위장된 명예, 그러나 그녀의 실존을 받쳐주고 있는 그 명예의 수호 앞에서 갈등한다. 그 갈등의 순간, 그녀는 법정에서 미하엘과 눈이 마주친다. 그녀가 철저히 자신의 비밀을 수호해 왔던 그 어린 소년이 

그 곳에 있다. 잔인한 설정이다. 

나는, 한나가 그때 법정에서 미하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러니까 한나가 긴밀한 관계를 갖지 않고 그리하여 그들 앞에서 지켜야 할 명예가 생존 만큼은 아니었을 사람들에게만 노출되어 있었더라면, 그녀는 그 순간 법정에서 자신의 비밀을 떠듬떠듬 털어놓을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그녀의 고백을 듣는 순간 모든 사람들은 한 순간 얼어붙고, 그리고 곧 그 사실의 중요함을 깨닫고는 악다구니처럼 그녀를 떼로 비난하다가, 마치 재수없다는 듯 그녀를 무시하고,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는 걸 포기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한나는 고개 숙이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자존심은 상처를 입겠지만, 그녀는 또 다른 곳에서 비밀스런 인생을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미하엘이 그곳에 있었다. 작가는 미하엘을 바로 그곳에 두었다. 그리고 한나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비밀을 부여잡는다. 그녀는 자신의 생존을, 미하엘 앞에서의 명예와 맞바꾼다. 미하엘은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는 자기가 본 그 현장을 믿을 수가 없다. 성숙한 어른, 아버지에게 그에 대한 견해를 묻는다. 아버지는, 신중하게 그같은 일이 가능하다고 조언한다. 그러나 그 의견은 아직 미하엘의 것이 될 수는 없고, 미하엘은 그 사실을 정면으로 맞닥뜨리기보다는 슬쩍, 한쪽으로 밀어놓는다. 그러나 없애버릴 수는 없다. 곁눈질하듯 그 사실을 곱씹으며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미하엘의 행적. 그는 한나가 수감되어 있는 교도소에 책을 읽어 녹음한 테이프를 보낸다. 그것은 한나가 출소할 때까지 계속된다. 미하엘이 읽어주는 책. 한나는 이제 더이상 그에게 숨길 비밀이 없어져버렸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녀는 글자를 배우기 시작한다. 그것은 그녀의 생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과업이었다. 미하엘과의 관계가 , 혹은 미하엘의 연민이, 혹은 한나의 미하엘에 대한 사랑이... 그녀를 깊고깊게 만든다. 그녀는 미하엘로 하여 뒤늦게나마 용기있게 인생에 맞닥뜨린다. 

그 뒤로 일어나는 일들도 예사롭지 않지만, 이 책의 중반부에서 나는 이 책의 대부분을 읽었다. 지은이가 진지하게 탐구한 그 주제는 인간성의 본질의 한 면을 거듭 생각하게 만든다. 인간이 스스로 누리고 싶은 존엄함이란, 거짓된 명예일지라도 생존을 갉아먹을 만큼 그토록 엄중한 것인데, 어째서 이 세상은 이다지도 비열함이 난무하는가 말이다. 비열함은 그저 존엄의 부재가 아닐 터인데...  

한 작품으로도 엄청난 포스가 느껴지는 지은이가 이번엔 인간의 생존과 그 생존 너머를 넘보는 비열함을 주제로 하여 새로운 탐구를 하기를 혼자서라도 기다려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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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2010-05-04 0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혼자서는 아니실거라고..^^

sprout 2010-05-07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분명히 그렇겠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