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행 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정태원 옮김 / 태동출판사 / 200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300쪽 분량의 책 세 권, 적지않은 양이지만 또 쉬어가며 읽을 수도 없다. 그만큼 몰입해서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무엇보다, 그 비틀린 형태로 드러나는 내면들.. 처음에는 기이하여 대체 어째서 이렇게? 싶었지만 결국 이유있는 비틀림. 슬픈 행로다. 결국은 상처가 지배하는, 어린 시절의 풀지 못한 트라우마가 인생 전체를 지배하고 뒤틀어버린다는 아픈 이야기다. 살인 사건과 맞물려 추리소설의 형태가 되었다.  

지독한 트라우마가 있어도 누구나 그렇게 스스로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의 삶을 살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책의 두 피해자는 어린 시절, 밝은 태양의 시간을 빼앗기면서 무너진다기보다, 스스로를 다구지게 세워가면서 다시는 그 어느 누구도 자신들에게 가해할 수 없도록 칼날같은 장벽을 세워나간다. 동시에 냉혹함과 위해요소를 제거할 수 있을 만한 치밀함과 능력.. 같은 것들을 벼리면서. 그런 주인공들이다. 그러나 그런 그들의 행보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는 것이 작가의 생각인 듯하다.  들여다보기만 해도 섬찟한 그 내면의 바탕은 역시나 아픔이라는 것. 그러니 그들이 걸어가는 그 위태로운 길은 결코 태양 아래가 아니라 밤의 시간일 수밖에 없다는 시선에 공감이 간다. 그러나 서로에게 위안을 줄 수 있는, 자신에게만 빛이 되어주는 어슴푸레한 존재를 안고 가니 어쨌든 캄캄한 밤길은 아니다. 하얀 어둠 속을 걷는 이들이다. 그래서 그들의 쓸쓸한 길은 분노가 아니라 아픔을 준다.  

한동안 일본 추리소설에 탐닉했더랬다. 미야베 미유키, 온다 리쿠, 히가시노 게이코, 기시 유스케... 이젠 익숙해진 이름들이다. 그럭저럭 서른 권 이상을 넘기니, 일본 추리소설, 이라는 것이 형태가 어슴푸레 잡힌다. 진짜, 일본 추리소설에는 어떤 특이한 유형적인 공통점이 느껴진다. 그들은 정말 생각이 많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언제나, 타인의 생각의 흐름을 따라잡으려 하고, 미리 짐작해보려고 한다. 타인의 생각에 이토록 관심 많은 사람들이라니...! 그들 소설에서는 너무나 자주 타인의 생각을 짐작하는 문구들이 등장해서 이건 일본 사람들의 공통되고 자연스러운 정신 현상인가, 하고 생각하게까지 되었다. 이렇게 남의 생각에 관심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라니! 어쩐지 다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 듯한 우리나라 사람들과는 확실하게 차이가 나는 정신 상태다. 며칠 전 읽은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이탈리아 사람들의 수다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기차를 타고 파리에서 밀라노를 가노라면 프랑스 구간에서는 조용하다가도 이탈리아 국경만 넘으면 기차 안은 갑자기 시끌벅적해진다. 분명 승객은 많이 바뀌지 않았는데 자기네 나라에 들어오자마자 의기양양해서 떠들어대는 것이다. 그들은 안으로 품지 않고 뭐든지 밖으로 발산해내는 사람들인 것 같다. 바로 그들의 발산 본능이 철학보다는 예술을 더 발달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고종희, <이탈리아 오래된 도시로 미술 여행을 떠나다>의 서문에서 작가의 말) 

그에 의하면, 발산 본능이 예술을 발달하게 할 수도 있다, 달리 말하면 내면으로 들어가야 철학이 발달할 수 있다는 것일 수도 있다. 어쩐지 그럴 것도 같다.. 주어진 환경이 그 집단의 인간의 기질을 결정짓고 그 기질은 예술적이니 철학적이니, 이런 형태로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확실히 일본이나 한국이나, 굉장히 다른 조건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읽어보면 너무나 다른 느낌이, 선명하게 다가온다. 익숙하지 않은 그 느낌, 타인의 행동에서 언제나 생각을 더듬고 있다는 그 느낌이, 역으로 누군가 별 의미없는 모든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며 해석하고 있다는 생각에 미치면 오싹하다. 남을 헤아리는 것은 배려의 품새로 읽히기도 할 것이다. 물론 행동에는 많은 제약이 따를 것이고, '나의 발산'과 '남에 대한 배려' 사이의 균형이 깨지고 억압된 자아는... 폭발성을 내재하게 되지 않을까. 상상을 초월하는 많은 엽기적인 이야기들이 생산되는 일본 문화의 특질은 그런 억압된 자아들의 기묘한 분출이 아닐까, 하는 데까지 생각이 나아간다. 그만큼 일본 소설에는 어떤 일반적인 흐름이 있다. 물론 우리나라 작가의 작품에도 그런 예가 없는 건 아니지만, 일반적이라기 보다는 작가적 특성으로 읽히는데 일본 작가에서는 그것이 일반적이라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백야행>이라는 책 한 권을 읽고 (세 권이라 해야하나?..) 쓸 이야기는 아닐 지도 모르겠다. 그저 몇 년 새 일본 추리소설(그 장르 외에도 어쩌다보니 일본 소설이라는 걸 여럿 읽게 되었다)을 읽다보니 쌓인 어떤 느낌 같은 것을 이참에 표현해보고 싶었을 뿐이다. 일본 추리소설은 일본에서는 아주 유서깊은 장르이고 인기있는 분야이다. 처음엔 낯설었지만 금세 그 재미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러나 그 속에서 건져올리는 또 다른 감정은, 분명 두려움 같은 것이다. 어두운 심연과 같은 내면들, 그런 내면의 세계에서 발을 딛지 못하고 부유하는 영혼들.. 그런 영혼들에 마주치는 느낌은 내겐 거의 언제나 두려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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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gogo 2010-01-28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네요 잘 읽었습니다
...그런 내면의 세계에서 발을 딛지 못하고 부유하는 영혼들..이라...좋네요^^

파란 2010-03-19 0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리소설을 좋아해서 이것저것 조금 읽었는데 님이 일본풍이라도 말하는 그런 두려움 같은게 조금 무섭더라구요. 몇권 읽지도 않았는데 오싹해져서 덮어버렸어요. 모방범 2권 읽고 정신건강에 좋지 않을거야. 하면서 (그때 갓난아기 키우던 때라) 그 뒤로 손이 안가네요.

2010-03-29 21:0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