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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밤
안드레아 라우흐 지음, 한리나 옮김, 파비오 데 폴리 그림 / 느림보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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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단비같은 동화

어린 시절, 휘영청 달이 밝은 어느 날, 달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왜, 한가위에만 보름달을 보며 소원을 빌어야 하지? 달은 늘 우리 곁에 있는데, 왜 소원은 일 년에 한번만 빌어야 하냐구. 초승달일 때 소원을 빌면 달이 차오르면서 내 소원까지 함께 품어 줄 텐데... 어린 나는 매일 달을 보며 소원을 빈다. 드디어 보름달이 떠오르면, 꼭 소원이 이루어질 것만 같다. 누군가 나에게 이런 동화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면 달은 특별한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늘 꿈을 간직한 소녀가 되지 않았을까.

나이가 들면서 달을 잊고 살았다. 낮에도 하늘 한 번 올려다보기 힘드니 밤에는 오죽할까. 그만큼 여유가 없고, 마음은 메말라 가는지도 모른다. 이런 내게 『달밤』이 찾아왔다. 

깊은 밤, 연못 위로 달이 떠오르면 숲속에선 한바탕 잔치가 시작된다

쉬잇... 드디어 달님이 연못 위로 떠올랐어요.
스르륵... 반가운 마음에 물뱀이 펄쩍 뛰어오르다 그만 미끄러졌네요.
피우우... 때마침 나비가 연주를 시작했어요. 달님에게 닿으라는 듯 두 날개로 힘차게!
톡,톡,톡... 보름달 아래로 살포시 이슬이 내려앉고 있어요.
풍덩... 바다에서 이사 온 문어가 달님 사이로 몰래 자기 모습을 비춰보다 숨어버립니다.
으르렁... 목이 말라 연못으로 나온 표범이 달님을 잡으러 앞발을 힘껏 뻗어보네요. 저런 바보!
아흠... 새가 먼 하늘 달님을 쳐다보네요. 달님에게로 날아가고 싶지만, 지금은 잠이 우선.
찍찍... 곡예사 생쥐, 달님을 공삼아 재주를 부리며 꿈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죠. 꿈에 관해서라면 수다쟁이거든요.
그르렁... 비밀인데요, 연못에 용이 살아요. 저 용은 언젠가 한 번 달님을 깨물어 본 적이 있답니다. 무슨 맛인지 궁금했다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연못 속으로 들어가 버리네요.
뻐끔뻐끔... 차가운 밤공기를 가르며 물 위로 물고기가 솟아올라요. 어부들이 돌아간 지금이 바로, 자유롭게 헤엄칠 수 있는 시간이거든요.
흠흠... 이 좋은 향기는, 달맞이꽃! 달빛 아래 활짝 꽃잎을 피우고 있네요.
뿌우우... 숲 속 음치대장 코끼리도 놀러왔어요. 긴 코로 물을 뿜어대랴 노래하랴, 바쁘다 바뻐. 음치만 아니면 참 좋으련만.

『달밤』에 나오는 열 두 편의 동화를 한 편의 이야기로 엮어 보았다. 얼마나 아기자기하고 사랑스러운지. 누구라도 읽어보면 입가에 미소가 번질 것이다. 읽는 것은 찰나지만 그 여운은 영원처럼 오래 남는다. 미래의 내 아이에게 이런 상상의 세계를 보여주고 싶다. 달이 떠오른 어느 날, 함께 달을 보며 ‘이 순간 무얼 하고 싶니?’ 라며 물어봐 주겠다. 그때 아이가 이 숲 속 친구들을 떠올릴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이 세상 모든 것과 친구가 되고픈 순간이 있었다. 모든 것과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시절, 나무 새 달 바람... 어떤 것과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내 이야기를 시작하면, 네 이야기가 들려오고, 우리의 이야기를 만들어갈 수 있었다. 달밤의 숲 속 친구들처럼 모두와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열 두 편의 동화? 열 두 편의 동시를 만나다!

이런 책이 있다니! 첫 장을 넘기고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마지막 장을 덮으며 이런 책이 있어서 감사하다고 나는 진심으로 되뇌었다. 읽고 또 읽기를 반복,하면서 연못가로 모여든 숲 속 친구들의 행동이 눈에 그려질 듯 선명하게 떠올랐다. 달빛을 받아 온 몸을 반짝이는 물뱀, 밤하늘을 향해 날개짓하는 나비, 풀잎 나뭇잎을 가만히 적셔주는 이슬, 뽐내기 좋아하는 문어, 어리숙한 표범, 졸음을 못이기는 새, 꿈 많은 생쥐, 호기심쟁이 용, 헤엄치기 좋아하는 물고기, 달빛 아래 활짝 핀 달맞이꽃, 숲 속 음치대장 코끼리, 이 모든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을 달님. 

총 열 두 편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달밤』은 동화책이지만, 동시를 읽는 느낌이 든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각기 다른 주인공이 등장하는데, 마치 살아있는 듯 생생하다. 이들의 특징적인 모습과 행동이 단문 속에 유쾌하고 친근하게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특히 마지막 문장에 의성어 의태어를 사용해 한껏 운율을 더했다. 이 책의 보석 같은 부분이다. 한 가지 더 빼놓을 수 없는 것, 바로 콜라주! 학교 다닐 때 해보고 처음이다. 이렇게 동화책에서 만나니 캐릭터가 선명하게 살아나는 느낌이다. 자꾸만 만져보고 싶어진다. 아이와 함께 직접 만들어 본다면 더 없이 좋은 시간이 될 것 같다. 질감과 색감을 직접 손끝으로 느끼면서 하나하나 생명을 불어넣는다면 아이의 감성은 얼마나 풍성해질까. 

달밤, 내 마음에 촉촉한 단비를 내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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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악하악 - 이외수의 생존법
이외수 지음, 정태련 그림 / 해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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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 새로운 소통의 언어
-『하악하악』을 읽고

 만약 당신이 새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4km, 물고기가 헤엄치는 방향으로 2km라는 표지판과 만나게 된다면 감성마을에 가까이 왔음을 직감할 수 있을 것이다. 표지판 하나로도 뭇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작가 이외수. 나는『하악하악』을 읽어보기 전 작가를 먼저 만났다. 지난 7월, 폭우가 쏟아지던 어느 날.

 험난한 초행길도 마다하지 않고 감성마을로 가는 동안, 하늘의 환영인사가 시작되었다. 장마철 빈번히 발생하는 국지성 호우와 맞닥뜨린 것이다. ‘감성마을’에 가는 길이니 한여름의 뜨거운 태양보다는 그래도 비가 더 어울린다며 스스로 위로했다. 낯선 길 끝에서 만나게 될 사람, 폭우를 뚫고 달려가는 동안 나는 과연 어떤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것일까?

 자칭 ‘꽃노털 옵하’라고 말하는 이외수 작가는 약속보다 두 시간이 더 지나고 나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기다리는 것 외에는 갈 곳도 마땅히 할 것도 없던 터라,『하악하악』을 펼쳐 들었다. 단문 속에서 번뜩이는 가벼움과 무거움의 절묘한 조화들! 내 마음도 순식간에 '하악하악' 들뜨고 만다. 한결 쉽고 부드러워진 문장은 마음에 선명한 잔상을 남기기 시작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활동하고 있는 중견 작가 중 인터넷 활용도를 따져본다면 단연 이외수 작가가 으뜸일 것이다. 그 명성에 걸맞게(?) 최근 출간한 책에는 ‘하악하악’ 이라는 제목에서부터 ‘털썩’, ‘쩐다’, ‘대략난감’, ‘캐안습’, ‘즐!’ 로 구분되는 목차와 ‘킹왕짱 알흠답고 놀라운 세상(p.71)’, ‘무서븐 신념의 압박(p.218)’, ‘떡실신(p.220)’ 등 본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터넷 언어가 등장한다. 국어사전보다 유행어·신조어 풀이에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단어를 굳이 이름 있는 작가가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한 번쯤 사전을 뒤적여봐야 뜻을 알 수 있는 생소한 단어들과 접하는 순간, 묘한 호기심이 발동했다. 이슈를 만들어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기 위한 회심의 상술일까, 아니면 오늘날 급속하게 단절되어 가고 있는 세대 간의 교량 역할을 하기 위함일까. 책을 읽는 동안 이 의문에 대해 나름의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작가를 만난 뒤 그 해답은 서서히 확신으로 바뀌어 갔다.

 알려진 바와 같이 작가는 젊은 날 가난과 절망의 시기를 지나왔다. 그는 낮고, 사소하고, 하찮은 것들을 몸소 체험하는 동안 자연스레 그것들의 소중함을 알게 된 것이다. 『하악하악』에는 그 고난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의 충고와 비판을 달갑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삶의 진정성과 포용력 때문이다. 간혹 유머로 위장한 충고를 접하게 되는데, 그럴 때면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기도 한다. 마음에서 반성이 우러나온다. 칼날을 세워 마음에 난도질을 해대는 비난성 충고와는 분명 다른 점이 있다.

 범죄 행위에 속하지만 범죄로 인식하지 못하는 악플러와 자신을 향한 근거 없는 비난에 소신 있게 반격한다. 문학계 현실을 비롯해 정치, 교육, 외모지상주의 등 사회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문제에 대해 쓴 소리를 내뱉고, 편협한 생각에는 일침을 가한다. 여러 우화적 예문을 통해 다양성을 인정하며, 유머 속에 반전을 가미해 깨달음의 깊이를 더해준다. 젊은 세대를 위한 희망의 메시지 또한 빼놓지 않고 있다.

 이렇게 행간을 건너오는 동안 곳곳에서 작가의 외로움과 마주하게 된다. 지자체 최초로 생존 작가를 위해 마련한 집필 공간, 감성마을. 그곳의 유일 주민이라 할 수 있는 이외수는 비교적 매스컴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작가이기도 하다. 잦은 방송출연으로 감성마을이 유명세를 타면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고 한다. 그러다 덜컥, 물난리나 눈사태가 닥쳐오면 어김없이 고립되고 만다. 언제 고립될 지 모르는 그곳에서 작가는 늘 사람들과의 소통을 꿈꾸고 있다.

- 감성마을은 마침내 폭설 속에 파묻혀버리고 말았습니다. 손님들은 발이 묶인 채 모월당에서 눈이 그치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눈이 그치면 돌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길이 뚫려야 돌아갈 수 있습니다. 만세, 길이 뚫릴 때까지는 외롭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p.233)

 작가는『하악하악』에서 문학을 가볍게 탈바꿈시키되, 그 진정성은 유지하고자 노력한다. 꼭 필요한 문장에만 인터넷 언어를 사용하는가 하면, 느닷없이 질문을 던져 독자의 생각을 이끌어 낸다. 덕분에 쉽게 읽히고, 빨리 와 닿고, 오래 남는다. 

 책을 읽는 내내 은은한 향기를 맡을 수 있다. 읽을수록 더 은근해지는 이 향기는 작가가 배려한 또 하나의 감성 자극제인지도 모른다. 작가와의 만남은 즐거웠고, 운 좋게 정태련 화백도 만날 수 있었다. 그가 그려 넣은 민물고기들은 책 속을 자유롭게 유영하며,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애잔함을 더한다.

 이번 만남을 통해 한 권의 책과 한 사람의 작가를 더 가까이 이해할 수 있었다. 헤어지는 자리에서 작가는 마지막으로 사람들에게 자주 찾아오라는 말을 남겼다. 이처럼 감성마을은 언제나 열려 있고, 미리 스케줄을 알고 가면 언제든 작가를 만날 수 있다. 작가는 스스로를 열어 소통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하악하악』을 접하면서 생겼던 의문은 서서히 풀려 나갔다. 지금 우리시대에는 새로운 소통의 언어가 필요하다. 작가는 자기 자신, 세상, 세대 간 소통하는 길을 책을 통해 열어 주고 있는 것이다. 작가가 인터넷 언어와 젊은 세대의 말투를 문학에 끌어들인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기도 하다.

 기성세대가 젊은 세대를 이해하기란 갈수록 힘이 든다. 서로 사용하는 언어와 생각의 간극이 점차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시대에『하악하악』은 젊은이들의 비뚤어진 부분을 그들의 언어로 바로잡아 주고 있다. 분명 어른이 하는 충고지만, 고리타분하지 않고 귀에 쏙쏙 들어온다. 소통하는 방법의 차이인 것이다. 기성세대는 이 책을 통해 젊은 세대의 언어를 접하게 될 것이다. 한 번씩 머리를 긁적이며, 인터넷 언어를 검색해 볼지도 모른다. 선입견은 잠시 떨쳐 버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몰입해 보라. 꽉 막혔던 자녀와의 대화도 어느 순간, 물꼬를 트게 될지 모른다.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의 생각과 충고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기성세대는 젊은 세대의 언어와 문화를 이해해 볼 수 있다.

 우리가 바라는 진정한 소통의 길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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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지 않는 도전 박지성
박지성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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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하는 젊은 열정
 
 오로지 축구만을 위해 살아온 평발의 작은 소년 박지성!
 히딩크 감독의 품안으로 달려들던 스무 살 청년이 어느 날, 세계 최고의 명문 구단 중 하나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하게 된다. 꿈의 리그 잉글랜드에서 대한민국 최초 프리미어리거로 우뚝 선 박지성! 그의 잉글랜드 행은 갑자기 날아든 소식이었지만 결코 한 순간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초등학교 시절, 축구를 향해 첫 열정을 품은 후 오로지 축구만을 바라봤던 그에게 맨유는 꿈의 완성이 아니라 새로운 도전의 시작인 것이다!

 - 만약 내 인생 목표가 영국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하는 것이었다면 홀가분했을 것이다. 입단 계약서에 사인하는 순간 마치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The End' 타이틀이 올라가면 모든 상황은 종료. 기쁜 마음으로 발 뻗고 편안히 자는 일만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축구선수로서 나의 도전은 큰 구단으로의 이적도 아니고 많은 연봉이나 계약금을 받는 것도 아니었다. 새로운 구단에 들어가 제대로 경기에 출전하면서 진정으로 실력을 인정받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연봉을 받고, 큰 인기를 누릴지라도 축구선수가 그라운드에 서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다.(p.60)

 [멈추지 않는 도전]에는 박지성이 축구선수로서의 최대 약점인 작은 체구를 극복하고, 세계 최고의 명문 구단에 들어가기까지 거침없이 내달린 축구인생이 기록되어 있다. 초등학교 시절 축구에 첫 발을 들여 놓은 박지성은 ‘차범근 축구상’을 받는 등 두드러진 성장세를 보인다. 하지만 좀처럼 자라지 않는 키와 작은 체구 때문에 수원 공고 시절 처음 일 년 동안은 체격과 체력 보완에만 힘써야 했다. 그라운드를 누빌 수 없는 고통은 컸지만 그때의 선택으로 고2 때 170cm를 넘기며 현재의 키까지 성장할 수 있었다고 한다. 체력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한순간도 공에서 떨어지지 않으며 스스로 기술을 터득했던 박지성. 뚜렷한 목표의식과 꿈을 향해 도전하는 열정, 쉬지 않고 노력하는 모습은 오늘의 박지성을 말해주는 키워드나 다름없다.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배인 이 습관들은 최고의 선수라 칭해지는 지금도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팬들은 현재 그라운드에서 보여지는 선수의 모습만을 기억한다. 선수들이 얼마나 혹독한 훈련의 시간을 거쳤는지, 어느 정도의 준비를 마쳤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선발로 출전하지 못하면 ‘혹시나’ 하는 마음이 생기고, 교체 투입조차 되지 않으면 ‘섣부른’ 판단을 하기 시작한다.
 
 - 동양에서 온 작은 체구의 선수지만 맨유에 입단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은 서로를 인정했다. 그것이 맨유 선수들의 자긍심이었다. ‘누구든 우리 팀에 온 선수는 세계 톱 클래스’라는 프라이드. 이 자긍심과 긍지가 오늘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있게 한 것이었다.(p.68)
 
 맨유에 소속된 것만으로도 박지성은 이미 세계 최강자의 위치에 오른 선수다. 오늘 그라운드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영원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박지성은 성실하고 꾸준하게 매 순간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단 1분이라도 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면 최선을 다해 모든 것을 쏟아낼 준비를 이미 마친 선수다. 이런 선수에게 조급한 마음을 먹고 보채는 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멈추지 않는 도전]을 읽으면서 축구선수와 팬의 상관관계를 생각해 보았다. PSV에인트호번 시절 첫 일 년 동안 박지성은 무릎 연골 수술과 함께 슬럼프를 맞게 된다. J-리그에서의 활약과 영광을 뒤로 하고 떠난 네덜란드 행은 모든 것이 낯설고 힘들기만 했다. 재활훈련을 통해 곧 컨디션을 회복할 거라 생각했지만, 예전 같지 않음을 스스로가 먼저 알아챈다. 같은 팀 선수들 역시 박지성에게 패스하기를 꺼려했고, 홈팬들은 그가 교체 투입되면 온갖 야유를 퍼부었다. 그 당시 히딩크 감독은 홈경기를 제외한 원정 경기에서만 박지성을 교체 투입할 정도였다고 하니 팬들의 비난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간다.

 - 일단 최선을 다해보고 싶어요. 내가 가진 기량을 전부 보여주었는데도 팬들이 야유를 하고 그라운든 위에서도 통하지 않는다고 느끼면 그때는 돌아갈 수 있어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난 여기서 성공할 자신이 있어요. 반드시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해요. (p.218)

  재활훈련과 교체투입으로 힘든 시즌을 보낸 박지성에게 J-리그 세 곳에서 러브콜을 보냈다. 박지성에게 이 요청은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영광을 재현해 달라는 말로도 들렸을 것이다. 힘겨워도 박지성은 숨지 않았다. 홈팬들의 야유가 환호로 바뀌는 순간을 간절히 꿈꾸었고, 마침내 스스로를 팬들을 변화시키고 만다.
 
 현실적으로 선수의 실력과 리그의 수준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팬들의 관심이 여기에 좌지우지되기 때문이다. 선수들은 피땀 흘린 훈련의 결과를 그라운드에 모두 쏟아낸다. 그러나 관중들은 경기가 풀리지 않으면 선수의 노고를 생각하기 전에 성급하게 비난하기 시작한다. 나조차도 선수를 믿고 느긋하게 기다려주지 못하니 누구를 탓할 수도 없다. 박지성도 그 외면 속에서 자신감을 잃어갔고, 긴 슬럼프를 보낸 것이다. 팬들의 의식이 하루아침에 달라지진 않겠지만 변화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오로지 선수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해외구단 시스템을 관가한 채, 왜 해외 선수들처럼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냐고 비난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을까?

 박지성은 국가대표를 거쳐 일본, 네덜란드, 잉글랜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나라와 구단에서 축구를 해 오고 있다. 맨유는 최고의 리그답게 선수가 축구 외에 처리해야하는 모든 일들을 구단 산하 여러 자회사에서 해결해 준다고 한다. 훈련장과 의료시스템은 차치하고라도 새로 영입되거나 이사를 원하는 선수를 위해 부동산 전문 회사를 마련해 두었고, 법률적인 문제를 전담하는 변호사와 회계사도 갖추고 있다고 한다. 박지성이 영입되고부터는 매 식사 때마다 항상 흰쌀밥이 준비되어 나온다고 하니 구단의 세심한 배려가 어느 정도인지 상상이 가질 않는다. 그곳에서 선수는 오직 운동만 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의 현실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데, 외국 선수와 같은 플레이를 요구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멈추지 않는 도전]을 읽는 동안 박지성은 물론 축구에 조금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온 국민을 하나로 뭉치게 만든 것만으로도 축구는 대단한 스포츠임에 분명하다. 한 시절 큰 힘을 주었던 축구, 그것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열망은 높을 수밖에 없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기 마련. 월드컵 이후 지난 몇 년간 대표팀의 전력이 급격히 추락하면서 국민들의 관심도 소원해지기 시작했다. 그나마 A매치는 상황이 좀 낫지만, K-리그는 관심 밖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력은 한 순간에 일취월장하지 않는다. 알면서도 우리는 느긋하게 바라보며 응원하는 뒷심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이런 현상에 대해 어찌 국민들만 탓할 수 있으랴. 해외파 선수들이 종종 지적하는 것처럼 우리나라 축구도 유소년클럽에서부터 서서히 바뀌어 나가야 한다. 처음 한 걸음 내딛기는 어렵더라도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다보면 2002년의 영광을 재현할 순간이 다시 올지 모른다.

 언제나 더 높은 곳을 향해 멀리 보며 뛰어가는 대한민국의 박지성! 이제 그의 경기를 보면서 조금은 느긋하게 응원할 수 있을 것 같다. 선발출전이 아니더라도 단 몇 분간만 교체 투입되더라도 내일 더 좋은 플레이를 보일 것을 알기에 믿고 응원해야겠다. 같은 마음으로 우리나라 축구도 응원하고 싶다.

 책에는 몇몇 사람과의 특별한 인연도 소개되어 있다. 박지성의 체격을 보완하기 위해 혜안을 제시했던 당시 수원 공고 사령탑 이학종 감독의 지도는 인상적이다. 박지성의 축구인생을 새롭게 열어준 분이라 할 수 있기에 팬의 한 사람으로서 고맙기까지 하다. 히딩크 감독과의 남다른 애정도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가능성을 열어 더 큰 무대로 인도한 그의 탁월한 지도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가끔 박지성과 우정 어린 장면을 연출하던 루니를 비롯해 유명 선수들과의 일화도 수록되어 있다. TV 중계를 통해 그라운드를 누비는 맨유의 선수들을 만나는 기쁨을 쏠쏠하게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냉철한 선수가 아닌 사람 내음 물씬 나는 또 다른 모습으로.

 한국 최초의 프리미어리거 박지성의 인생이 담긴 에세이 [멈추지 않는 도전]. 전문 작가가 쓴 글이 아니기에 매끈하게 다듬어져 있진 않지만, 불편한 구석도 없다. 대신 여느 자기계발서보다도 와 닿는 구절이 많아 밑줄 그으며 읽기에 바빴다. 터질 듯 뿜어져 나오는 그의 에너지 덕분에 오늘 하루가 충만하게 차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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