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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 - 정보라 연작소설집
정보라 지음 / 래빗홀 / 2024년 1월
평점 :
이유는 모르겠지만 해파리들이 당신을 동료로 인정한 모양입니다.
p. 239
가르치고 연구하는 일을 천직이라 여겼던 '나'와 '남편(위원장님)'은 한밤중 대학 본관에 나타난 문어를 잠결에 잡아 라면에 넣어 먹게 된다. 다음날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난 검은 정장을 입은 덩어리들에게 연행된 두 사람은 문어에 관한 끊임없는 질문을 받게 된다. 치열한 노조 현장에 나타난 문어도 신기하지만 이 문어, 사람처럼 말을 한다.
문어, 대체, 상어, 개복치, 해파리, 그리고 고래로 이어지는 연작 소설은 치열한 저항의 현장을 배경으로 자꾸만 말하는 해양 생물과 마주치게 되는 독특한 전개를 보여준다.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많이 녹아든 소설이라 그런지 더욱 실감 나게 읽을 수 있었다.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로 집요하게 외치는 문어, 수산물 가게 수족관에서 러시아어로 도와달라 말하는 대게 '예브게니', 냉동 돔배기 신약 사업이라 속이는 사기꾼, 바닷속 탐험에서 만나게 된 개복치, 검은 덩어리들의 정체와 외계 생물 거래 음모의 진실이 드러나는 해파리와 고래까지 독특한 캐릭터들의 가벼우면서도 코믹한 상황이 매력적인 소설이다.
하지만 소설이 담고 있는 주제는 결코 가볍지 않다. 노동자의 생존권, 장애인의 이동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해양 생태계 파괴와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 등 현실의 문제들을 심각하지 않게 다루고 있다. 무려 4페이지에 걸쳐 있는 속사포 랩 같은 한 문장을 읽다 보면 현실 상황에 대한 분노를 알 수 있고 동시에 이 소설에서 보일 유쾌한 분위기를 기대할 수 있게 된다.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는 현실에 대한 저항의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하면서 동시에 재미를 보여주는 소설이다. 우리 앞에 산적한 수많은 문제와 대결하고 다 같이 살기 위해 '진심의 사랑'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천천히 생각해 본다. 웃기면서도 고달픈 현실을 돌아보게 만드는 마술 같은 소설이다.
이 남자와 결혼한다면 마지막 순간까지,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싸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질 줄 알면서도, 도망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언젠가는 끌려 나가 사라지더라도 어쨌든 끝까지 고개를 높이 들고 목청껏 외치면서 사라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게 인간을 위해서든, 난데없이 등장한 대게를 위해서든 말이다.
P. 69
구급차에 실려 가면서, 그리고 응급실에서 기다리면서, 나는 하늘과 바다가 뒤집히던 순간 온몸을 통과하던 파동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세상이 맥박 치고 우주가 진동하는 그 파동을 통해서, 물속을 질주하던 빛나는 존재들은 서로에게 외쳤다.
— 저항하라.
P. 2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