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년의 후더닛
아사네 주지 지음, 김은모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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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최초의 냉동수면 실험에 참가한 일곱 명이 천 년 후 깨어났을 때, 한 명이 죽었다. 이들이 잠들어 있던 셸터는 외부인이 전혀 들어올 수 없는 완전한 밀실이다. 일곱 명 중 과연 누가 범인일까.


'천 년'이라는 시간은 가능성을 무한대로 열어 놓는 시간이다.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고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그 시간 동안 밀폐된 공간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추리하는 과정이 꽤 흥미롭다. 소설의 주요 설정인 천 년이라는 시간의 간극은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미스터리가 된다. 그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을 때, 눈앞의 인물만을 의심하면 되는지, 천 년이라는 시간을 의심해야 하는지 판단하기란 쉽지 않다.


이 소설을 읽으며 내가 좋아하는 추리의 방식이 후더닛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느꼈다. 사건의 동기는 때때로 내 기준에서 쉽게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고(와이더닛) 소설 속 트릭은 내가 전혀 모르는 지식을 동원할 때도 있다(하우더닛). 하지만 등장인물의 말과 행동을 떠올리며 의심하는 과정은 그 자체가 커다란 재미를 준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도 사건의 동기에는 그다지 설득되지 못했다. 작가가 진화생물학을 전공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에는 그나마 이해되는 면도 있었지만 결국 이 소설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부분은 역시 후더닛이었다.


다만 이 작품의 재미가 단순히 범인을 맞히는 데에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사건의 진상이 조금씩 드러날수록 처음에는 단순한 배경처럼 보였던 ‘천 년’이라는 설정도 다른 의미를 갖는다. 냉동수면과 시간의 간극이 사건을 성립시키는 중요한 조건으로 기능한다는 점이 흥미로웠고, 그동안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알 수 없다는 점도 끝까지 쉽게 범인을 확신할 수 없게 만든다.


결말까지 읽고 나면 처음에는 불가능에 가까운 밀실을 만들기 위한 장치처럼 보였던 ‘천 년’이라는 시간이 왜 필요했는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SF와 본격 미스터리가 결합된 설정이 낯설지 않다면, 그리고 무엇보다 ‘이들 중 누가 범인인가’를 끝까지 의심하며 읽는 것을 좋아한다면 꽤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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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미우라 시온 지음, 김은경 옮김 / 시공사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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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에는 몰랐다. 평범한 하루가 얼마나 이상적이고 소중한 것인지. 하지만 이제는 알 수 있다. 소소한 순간이 주는 행복감을. 미우라 시온의 에세이는 오늘 하루치 행복을 담고 있다.


그녀의 일상을 들여다보며 마치 일본 여행을 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저자가 사는 공간을 구경하고 친구들과 나누는 이야기를 엿듣고 길을 걷다가 우연히 눈에 들어온 것을 함께 바라보다 보니 일본의 평범한 일상 한가운데 잠시 들어가 있는 듯했다.


그녀의 일상에 거창한 이벤트는 없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일상의 어느 한순간이 한편의 이야기가 된다. 사소한 것에 진지하게 빠져들기도 하고 별것 아닌 일에서 엉뚱한 생각이 뻗어나가기도 한다. 좋아하는 것 앞에서 들뜨기도 하고, 귀찮아하기도 하고,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이어가는 모습이 솔직해서 편하게 읽힌다.


읽으면서 의외로 좋았던 것은 일본의 평범한 일상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특별히 일본을 소개하는 책도 아니고 여행 이야기가 중심인 것도 아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래서 관광지에서는 만나기 어려운 일본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보인다. 작가가 다니는 곳과 만나는 사람들, 먹고 사고 생활하는 모습을 따라가다 보면 낯선 나라를 구경한다기보다 어느새 일본의 어느 동네에서 함께 하루를 보내는 듯하다.


어쩌면 이 책의 매력은 특별한 순간을 특별하게 포장하지 않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하루와 별것 아닌 관심사가 저자의 시선을 거치면 제법 재미있는 이야기가 된다. 대단한 교훈이나 의미를 찾으려 하지 않아도 그저 한 사람의 일상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웃게 되고, 평범한 하루에도 생각보다 많은 즐거움이 숨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좋아하게되었습니다 #미우라시온 #시공사 #에세이 #도서제공 #도서리뷰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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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트리스
퍼시벌 에버렛 지음, 송혜리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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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페이지까지 읽고 난 후 표지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이제서야 제목과 표지 그림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작년 여름, 퍼시벌 에버렛이란 작가를 처음 알게 되었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흑인 노예의 시선으로 재해석한 <제임스>의 충격이 꽤 오래도록 남아있었다. 그의 신작이라는 말에 궁금증이 생겼다. 이에 더해 내자 좋아하는 장르 소설이라는 말에 망설임 없이 집어 들었다. 소설은 이전 작품보다 더 충격적이다.


혐오와 차별이 극심해진 현실에 소설 속 결말은 공포로 다가온다. 작가는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는 끔찍한 현실을 추리소설의 형식으로 보여주지만, 마지막에는 현실과 초현실의 경계가 무너지는 정치적 우화로 나아간다. 개인적으로는 권선징악의 명확한 결론을 선호한다. 그러나 이 소설의 결말은 모호하다.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어디서부터가 집단적 환상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공포감은 극에 달한다.


제목이 말하는 바도 다양하다. '나무'는 인종차별의 현장이자 한 집단의 계보를 나타낸다. 과거 조상이 저지른 죄가 후손에게까지 이어지는 역사는 끊임없이 반복된다. 무거운 마음으로 읽던 소설은 후반부에 갑작스럽게 등장한 백악관 장면에서 다소 흐름이 흐트러지는 듯했다. 노골적인 풍자와 패러디는 낯설었지만, 사건이 벌어진 장소의 상징성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명확하게 해결된 바는 없다. 여러 의문이 끝내 남지만,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복수의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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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충 사육 준수 사항 안전가옥 오리지널 48
김혜영 지음 / 안전가옥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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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전에서 유독 시선을 끄는 책이 있었다. 안전가옥 부스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책이다. 빵인지 벌레인지 모를 표지에 제목부터 독특했다. 마침내 읽게 된 이 책은 세계관마저 기묘했다. 존재만으로도 나에게 기괴함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빵충. 그 실체를 알고 나면 더욱 놀랄 것이다.


20년을 트럼펫에 바쳤지만 서른 살의 김정한에게 남은 건 3억의 빚이다. 희망이 보이지 않던 그에게 빵충 사업은 인생을 뒤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빵충은 한 입 베어 물면 갓 구운 소금빵 맛이 나는 신종 곤충이다. 정부는 이를 미래 식량으로 내세우며 사육 사업을 보장한다. 빵충을 사육할 때는 반드시 준수 사항을 지켜야 한다. 그것만 지킨다면 안정적인 수입은 보장된다.


조건은 간단하다. 번데기를 발견하면 즉시 보고할 것. 살아 있는 빵충은 상품으로 출하하지 말 것. 사육장 안에서 큰 소리를 내지 말 것. 불시 점검 시 담당자의 지시에 따를 것.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성충으로 변태시키지 말 것. 하나같이 구체적이면서도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규칙들이어서 읽는 순간부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모든 사건은 규칙을 어길 때 일어난다. 탄탄대로를 달리는 것처럼 평온했던 삶은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아수라장으로 변한다. 그때부터 이야기는 온통 피로 물든다. 초반에 보여준 청년의 실패담은 애교에 불과했다. 처음에는 한 청년의 실패담인 줄 알았는데, 이야기는 어느새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갔다.


이 이야기의 끝이 어디로 향할지 궁금했다. 한 번 속도가 붙은 이야기는 좀처럼 멈추지 않았고, 평범하고 답답하게만 보였던 인물들의 선택이 파국을 불러오는 과정도 강렬했다. 그리고 마침내 끝에 도달했을 때 작가 소개를 다시 읽었다. 이토록 기괴하면서도 현실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낸 작가의 상상력이 새삼 궁금해졌다. 빵처럼 보이는 벌레라는 단순한 발상에서 인간의 욕망과 생존, 산업의 광기까지 끌어낸 작품이었다.


#도서제공 #도서리뷰 #서평 #빵충사육준수사항 #안전가옥 #장르소설 #소설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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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시대의 종말
비비언 고닉 지음, 홍한별 옮김 / 엘리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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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절반 정도를 살아오면서도 '사랑'은 여전히 모르겠다. 누군가를 만나 감정을 나누고 시간을 보내는 일련의 행위가 낯설다. 익숙하지 않음에서 오는 거부감도 있다. 경험의 부재 때문일까. 사랑이라는 말만 들어도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는 것 같다. 그런 탓에 사랑과 관련한 책은 늘 내 선택지의 바깥에 있다. 이 책 역시 저자 이름을 보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사랑은 오랫동안 개인의 삶을 설명하는 가장 강력한 이야기였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 사랑이 이루어지고, 마침내 결혼에 도달하는 과정은 단순한 관계의 성립을 넘어 한 인간이 자기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과정으로 그려졌다. 비비언 고닉의 <연애 시대의 종말>은 이 오래된 서사가 여전히 유효한지를 묻는다. 사랑이 사라졌다고 말하는 책은 아니다. 다만 사랑과 결혼이 한 사람의 행복과 삶의 성취를 모두 설명해 줄 수 있는지 의심한다.


고닉은 20세기 문학과 작가들의 삶을 읽으며 사랑과 결혼이 과거와 같은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를 살핀다. 책에 실린 글들은 서로 다른 작가와 인물을 다루지만, 읽다 보면 비슷한 질문이 반복해서 남는다. 사랑은 한 사람의 삶에서 어디까지 중요할 수 있는가. 과거 소설에서 사랑은 개인적인 감정만을 뜻하지 않았다. 결혼은 신성한 제도로 여겨졌고,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삶의 형식이 제한되어 있던 시대에는 사랑의 선택 자체가 사회적 질서와의 충돌을 의미했다.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와 결혼하는가는 곧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문제였다. 


지금도 사랑에 과거와 같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여성에게 이전보다 넓은 사회적 선택지가 주어진 시대에 사랑은 더 이상 유일한 해방의 통로가 아니다. 사랑의 선택이 여전히 중요하더라도, 그것만으로 한 사람의 자아와 삶 전체를 설명하기는 어려워졌다. 사랑은 삶에서 중요한 일이지만, 삶의 나머지 부분까지 대신해 주지는 못한다. 이 책에서 말하는 것도 결국 이 차이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나 역시 여전히 사랑을 원하지만 사랑만으로는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누군가와 가까워지고 싶지만, 그 관계가 내 삶에 대한 책임을 면제해 주기를 바라지 않는다. 내게 사랑은 영원히 풀 수 없는 난제로 다가온다. 사랑이 자아를 대신 만들어 주지는 않지만 자아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분명 어떤 역할을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사랑은 삶의 결말이 아니라 삶을 이루는 여러 경험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사랑이 잘되었다고 해서 삶의 다른 문제까지 해결되는 것은 아니고, 사랑에 실패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삶마저 실패한 것은 아니다.


고닉이 보여준 문학작품 속 인물들의 사랑을 따라가며 '사랑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이제는 나름의 대답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여전히 사랑을 잘 모르고 영원이 완전한 사랑의 정의를 알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도 사랑은 한 사람의 삶을 완성해 주기 때문에 아니라, 내가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를 알게 한다는 점에서 한 번쯤은 제대로 겪어 볼 만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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