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부자의 그림일기
오세영 지음 / 글논그림밭 / 200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한 권의 책으로 묶어 출간된 것은 90년대 후반의 일이지만, 수록된 단편들은 모두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의 것이다. 그나마 90년대 초반의 세 편은 월북작가들의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한 일련의 작품들이며, 나머지는 모두 88년부터 90년 무렵에 발표된 것들이다.
그 당시에 무슨 일들이 있었던 것일까? 87년 시민항쟁이 있었고, 직선제 대통령(저간의 사정이야 어쨌거나)이 선출되었고, 한 마디로 민주화라는 것이 진행되었다. 문화예술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수많은 금서, 금지곡들이 해금되고 창작의 자유가 대폭 확대되었다. 이런 사회적 변화에서 만화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예전에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던 사회비판적 창작물들이 쏟아져나왔던 것이다. 그 한 정점에 이 단편집의 수록작들이 있었다. 이른바 기념비적 작품이랄까.
하지만 21세기 초인 지금에 와서 보면 확실히 '기념비같은' 작품이기도 한 것이 사실이다. 동시대적 생생함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소설로 치면 마치 황석영의 [객지]나 조세희의 [난쏘공]이나 임철우의 [아버지의 땅]같은, 시로 치면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이나 신경림의 [농무]같은, 음악으로 치면 정태춘의 [아, 대한민국]같은 정서로 고스란히 점철되어있다. 민중적이랄지 서민적이랄지, 내용에서도 형식에서도 리얼리즘 원칙을 모범생처럼 고수하고 있는 그 모습은 좀 답답하다는 느낌마저 준다. 작품의 상당수가 20세기 초중반을 시대적 배경으로, 농촌을 공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도 큰 원인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낡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치면 명작이라고 불리는 것의 대다수가 같은 신세가 되어야 할 터이다. 세월을 뛰어넘어 호평을 받는 작품에는 항상 역사적 의의 이상의 것이 있기 마련이며 본작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도 내용뿐 아니라 그림과 구성 모두에서 구절구절 찾아볼 수 있는 '성실함'은 최대의 미덕이 아닐까 한다. 다만 작가의 기본시각 자체가 80년대식 사실주의의 갑옷을 단단히 두르고 있는 탓에서 기인하는 '답답함'은 아쉬운 대목이다. 어쩌면 그것은 아직 그 시대의 잔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독자의 정서가 진짜 원인일지도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