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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의 불교강의 - 주머니속대장경 101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홍근 옮김 / 여시아문 / 1998년 4월
평점 :
절판
단편소설 하나하나가 철학논문 한 편에 맞먹는 보르헤스 사유의 깊이를 책 한 권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한 권 아니라 100권을 읽어도 깨닫기 어렵다는 불교의 교리야 말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이 얄팍하고 조그마한 책은 둘 모두에 대한 냄새 하나만큼은 실컷 맡게끔 해주는 위력을 지니고 있다. 보르헤스에 대해, 그리고 그와 불교와의 연관성에 대해 역자가 설명한 해설이 앞부분 80여쪽을 차지하고 있고, 보르헤스가 쓴 불교개론이 115쪽 정도, 그에 더해 앞의 글을 바탕으로 그가 직접 행한 강연을 정리한 글이 25쪽 정도로 구성되어있다.
보르헤스의 불교 해설은 상당히 광범위해서 근본불교부터 선종, 나아가 티벳불교까지 망라하고 있다. 해설방식 또한 남미의 지식인답게 불교 안에서의 것도, 그렇다고 또 영 밖의 것도 아니다. 불교에 대한 기초이해가 거의 전무할 남미와 서양의 독자들을 위한 것이다보니 쉽고 일반적이면서도 비교종교학적인 관점이 돋보인다. 여타 종교와의 유사성과 차이점을 해박한 지식으로 풀어쓰고 있을 뿐 아니라 불교 내부의 여러 종파들 사이에 염연히 존재하는 차이에 대해서도 객관적으로 잘 정리해준다.(이 부분에 대해서 보통 한국의 필자들은 약점 내지 편협성을 드러내기 일쑤다.)
다만 불교의 깊은 맛을 이 책 하나로 대신할 수 있다고 기대한다면 그것은 큰 오산이다. 객관적이고 일반적이라는 것은 그만큼 겉핥기 식이라는 뜻도 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보르헤스는 서양의 생초보들을 위해 냉정하고 침착하게, 그리고 최대한 쉽게 제반사항들을 일별해주고 있을 뿐이다. 쉽고 간결한 것이야 마땅히 미덕이겠지만, 그것에 중점을 맞추다보면 중요한 것들을 지나치게 생략할 수밖에 없는 법 아닌가. 어디까지나 유용한 개론서, 맛깔스러운 에피타이저 이상도 이하도 아님을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