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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빗
존 로날드 로웰 톨킨 지음, 이미애 옮김 / 씨앗을뿌리는사람 / 2002년 11월
평점 :
절판
작가에게뿐 아니라 독자에게도 [호빗]은 [반지]의 대서사를 감당하기 위한 가볍고도 아기자기한 몸풀기가 될 듯하다. 그렇다고 반드시 [호빗]을 먼저 읽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 앞 이야기는 이랬다더라'는 식은 다른 시리즈들을 통해 이미 익숙해져있고([대부], [스타 워즈], [애니매트릭스], 나아가 [건담]까지), 어차피 여기가 맨앞도 아니니까. 오히려 [반지]에서는 스치듯 회상되고 마는 이름과 사건들, 그러니까 참나무방패 소린이나 베오른, 바르드, 스마우그, 다섯 군대의 전투 등의 실체를 뒤늦게 확인해가는 재미도 쏠쏠하다. 결과를 먼저 보고 원인을 캐어나가는 재미는 범죄물에서만 맛볼 수 있는 게 아닌 모양이다.
그러나 둘 다 읽지 않은 독자에게라면, 역시 [호빗]으로부터 시작할 것을 권한다. 훨씬 덜한 부담감은 1/6 정도의 분량만이 아니다. 소문만 듣고 덜컥 [반지]를 집어든 사람들이 가장 골탕을 먹는 그 지리한 풍경묘사도 없고, 누천년에 이르는 역사와 이름들에 짓눌려 세계사 시험을 준비하는 듯한 착각에 빠질 염려도 없다. [반지]의 온갖 흥미진진한 요소들이 그야말로 절묘한 수위로 샘플링되어있는 걸 확인하다보면 애초부터 톨킨의 머리 속에는 '모든 것'이 계획되어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까지 한다.(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한 다음에 읽은 건데도.)
그렇게 준비운동을 가뿐히 마친 독자들에게는 [반지]라는 가슴 뛰는 본게임이 준비되어있을 것이고, 어쩌다 본게임을 먼저 치른 독자들에게는 [호빗]이라는 유쾌한 뒷풀이가 기다리고 있는 셈이 된다. 행여라도 어느 한쪽만 맛보고 마는 우를 범하지는 마시길. 보다 동화적이라고는 하지만 어른들에게도 결코 유치해보이지 않을 만큼 완성도는 탄탄하며, 이 판본의 경우 편집이나 번역문체 또한 동화책같은 구석은 전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