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
밀란 쿤데라 지음, 김병욱 옮김 / 민음사 / 1995년 4월
평점 :
품절


베토벤의 홀수 교향곡들은 대개 거창하고 웅대한 반면 짝수 교향곡들은 상대적으로 소박하고 우아한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의도적이었던 아니었든, 큰 산을 한번 넘은 후엔 평평한 들을 거닐듯이 작품을 이어갔다는 얘기다. <느림>은 쿤데라의 짝수 교향곡에 해당하는 작품이 아닐까 한다. 그 앞뒤에 대작이 포진하고 있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작가가 한번쯤 가볍고 부담없이 써내려간 중편으로 보면 될 것 같다.(실제로 분량이 얼마 되지 않는다. 180쪽이라고 하지만 책크기도 작고 글씨체도 상당히 크다.)

이런 점에서 치밀한 구성과 완벽한 짜임새를 자랑하는 다른 작품들에서와 똑같은 것을 기대했던 독자는 약간 실망을 할지도 모르겠다. 소설인지 수필인지 헷갈릴 때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이 작품의 매력이 아닐까 한다. 산조처럼 널널하게 풀어놓고서 군데군데 툭툭 던지는 경구같은 한 마디가 오래 남는다. 중년을 넘어 노년에 접어든 대작가의 수필같은 소설이란 종종 이런 식이다. 뭔소린가 싶어 주섬거리다 보면 어느덧 말은 가고 뜻만 남아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