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냐 존재냐 범우사상신서 3
에리히 프롬 지음. 방곤,최혁순 옮김 / 범우사 / 1999년 1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포함하여 에리히 프롬의 몇몇 유명한 저서들은 '쉽게 쓰여졌다'는 이유로 오히려 홀대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인문학적 지식이 고작 전문기술의 하나인 것처럼 취급되는 사회풍토를 반영하는 것 같아 영 씁쓸하다. 쉬운 얘기도 어렵게 하고 한번에 하고 남을 얘기도 여러 번 나누어 하는 것이 자신의 이익에 보탬이 된다고 여기는 지식 상인들이라면 당연히 프롬의 저서들을 외면하고만 싶을 것이다.

그만큼 프롬의 이 책은 깊고도 넓은 내용을 난해하지 않게 풀어쓴 역저이다. 여기저기의 인문/교양 추천도서 목록에 자주 들어간다는 이유만으로 이 책을 우습게 여긴다면 곤란하다. 프롬은 평생에 걸친 연구와 고민의 결과를 이 한 권에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무난히 읽어나갈 수 있는 정도의 난이도를 지니고 있지만, 사회철학을 공부한 독자일수록 페이지마다에서 여타 현대사상가들의 여느 주저 못지 않은 무게를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읽기에 까다롭지 않으면서도 심오한 고전들이 얼마나 많은가.)

책이 처음 쓰여진 것이 1976년이고 약간의 수정을 거친 재판이 나온 것도 1978년이라는 사실(프롬은 1980년에 세상을 떠났다)은 이 책의 현재적 가치를 조금도 훼손하지 못한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체제 모두에 대한 그의 고찰과 비판은 25년여의 시간 정도는 소화하고도 남을 만큼 발본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집필 당시의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은 그대로 몰락의 예언이 되었고(예를 들어 제4장에서 프롬은 '러시아 혁명은 실패했다'고 단언하고 있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역시 마찬가지 이유에서 여전히 서슬이 퍼렇기만 하다.

그러한 비판의 근거가 되는 것들은 과연 노대가답게 광범위하고도 깊이있다.(일부 소장학자들에게서 종종 볼 수 있는 '한두 가지 밑천을 두고두고 우려먹기' 식과는 정반대다.) 때로 그것은 현대의 정신분석학이기도 하고, 또 때로는 불교나 기독교처럼 오래된 종교이기도 하다. 에크하르트, 맑스 등 유럽의 사상가들은 물론이고 필요에 따라서는 영국의 시인 테니슨이며 일본의 시인 바쇼까지도 동원된다. 비판의 지점도 다방면이어서 때로는 강의를 그대로 받아적는 데 급급한 학생들의 공부방식이, 또 때로는 전세계를 풍미하다 썰물처럼 퇴조해버렸던 히피이즘이 도마 위에 오른다. 이 거침없이 넓은 보폭이 그러나 정연한 체계와 논리에 따라 흐트러짐 없이 이어지는 모습은 고수의 무공을 보는 것 같은 쾌감마저 불러일으킨다.

현대사회와 현대인에 내리는 그의 진단결과는 '소유양식이 지배하는 삶'이다. 신좌파의 주요이론가 중 한 사람답게 자본주의 체제를 정확하게 겨냥하고 있으되 현실 사회주의도 이 문제를 전혀 극복하지 못했다고 보아 함께 표적으로 삼는다. 그리고 그 해결책 역시 단순히 사회체제의 재편이 아닌, 삶의 양식 전반에 걸친 변화(특히 정신적인 면을 매우 중요시하는)로 파악한다. 그 방향을 일컬어 프롬은 '존재양식이 지배하는 삶'이라고 명명하고 있는 것이다.

프롬이 꿈꾸는 변화된 삶-사람-사회는 상당히 구체적인 모습을 띄고 있다. 제8장에서는 '새로운 인간'의 21가지 특성을, 제9장에서는 새로운 사회 건설을 위한 8가지 과제를 마치 정당 강령처럼 정리해놓기도 하고, 그것도 모자라 부차적인 과제 8개까지 제시하고 있다.(놀랍게도 그것들 중 대다수는 90년대 이후 한국사회에서 주요 쟁점이 되어온 것들이다. 소비자 운동, 참여 민주주의, 사회보장제도, 관료주의 타파, 가부장제 극복, 정보 민주주의 등.) 그리고는 말미에 가서 이 새로운 사회의 실현가능성 여부까지를 스스로 되짚어가는 태도에서는 학문적 엄밀함만이 아니라 필생의 마지막 메시지를 전하는 노대가의 진심 어린 절박감마저 느껴진다.

적자생존식 무한경쟁을 골간으로 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그것에 반대하는 세력 간의 마찰이 전지구적으로 펼쳐지고 있는 지금, 프롬의 깊이있는 통찰은 더욱 각별한 의미를 지닐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